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둘의 생각이 일치된 순간.
누구 할 것 없이 서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안산에 있는···”
“기력발전기!”
“맞습니다. 그게 제 생각이에요.”
시현의 신고식이 치러졌던 안산의 특수던전.
그 던전 안에 기력발전기가 있다는 사실은 그때부터 알고있었다.
“방법은 좋네요. 불가능한 것도 아니고.”
기력발전기.
그 거대기계에 대해서는 익히 들은 바 있었다.
마치 저장탱크처럼 기를 모은 뒤 끊임없이 고농도로 압축하여 저장하는 기계.
명칭대로 기를 계속하여 발전하는 것이다.
“열쇠에 채워 넣을만한 양이 저장돼있을까요?”
“으음···.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열쇠에 필요한 양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니.”
류건은 그제야 좀 진정됐는지 심호흡하며 차분하게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니까 만약, 열쇠에 기를 가득 채워 넣을 수 있으면 구슬을 사용할 수 있는 거지요?”
“그럼요.”
“또 구슬의 진위여부를 알 수 있는 거고요.”
“바로 그거죠.”
“그리고 만약 구슬이 진짜라고 판명되면, 나머지 반쪽자리 권능을 얻을 수 있는 것. 맞나요?”
끄덕.
시현의 고개가 내려갔다 올라오자 류건이 곧장 말을 이었다.
“그럼 바로 착수하죠. 다만 열쇠에 기력발전기의 기를 사용하려면 거기로 가야하는데··· 가능합니까?”
“그거야 문제없죠. 그걸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는지가 문제지.”
“원래라면 안 되죠.”
“그럼······?”
그의 입에서 어울리지 않는 악동 같은 미소가 피어나왔다.
그러고는 별 거 아니라는 듯 입가를 비틀면서 대답했다.
“저번에 물어보셨죠? 의장단에 대해서.”
“그랬었죠.”
“그럼 지금 뭐 하나 보여드리죠. 의장단의 권한에 대해서.”
자신만만한 목소리. 믿음직스러웠다.
“그럼 준비는 다 끝난 거죠?”
“예. 그런데··· 안산으로 다시 어떻게 돌아갑니까?”
되물어오는 류건의 질문에 시현은 스킬로 대답했다.
“여행을 한다면, 어디로 가고 싶나?”
.
.
.
안산의 특수던전.
시현의 신고식이 치러졌던 그곳 주변으로 두 남자가 텔레포트 했다.
시현과 류건.
쏴아아아-
추적추적 내리는 장대비가 둘을 반겼다.
마치 시현의 귀환을 거부하기라도 하는 듯, 거침없이 쏟아져 내렸다.
한겨울에 비까지 내리니 을씨년스러웠다.
‘어째선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데.’
이럴 때 보면 항상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다가오곤 했다.
그렇다보니 단순한 기우로 받아들이기엔 심히 꺼림칙했다.
‘가보면 알겠지.’
지금 이 시각, 하와이로 향하던 레비아탄도 다시 경로를 바꿔 한반도로 돌아오고 있을 터.
어서 서둘러야 했다.
“어서 가시죠.”
시현은 류건을 따라 던전의 입구로 접근했다.
벌써부터 음침한 기운이 도처에 감돌았다.
감청색 우비를 입은 채 경비를 서고 있는 헌터중앙기구의 직원들을 보자니 더더욱 그러했다.
“어디서 온 누구십니까?”
“이런 사람입니다.”
류건이 안주머니에서 라이센스를 꺼내 보여주었다.
그러자 직원들은 두말 할 것 없이 안전펜스를 치워 던전으로 내려가는 길을 터주었다.
“저··· 그런데 무슨 용무로 오신 겁니까? 본부에서 받은 연락이 없어서요.”
“그건 보안상의 이유로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한국지사가 아니라 세계본부차원에서 나온 거라.”
“그럼 이분은···”
그대로 지나가려는데 경비 한 명이 시현을 가리켰다.
류건이 의장단인 걸 확인시켜줬음에도 그는 꼼꼼하게 시현의 라이센스까지 확인했다.
“얼마 전에 뉴스 보셨죠? 나이지리아의 영웅. 이분입니다.”
“아아······!”
“이제 됐죠? 그럼 들어갑니다?”
류건의 물음에 그는 대답하는 것 대신 연예인이라도 본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저, 팬입니다! 악수라도 한 번······!”
덥석.
시현은 난데없이 악수를 해주고 나서야 통과할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죠.”
“예, 수고하세요.”
던전 안쪽으로 쭉 들어가자 류건이 슬그머니 툭 던지듯 말했다.
