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시현이 손바닥만 한 구슬을 만지작거리자 류건이 토끼눈을 뜨며 물었다.
“그거··· 진짜입니까?”
언제나 늘 차가운 모습만 보였던 류건은 마치 새 장난감 앞에 선 아이 같았다.
흥분에 가득 찬 눈빛에 목소리의 높낮이는 변동이 컸다.
“아, 아니···. 일단 놈들에게서 좀 피하죠. 너무 노출된 것 같으니···.”
그러고 보니 레비아탄을 비롯한 수많은 몬스터들이 시현의 손에 들린 구슬을 응시하고 있었다.
-기요오오오오오오!
당장 가져오라는 레비아탄의 명령.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몬스터들이 시현을 향해 짓쳐들었다.
그 찰나의 순간, 시현은 재빨리 류건의 팔목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여행을 한다면, 어디로 가고 싶나?”
“뭐, 뭐요···?”
난데없는 질문이었지만······.
류건은 시현의 능력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이어 대답했다.
“하, 하와이?”
그 순간, 기골이 장대한 몬스터들이 두 남자를 덮쳤지만 둘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둘은 에메랄드빛의 해변으로 순간이동 한 뒤였다.
“여, 여긴······.”
“알로하~”
두 남자를 반겨주는 비키니의 여성.
그리고 끝없이 펼쳐진 해변과 야자나무.
이 엄청난 광경을 보자면 여긴 확실히 ‘그곳’이었다.
“하, 하와이입니까?”
“네. 여기로 여행오고 싶다면서요.”
태평양 하와이 제도에 위치한 섬 하와이!
시현의 스킬에 의해서 이곳으로 이동한 것이다.
다름 아닌, 혼자서는 발동할 수 없는 문답형식의 협동스킬.
텔레포트였다.
“무슨 스킬이 이렇습니까······? 아, 아니. 그보다 그 구슬은 어디서 얻으신 겁니까?”
“이거요?”
시현은 언뜻 보면 단순한 돌멩이 같기도 한 구슬을 꽉 쥐었다.
그리고 말했다.
“오다가 주웠어요.”
류건으로선 어처구니없는 말이었지만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쩌다보니 제 손에 들어오게 되더군요.”
시현은 잠시 회상에 빠졌다.
다시 생각해봐도 구슬을 얻게 된 과정은 우연을 뛰어넘는 운명이었다.
.
.
.
김은혜의 아파트.
시현이 최 회장의 별장으로 오기 전 김은혜를 만났을 때였다.
시현은 최 회장을 찾아가기 전에 김은혜에게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그럼 지금도 컨트롤러를 가지고 있겠군?”
“으응? 아, 아니. 컨트롤러는 없는데···.”
“없는데?”
“그 대신 다른 게 있어···.”
김은혜가 머뭇거리며 자신의 아공간에서 꺼내 내민 것은 손톱만한 크기의 물건이었다.
“뭐지?”
“아까 말한 프로텍터···.”
“아, 던전에 갇히지 않도록하게 해준다는?”
끄덕.
김은혜가 겁에 질린 채 고개를 숙였다.
시현은 그녀에게서 프로텍터를 받은 뒤 코트 안주머니에 잘 챙겨두었다.
그런 뒤 다시 물었다.
“또 다른 건 없고?”
그 간단한 말에도 김은혜는 좀처럼 시현의 눈을 마주보지 못했다.
두 다리를 덜덜 떨면서 안절부절 못할 뿐 연신 시현의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흐음. 수상한데.’
아직도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듯한 몸짓.
수상함을 눈치 챈 시현은 말에 힘을 실어 언제나처럼 우직하게 말했다.
“지금부터 시키는 대로 한다.”
“어, 어···?”
스르르르······
A급 헌터 김은혜도 거부할 수 없는 언령 진이 살포되었다.
마인드컨트롤.
그러자 김은혜는 정신이 반쯤 돌아간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응···.”
“먼저 말해. 뭘 숨기고 있는 건지.”
그 순간부터 김은혜는 술술 불기 시작했다.
“오늘오전까지만 해도 전국방방곡곡을 돌다왔어.”
“무엇을 위해?”
“열쇠와 구슬을 찾기 위해. 급한 일이 없을 때는 항상 돌아다니거든.”
그 말에 시현은 대충 직감했다.
김은혜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열쇠를 찾았나?’
시현이 다시 물었다.
“그래서, 찾았구나.”
“응.”
역시!
시현의 예감이 적중한 순간이었다.
“꺼내봐.”
“응.”
하지만 김은혜가 꺼낸 건 열쇠가 아니었다.
