# 52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독도 부근의 영해(領海).
등대가 까마득한 밤바다를 비추는 가운데.
류건이 해군 함정에 몸을 실은 채 상공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도달한 곳은 레비아탄이 마지막으로 발견되었던 지역이었다.
“괜히 내가 다 떨리네.”
류건은 자신이 직접 싸우는 것 마냥 사뭇 긴장했다.
허상던전이 생성된 것 마냥 하늘에 특수 장막에 쳐져있었기에 육안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육감으로나마 느낄 수 있었다.
한창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시현이라면 필히 그러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는 한 번 시작한 일에 관해서는 멈추지 않고, 브레이크가 고장 난 불도저마냥 끝장을 보는 성격의 소유자니까.
‘적어도 내가 느껴온 바로는.’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시현은 필히 끝장을 보고 올 것이리라.
류건은 확신하며 그게 몇 시간이 되었든 간에 기다리고 또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늘은 높고 시커먼 먹구름으로 가득했다.
갑판 위에 선 채 그 광경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류건은 못내 아쉽다는 듯 연거푸 입맛을 다셨다.
비로소 완전한 권능을 얻은 시현의 활약을 보지 못한다는 현실이 먹구름마냥 마음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나저나 그 괴물···.’
류건은 아까 보았던 레비아탄을 떠올렸다.
한 번도 본 적도 들어본 적도 없는 전후무후한 괴물이었다.
매니저뿐 아니라 헌터로서도 넘치는 재능이 있는 류건이었지만 그 존재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레비아탄은 인류에게 있어서 그 정도로 위험한 존재였다.
국내의 모든 헌터가 모여 협공한다면, 과연 발톱하나라도 자를 수 있으려나?
휘휘-
류건은 고개를 내저었다.
어림없는 소리, 라고 생각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데 지금 그런 존재를, 시현이 단신으로 상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잠든 이 밤중에!
물론 이 바다 위에 류건만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한국의 해·공군 및 헌터들이 현장에 출동한 상태였다.
또한 일본 영토의 상공을 날아다녔던 레비아탄이 아니던가?
일본에서도 해상 및 항공자위대와 헌터들을 출동시켰고,
그뿐만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 미국에서도 비밀리에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레이더로는 좀처럼 잡기 힘든 무인정찰기 따위를 보내 동해 상공을 탐사했다.
마지막으로 헌터중앙기구에서도 뛰어난 기술력으로 비밀리에 정찰 중이었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곳의 실체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그 장소는 레비아탄이 창조한 가상공간이었기 때문에.
두구두구!
함정 옥상 헬리포트에 헬기 한 대가 착륙했다.
상공을 몇 바퀴 돌다가 내려온 대원들이 헬기에서 내렸다.
공무원 헌터 및 공군과 함께 협력임무를 수행 중이던 헌터중앙기구 팀이었다.
개중 임장호가 진한 한숨을 내리쉬며 류건에게 걸어왔다.
“아무 것도 안 보여. 감지도 안 되고.”
“옵저빙도 안 됩니까?”
“전혀.”
임장호는 담배하나를 입에 물며 우측으로 고갯짓을 했다.
긴급하게 불려나온 말콤이 양손바닥을 내보이고 있었다.
‘스캔이 안 통한다는 건 우리 인원으로는 불가능하단 소린데···. 역시 차원이 다른 수준이라는 건가.’
문득 시현이 걱정되었다.
그 무렵, 헬기착륙장에서 누군가 다급히 달려와 류건에게 고개를 내밀었다.
“괜찮겠죠....?”
시현이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내리 짐작하고 있는 지원이었다.
“그럼요. 걱정 마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류건은 내심 불안했다.
레비아탄의 압도적인 위엄을 떠올리자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시현을 믿었다.
‘잘하고 계시겠지.’
늘 그렇듯 쓸데없는 걱정을 가래침 뱉듯 시원하게 집어치웠다.
‘믿습니다. 나의 별이시여.’
신을 신봉하는 신도처럼 시현을 신뢰했다.
그 어떤 위험이 닥쳐와도 ‘지혜롭게’ 이겨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
.
.
동해 상공, 레비아탄의 장막 안은 그야말로 피와 살이 난무하는 격전지였다.
하지만 그 역경을 헤쳐 나가는데 있어서 ‘지혜’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저 짓밟고 터트리고 깨부수며 눈앞에 보이는 모든 적들을 무자비하게 소멸시킬 뿐이었다.
“절단.”
촤르륵!
카아앙!
촤륵- 촤륵!