“이제 스타 다 되셨네요.”
“혹시 부러우세요?”
“하하. 아뇨. 전 주목받는 건 별로라서···. 전 제 일에 희열을 느낍니다.”
“그래서 의장단으로 계시나보죠?”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의장단에게 주어지는 특급권한들도 한몫 하지만요.”
류건이 누누이 말해왔던 권한.
그것을 마침내 시현에게 보여줄 순간이 다가왔다.
어느덧 기력발전기 앞에 다다른 것이다.
스윽.
사위를 살핀 시현은 근처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했다.
“여긴 경비병이 없나보죠?”
기력발전기라는 명칭이 무색할 정도로 보안수준이 낮았다.
던전 입구에 달랑 경비직원 몇 명 있는 게 전부였으니까.
“뭐 그렇긴 한데, 도둑이 들더라도 어차피 작동시킬 수 없거든요.”
류건이 그 말뜻을 행동으로 직접 보여주었다.
설치된 펜스 안으로 들어가 유리벽 앞에 선 류건은 의장단배지를 보안장치에 들이밀었다.
그리고 손바닥을 뻗은 순간이었다.
띠링, 알림 음과 함께 보안이 해제되었다는 경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두터운 유리벽이 홍해 갈라지듯 길을 터주었고 기력발전기를 제어할 수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서둘러야합니다.”
“갑자기요?”
“보안이 해제되면 별 수 없이 세계본부 의장단과 총장님에게 신호가 가거든요.”
“거기서 문제될게 또 있습니까? 이건 의장단의 권한이라면서요.”
“아, 시현 씨. 제가 말을 안 했는데, 이건 비상시에만 쓸 수 있는 특수권한입니다.”
“비상시라면?”
“전쟁, 재난 뭐 그런 거요.”
즉, 회사 내 규율을 어겼다는 말.
사내에서 그 누구보다도 규율에 엄격한 류건이 이런 짓을 했다는 건 매우 특별한 의미였다.
“저, 여기 목숨 걸었거든요.”
.
.
.
작업은 수월하게 진행됐다.
수년 간 모여 고농축으로 압축된 기 덩어리가 기력발전기에서 권능의 열쇠로 빨려 들어갔다.
시현의 전이스킬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흠. 여기서 기력을 너무 많이 쓰는데.’
만일 완전한 권능을 얻고 나서 레비아탄과 맞붙는다고 해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다.
완전한 언령이라고 해도 기력이 필요한 건 매한가지니까.
그런데 그런 와중에 기력까지 모자라면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조금이라도 여유로울 때 미리 준비해야 할 것이다.
“이거, 저도 좀 사용해도 됩니까?”
기력발전기는 엄연히 헌터중앙기구의 사유재산이었다.
지금 열쇠에 주입하는 것도 횡령이나 마찬가지.
피가 돈이 되듯, 기력도 돈이 되는 세상이었으니까.
물론 가격은 그것의 농도나 질에 따라 천차만별이지만.
즉, 시현의 발상은 가히 미친 것이었다.
하지만 류건의 대답은 시현의 질문보다 더 했다.
“양껏 쓰십쇼.”
“정말 괜찮겠어요?”
“말했잖아요, 저 여기 목숨 걸었다고.”
“하하. 후폭풍은 어떻게 감당하시려고요?”
“저기, 시현 씨? 같이 감당해야죠?”
백번 맞는 말이었다.
둘은 한 배에 올라탄 공범사이니까.
“그렇다고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뭐, 몬스터 사체 몇 마리 던져주면 되겠죠. 아까 잡은 해일군주라든지···. 아마 그거 한 마리 던져주면 합의해줄 겁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확신한 건 하나도 없었다.
그건 그저 류건의 생각이었을 뿐.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다보니 어느새 5분이 더 지났다.
“이제 곧 도착할 때가 됐는데.”
“누가요?”
“S팀이요. 현재 동탄에서 특수임무 중이라 아마 최소 인원만 올 겁니다.”
초읽기에 들어갔다.
과연 열쇠의 기력이 먼저 채워지느냐.
아니면 한국지사 S팀이 먼저 들이닥치느냐.
“전화는 안 왔습니까?”
“이미 다 꺼놔서요.”
전원을 켜놨더라면 아마 회사에서 빗발치게 전화가 왔을 터.
“시간 좀 걸릴 것 같은데, 중간에 들이닥치면 어쩝니까?”
“그건 제가 알아서 할 테니, 시현 씨는 거기에 집중하시면 됩니··· 음?”