손바닥만 한 크기의 구슬이었다.
가운데에 작은 홈이 나있는, 구슬치고는 매우 신기한 구조였다.
‘열쇠가 아니었잖아. ···그럼 이게 구슬이라는 건가?’
김은혜는 시현의 생각에 답하기라도 하는 듯, 서슴없이 털어놓았다.
“구슬. 동중국해로 통하는 남해 해저던전에서 발견했어.”
“남해 해저던전?”
“응. 오래전에 발생했던 던전인데. 오늘 그 주변을 탐사하던 중 두터운 해저터널 벽에서 신호를 찾았거든.”
“호오라. 아진은 대단한 기술력을 지녔나보군.”
“오랜 세월 열쇠와 구슬만 보고 탐사에 전력했으니까.”
그쪽 방면에서는 세계에서 으뜸가는 아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고맙게도 영혼 없는 목소리로 계속해서 설명을 이어갔다.
앵앵거리지 않으니 듣기에도 훨씬 좋았다.
“하지만 그 구슬이 진짜인지는 아무도 몰라.”
“그럼 가짜도 있다는 뜻?”
“응. 실제로 똑같이 생긴 것들이 세계에서 발견된 사례가 있어. 하지만 모두 아무 쓸모도 없는 돌덩이로 판명 났지.”
“모조품이라······.”
마치 다른 세계 이야기를 듣는 것 마냥 신기했다.
“그리고 오빠한테 말하지 않은 게 있는데, 구슬은 단지 권능의 열쇠만을 위한 게 아냐. 그리고 또···”
“또?”
“열쇠의 종류에는 권능의 열쇠만이 있는 게 아니고.”
의미심장한 말 한 마디.
권능의 열쇠뿐만 아니라 다른 열쇠도 존재한다는 그 말!
충격적이었다.
권능을 얻는 것 외에도 다른 힘을 가진 열쇠가 존재한다니.
달리 말해, 구슬은 열쇠가 갖지 못하는 반쪽짜리의 힘을 채워주는 천고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즉, 그 정도로 중요한 물건이기에 구슬의 주인이 모조품을 만들어 여기저기에 숨겨놓은 것일 터.
거기까지 추론이 미치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런 거였나···. 그럼 몬스터 놈들이 지구를 침략하는 것도 보물 때문인가? 지들끼리 편을 가르고 싸우는 그런 거? 도대체가 이해가 안 되는군.’
머릿속이 난해했다.
여전히 의문스럽고 이해가 안 되는 것 투성이였다.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이 구슬이 ‘진짜’인가 ‘모조품’인가.
그뿐이다.
이 구슬이 만약 진짜라면 나머지 반쪽짜리 힘도 얻을 수 있을 테니까.
즉, 완벽한 언령의 권능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럼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어. 나랑 팀으로 움직였던 탐사전문가들도 구슬이 정확히 뭔지 몰라.”
“그럼 아진 수뇌부 중엔? 이미 상부에 보고했을 텐데?”
“아니. 보고하기도 전에 뺨 맞았어.”
“뺨?”
“최민호한테. 뺨맞고 별장에서 쫓겨났어.”
구슬이 시현에게로 오게 된 과정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마치 구슬이 시현의 품에 안기길 기다린 것처럼 모든 것이 톱니바퀴 맞춰지듯 이뤄졌다.
나이지리아로 떠난 순간부터, 최민호가 김은혜를 내쫓고 죽이라고 지시했던 그 순간까지.
“어, 어어···.”
스르르륵.
때마침 마인드컨트롤이 풀렸고, 통제에서 풀려난 김은혜는 휘청,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최민호.
자신의 말도 들어보지 않은 채 자신을 내쫓았던 그 남자!
전 남자친구!
냉혈한!
‘후회할 거라고 했던 말... 그냥 한 게 아니었다고.’
김은혜는 최민호에게 복수를 한 것 같아 내심 쌤통이었다.
정작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도 모른 채.
“이제 들어가.”
“으, 응? 어딜···”
시현이 손을 뻗어 시커먼 구멍을 허공에 생성했다.
“내 아공간이야. 네가 앞으로 지내게 될.”
아공간을 열어준 것으로도 모자라 시현은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주었다.
그녀에게 매우 중요한 것을 얻었으니 큰마음 먹고 약간의 배려를 베풀어준 것이다.
하지만 김은혜는 이러한 처사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내비쳤다.
“그게 무슨···. 내가 방금 구슬 줬잖아, 오빠. 그럼 이제 내 죗값은 치른 거 아니야···?”
“그래. 구슬은 합의금으로 쳐줄게.”