강인한 언령이 선포되자 수천 마리의 몸뚱이가 절단되어 벚꽃 휘날리듯 흩날렸고,
“정지.”
스윽-
-키이이이익?!
“뼈와 살을 분리.”
촤르르륵!
“관절 꺾기.”
콰직-
우드드드득!
“분쇄.”
위이-
챠르르르륵!
케륵! 카응!
또 한 번 수천 마리가 동시에 뼛조각이 되어 공중에 흩날렸다.
그럼에도 하늘은 흑색의 별이 수놓은 밤처럼 몬스터들로 득실득실 거렸다.
문자 그대로 대(對) 물량 전.
적의 숫자는 무려 20만이었기에 한 번에 상대할 수는 없었다.
언령의 효력이 발동되는 범위가 제한적이었으니까.
기력이 무제한인 것도 아니고, 기(氣)의 농도와 질이 극에 달하는 수준도 아니었기 때문에.
그저 내뱉고, 또 내뱉을 뿐이다.
믿음이 담긴 언령을!
“소멸.”
전방을 아득히 채운 수천 마리의 몬스터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부산물 하나 남기지 않고 말끔히 소멸되었다.
그에 이어서,
“삭제.”
이로써 또 수천 마리가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야말로 시현의 독무대, 그 자체였다.
그런데,
‘음···.’
막힘없이 언령을 내뱉던 시현은 입을 닫았다.
기력이 모두 소진된 것이다.
그 사실을 눈치 채기라도 했는지 상대진영에서 긴박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이때다! 진군 !
군주 급 몬스터의 명령에 몬스터들이 악을 지르며 떼로 달려든다.
하지만 시현은 놈들에게 보란 듯,
“기력 흡수.”
아까 던전에서 기력을 회복했을 때와는 다른 메커니즘.
놈들에게서 팔팔한 기력을 앗아가 흡수했다.
당연히 포켓은 고농축의 기력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하나 더.
“쿨타임 초기화.”
스르르르······
이것 또한 가능(可能)!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모든 언령이 초기화되었다.
다만 쿨타임을 영구적으로 제거할 순 없었다.
즉, 아무리 노력해봐야 ‘스킬과 권능’의 틀에서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언령 자체가 권능이자 스킬이니까.
‘이것도 이것대로 머리 아프네.’
아무튼 결론은 기력만 있으면 웬만해서는 다 가능하다는 것!
자연의 섭리, 우주의 법칙을 거스르는 것만 제외하고.
-키요오오오!
시현이 짓쳐드는 몬스터들을 향해 희망 따윈 없다는 듯 선고한다.
“학살.”
푸욱-
카앙!
촤륵! 푸쉬익!
-키, 키, 키이이이이익!
그 잔혹한 광경에 몬스터들은 겁에 질려 전의를 상실하면서도 시현을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저 뒤에 숨어있는 레비아탄에게 지배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쭈. 이것들 봐라?’
아직도 많이 남았다.
마치 죽을 각오로 성을 함락시키려는 병사들처럼 끝없이 밀어붙인다.
하지만 시현은 외려 잘됐다는 듯 만족스러운 낯빛을 띠었다.
‘좋아. 아직도 많이 남았어.’
이유는 자명했다.
아직 시험해볼 게 많았으니까.
시현은 전부터 해보고 싶었던 것을 해볼 참이었다.
먼저 첫 번째.
“이기어검술(以氣馭劍術).”
순도 100%의 기력으로 창조된 흑색의 검이 두둥실 떠올랐다.
여기까지는 원래 쓸 수 있는 스킬이었다.
하지만,
‘설마 이런 것도?’
“복사신공 십 배(複寫神功 十 倍).”
촤르륵-
맙소사!
위명 있는 말도 아니고, 실존하는 무공도 아니거늘 언령의 효력이 발동됐다.
한 자루였던 흑색의 검이 열 자루로 늘어난 것이다.
그렇다면,
“복사신공 오십 배(複寫神功 五十 倍).”
촤르르륵!
열 자루였던 검이 오백 자루로 늘어났고,
“복사신공 백 배(複寫神功 百 倍).”
오백 자루였던 검이 끝내는 5만 자루로 복사되었다.
‘이거 완전 아무 말 대잔치구만.’
문제가 있다면 기력이 쑥쑥 빠진다는 것.
그래도 검을 5만 자루나 만들어놨으니 된 것 아닌가!
이제 그만 이 비루한 전쟁을 끝낼 때다.
이미 공간은 몬스터들의 부산물로 가득차서 금방이라도 깨질 듯 너덜너덜한 상태였다.
‘그럼 이제 마지막으로.’