그때였다.
투다닥, 하는 다급한 소리가 던전 안에 울려 퍼졌다.
“저 소리는···”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사람의 발소리가 분명했다.
최소 다섯 명.
발소리는 점점 더 증폭되어 긴장감을 고조시켰다.
“신경 쓰지 말고 계속 하세요. 제가 알아서 할 테니.”
류건은 연신 같은 말만 내뱉으며 바깥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던전 안쪽으로 사람들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딱 다섯 명.
백민식 관리관과 팀장 임장호를 필두로, 그 뒤에는 김지원과 사수영 그리고 강보검이 있었다.
“류건, 자네!”
류건을 발견한 백민식이 언성을 높이며 한걸음에 달려왔다.
시현이 기력발전기에서 기를 방출시키는 광경에 다른 사람들은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지금 뭔 짓을 하고 있는 겐가!”
“아, 관리관님, 팀장님 오셨습니까? 동탄 작업은 아직 다 안 끝났을 텐데요.”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팀원들을 이렇게나 많이 데리고 오시면 어떡합니까.”
류건은 미간을 좁히는 둥 걱정스런 표정을 지으며 미안하다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 모습에 관리관은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자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던 임장호가 대신 입을 열었다.
“거긴 누커랑 탱커만 있으면 되니까 걱정 말고. 우린 지금 총장님의 지시를 받고 온 거야. 자네가 기력발전기가 작동시켰다고 해서.”
분명 규율에 위배되는 단독행동이었지만 임장호는 류건에게 막 대할 수 없었다.
직급 상 의장단인 류건이 더 높으니까.
다만 한국에서는 직책 상, 임장호가 상관이니 편하게 대하기로 사전에 약속했던 것이다.
“자네, 지금 대체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거야? 왜 보고는 안 한거고?”
“세계본부의 일입니다. 그러니 한국지사에 보고할 이유가 없죠.”
“무슨 소리야? 총장님이 방금 세계본부에 그런 사실 없다고 확인 받으셨다는데.”
“그건 다 제가 설명해드릴 테니 일단 진정하시죠.”
하지만 관리관은 더 이상 들어볼 가치도 없다고 판단했다.
“이건 총장님 그리고 세계본부 지시라서 나도 이건 어쩔 수 없어.”
단호하게 말한 관리관은 사수영에게 고갯짓을 했다.
“어서 박시현 저 친구 철수시켜.”
그 말에 곧장 S팀이 움직였다. 한 명만 빼고.
“넌 안 가고 뭐해, 김지원?”
“네? 아···.”
김지원이 머뭇거리던 그때.
류건이 의미심장한 말 한 마디를 던졌다.
“인류의 미래가 달린 일입니다.”
“뭐야? 허허.”
백민식은 다시금 실소를 흘렸다.
난데없이 영화에서나 나올법한 말을 하고 있으니 어이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임장호는 웃음기를 쫙 빼고 얼굴을 진지하게 고쳐먹었다.
“사수영, 강보검. 멈춰.”
“너 왜 그래, 임마?”
“형님. 일단 좀 기다려보쇼. 우리 류건 선생이 아무 이유 없이 그럴 사람이 아니잖소?”
“그래도 임마! 너 옷 벗고 싶어?”
사람은 역시 평소 행실을 잘하고 다녀야하는 것이다.
덕분에 조금이나마 시간을 더 벌었으니까.
그리고 때마침.
사아아-
죽은 듯 탁했던 권능의 열쇠에 윤기가 돌았다.
지금이 바로 운명의 순간이라는 걸 암시하듯 진기한 광경이 시현의 두 눈에 가득 찼다.
불이 켜지듯 열쇠에 황금빛이 은은하게 고루 퍼지더니 이내 실내를 가득 채울 정도로 환해졌다.
천장에 달린 조명을 잡아먹을 정도의 광채였다.
‘드디어.’
권능의 열쇠가 힘을 되찾았다.
마침내 구슬의 진위여부를 판단할 순간이 온 것이다.
시현은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황금빛의 열쇠를 손에 쥐었다.
아무리 강심장인 시현일지라도 지금만큼은 긴장되었다.
그동안 반쪽짜리의 권능으로도 인류최고의 수준으로 강했는데, 여기서 나머지 반쪽짜리의 힘을 더 얻는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다.
아무튼 확실한 건 최소한 곱절 이상은 강해진다는 것.
시현은 열쇠를 구슬의 구멍에 집어넣고 우측방향으로 돌렸다.
그러자,
철컥-
열쇠가 화사한 빛을 발산함과 동시에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