“······그럼 나 안 들어가도 되는 거지?”
“안 돼. 들어가.”
시현은 단호했다.
절대 선처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빠... 내가 계속 사과했잖아... 그리고 저건 그 무엇으로도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이라고!”
“부모님도 마찬가지야.”
“응······?
“너 뭔가 착각하나본데, 합의했다고 해서 살인죄가 없어지는 건 아니야. 형량이 조금 줄어들 뿐이지.”
“뭐······?”
“물론 줄여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시현은 김은혜의 목덜미를 덥석 잡았다.
“네가 들어갈래, 아니면 내가 집어넣어줄까.”
“자, 잠깐만! 오빠, 제, 제정신이야?! 꺄아아아악!”
“닥치고 들어가. 여기가 네 감방이니까.”
아공간 안에 뭐가 있는지는 그것의 주인인 시현밖에 알지 못한다.
아니, 먼저 들어가 있던 천우현도 알고 있었다.
그곳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공간인지.
콩밥 따위는 나오지 않는 지옥이란 것을······!
.
.
.
맡고만 있어도 편안해지는 바다 내음이 풍기는 이곳 하와이.
잠시 회상을 마친 시현은 구슬을 꽉 움켜쥐었다.
그 모습에 류건이 애써 진정하며 입을 열었다.
“···모조품인지 아닌지는 모르시고요?”
“아직은요. 검증이 필요하겠죠. 그래서 말인데, 검증은 어떻게 합니까?”
“방법이야 쉽습니다. 기력감지기만 있다면···.”
“기력감지? 그냥 손으로 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류건은 눈을 부릅뜨며 고개를 휘저었다.
“아뇨! 구슬은 특수 재질로 이뤄져있어 내부의 기력을 감지하려면 몇 가지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합니다. 기력감지기로요!”
“그래서 그게 어디 있는데요?”
“헌터중앙기구 세계본부에······.”
“아···. 흠. 암만 봐도 진짜인 것 같은데.”
시현은 직감했다.
지금 이 해프닝.
단순한 우연이 아닌 운명이라는 것을!
“검증할 필요 없이 써보면 알겠죠, 뭐.”
“하지만··· 구슬을 사용하려면 열쇠가 있어야합니다.”
류건 역시 열쇠와 구슬에 관한 정보를 빼곡히 알고 있는 모양.
하지만 시현에게 열쇠가 있는 것은 알지 못하는 듯했다.
“열쇠도 있는데요?”
“······?!”
시현이 주머니 속에서 빛 바란 열쇠를 꺼내자 류건의 눈알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믿을 수 없었다.
갑자기 하루 만에 열쇠와 구슬을 얻었다니!
아니면 원래 가지고 있던 것인가?!
그런 복잡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옆에서 비키니를 입은 구릿빛 피부의 서양인 둘이 걸어왔다.
“알로하~ 코트입고 있기엔 너무 덥지 않아요?”
“오호호. 재밌는 남자들이네요~ 우리랑 모히또 한 잔~?”
“꺼져!”
“어머······.”
“꺼지라고!”
극도로 흥분한 류건이 타인을 배려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상황이 이러한데 느긋하게 칵테일이나 마시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류건은 주인을 지키는 개처럼 근처에 누구도 다가오지 못하게 연신 윽박질렀다.
“이럴 때일수록 주위를 경계해야 합니다. 그거, 잘 숨기세요. 다른 누구한테도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게 설령 친절한 하와이안 일지언정···.”
“매니저님은요?”
“저는 믿으셔야지요!!”
“······.”
류건은 극도로 흥분하여 속사포로 말을 이었다.
“아무튼, 지금쯤 놈들이 이쪽으로 직행하고 있을 겁니다. 열쇠가 기력을 되찾을 때까지는 놈들을 피해 다니세요.”
“음. 매니저님이라면 방법을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뭘 말이죠?”
“열쇠에 기력을 채워 넣는 방법이요.”
류건에게 굳이 구슬을 보여줬던 것도 바로 그 이유에서였다.
어차피 류건의 도움이 필요하니까.
아닌 게 아니라, 시현은 이미 방법을 알고 있었다.
빛 바란 열쇠에 빛을 불어넣을 수 있는 방법을!
“하지만 기력주유소 같은 게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방대한 양을 어디서 채웁······ 엇?”
류건은 말을 하다 말고 흠칫 놀라 미간을 찌푸렸다.
무언가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돌려 시현을 바라보았다.
둘의 시선이 허공에서 맞닿았다.
“···그거로군요!”
“네. 바로 그겁니다.”
둘의 생각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