“척준경 식 곡산검법.”
스컹!
파스스스스슷- !
카오오오옹!
오만 자루의 검이 춤을 추듯 현란하면서도 절제된 검법을 펼쳤다.
그야말로 대 학살극.
십 수만이나 남았던 몬스터들을 남김없이 죽였다.
그 참경이 잔혹하기 짝이 없어서 보고만 있어도 일반인들은 심장마비로 사망할 수준이었다.
“이걸로 잡몹은 처리했고. 그리고 저건···”
한바탕 살육을 끝마친 뒤 남은 기력을 갈무리하던 시현의 귓가에 느닷없이 몹시 성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노옴!
저 멀리 시야 끝자락 지평선에 걸친 레비아탄이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느니라!
어느새 레비아탄의 입 안에 거대한 구체가 형성되어 있었다.
마치 블랙홀처럼 무엇이든 집어삼킬 듯한 흑색의 구(求).
파멸만을 갈구하는 원초적인 의지와 고농축으로 정제된 기운이 담겨있었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20만 마리의 부하가 죽을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어어어어어어 !
녀석의 결막에서 붉은빛의 짓무른 액체가 흥건히 흘러나와 스스로의 몸을 적셨다.
그러더니 브레스를 내뿜는 드래곤의 그것처럼,
콰아아아아아아-!
암흑으로 뒤덮인 구체를 섬광과 공포를 동반하여 시현에게로 쏟아냈다.
그리고 그 순간!
“뭐해.”
-······?!
시현이 뻗은 손앞에서 멈춰버린 구체.
야성미 넘치던 맹수가 비스트 마스터를 만나 순진한 양으로 변모한 것처럼.
코앞에 타깃이 있음에도 구체엔 정적만이 흘렀다.
“돌아라.”
솨라라라라-
구체가 허공에서 팽이마냥 돌아간다.
그러고는,
“사라져.”
사라락-
한줌의 기조차도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혼신의 힘을 다해 쥐어짜낸 레비아탄의 일격이 소멸된 것이다.
일개 몬스터도 아닌,
대양의 사령관.
질투의 근원.
시기의 화신.
살아 움직이는 죄악.
한때 엔델 족을 공포로 몰고 갔던 레비아탄의 필살기가 말이다!
레비아탄은 그저 고양이 앞에선 쥐새끼마냥 어디 도망칠 곳 없나 쥐구멍만 찾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딴 곳은 애당초 존재하지도, 앞으로 존재할 수도 없었다.
“적장에 왔으면 최소한 뼈를 묻을 각오는 했어야지.”
이어, 레비아탄의 죄를 심판하듯 사형선고를 내렸다.
“죽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푸슉!
한차례 검붉은 피를 토해내는 레비아탄.
-커헉.....!
푸어어어어!
걸쭉한 선혈이 앞서 죽은 몬스터들의 사체 위로 폭포수마냥 쏟아져 내렸다.
-이게 무슨........
“오. 이걸론 안 죽는다, 이건가.”
치명상을 입긴 했으나 죽지는 않았다.
언령이 온전히 먹혀들지 않고 중간에 툭 끊긴 것이다.
잘 보던 TV가 갑자기 뚝 꺼진 것처럼.
마치 포켓이 밑 빠진 독이 된 듯한 느낌이랄까.
불과 몇 초 만에 기력이 모두 소모되었다.
‘좀 더 연구해볼 필요가 있겠군.’
앞으로 시행착오를 겪으며 능력에 관해 자세히 알아봐야할 듯싶다.
일단 레비아탄과의 혈전부터 끝내놓고.
“기력 재충전.”
스아아아아······
스윽.
재차 기력을 완충한 시현은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극한의 공포에 갇힌 레비아탄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아우성을 내지를 뿐이었다.
-그오오오오오오오!
죽음을 예감한 것인지 마치 유언이라도 전하는 것처럼.
안간힘을 쓰며 비명을 고래고래 질렀다.
안 그래도 흉악하기 짝이 없는 몰골인데, 거기에 비명까지 내지르니 더더욱 악마 같았다.
더는 꼴 보기 싫은 광경에, 시현은 입을 열었다.
“왜? 죽기 딱 좋은 날이구만.”
사탄 휘하의 사령관.
악마군 72권좌 중 15권좌.
몬스터 18위계.
수많은 이명을 달고 다니는 레비아탄은,
슥-
좌아아아.
컹!
-크오오오오오오오오!
비참하게 울부짖으며 운명하였다.
그것은 시현의 승리를 알리는 승전보이자,
시현의 인생 2막을 알리는 경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