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시현은 차디찬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열쇠를 주웠다.
빛이 바래서는 거미줄 친 고대의 궤짝에나 맞을 것 같은 열쇠였다.
‘기력이 모여들고 있어.’
자연적으로 기력이 열쇠로 흡수되며,
흡수된 기력은 열쇠의 작용으로 인하여 특수에너지로 변환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자, 잠깐만······.”
사지가 잘려나갔음에도 불구, 최민호는 온몸으로 시현의 행동을 적극 만류했다.
허나 이미 마음을 굳힌 시현은 거침이 없었다.
앞으로 나아가길 몇 걸음.
최민호의 생사를 심판하기로 마음먹었다.
“생각만 해도 뭐든 이뤄지는 권능이라니. 꿈도 야무지군.”
권능의 대기열이 끝나면 최민호도 언젠가는 그가 희망한 권능을 얻게 될 것이리라.
시현이 언령의 권능을 얻었던 것처럼.
“눈 뜨고 볼 순 없잖아.”
굳이 비교하자면 언령술의 상위호환.
아무리 반쪽이라도 위험한 건 위험한 것이다.
“그러니 죽일 수밖에.”
시현이 모든 것을 무력으로 해결하는 무뢰한은 아니지만.
아무튼, 지금은 무력으로 해결하는 것이 마땅하다.
어두운 현재를 위해서도, 더 밝은 미래를 위해서도.
최민호는 죽여야 한다. 더 이상 지체하지 않고서.
댕강!
달아나버린 최민호의 목.
콘크리트에 처박힌 시체가 싸늘하게 식어갔다.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게,
아무리 뛰어난 치료스킬을 가하여도 기적이 일어날 수 없도록.
황량한 콘크리트 바닥에 진홍의 불길을 일으켜 뼛가루도 채 남기지 않은 채 시체를 완전히 소멸시켰다.
반대편은 몬스터들인지 흉물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것들의 사체로 난장판이 돼있었다.
지근거리에는 최 회장이 기절해있었다.
멀쩡히 숨을 쉬고 있는 것은 함경만 뿐이었다.
그 마저도 양팔이 잘려나간 상태지만···.
그는 생존을 갈구하는 몸짓을 부릴 만도 한데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되레 시현을 보며 입 꼬리를 근소하게 올렸다.
죽음을 달관하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저 ‘죽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비릿한 웃음에 매달려있었다.
시현은 그에게 물었다.
죽일 때 죽이더라도, 그 전에 알아야할 게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꺼림칙했던 무언가를.
“몬스터들이 당신만 공격하지 않던데.”
“이유가 궁금하나? 크크.”
나이에 맞지 않는 광소를 흘리는 함경만.
실성한 듯한 웃음이었지만 그의 얼굴은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을 내비추고 있었다.
그 이유를 곧 알 수 있었다.
지응-
순간 햇살을 거두고 그늘이 지더니 느닷없이 파동이 한차례 울려 퍼졌따.
발원지가 어디인지는 알 수 없다.
그저, 시현의 몸을 과격히 짓누를 뿐이었다.
과응!
몸을 제어할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압력.
생전 처음 겪어보는 위압감이었다.
군주 급 몬스터의 위엄도 이 정도는 아니거늘.
이 정도로 압도당한 적은 단 한 번 밖에 없었다.
‘그때 그 괴물.’
M던전을 탈출했던 그날, 바다 속에서 튀어나왔던.
흡사 용(龍)의 외양과 비슷했던 그 괴물이,
하늘에 둥둥 뜬 채 햇빛을 가리고 있었다.
-크오오오오오오오오!
당시의 괴성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끔찍한 목소리가 지천에 울려 퍼졌다.
대지가 들썩이고 나무가 뽑혀나갔다.
건물이며 자동차며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공중에 부유했다.
시현으로서도 지금껏 조우했던 몬스터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그쪽으로, 함경만이 도망치고 있었다.
‘뭐야 저 놈. 몬스터랑 한 패였나?’
최 회장도, 최민호도 아닌 함경만이?
하지만 인간이 고작 무슨 수로, 저런 괴물과 손을 잡았단 말인가?
마치 함경만이 그 존재를 소환한 듯 보였다.
‘일단 이 상황부터 어서.’
잠시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다.
팟-
시현이 공중 위로 뛰어올랐다.
드높은 위압감을 뚫어버린 뒤 괴물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했다.
-크오오오오오오오!
구렁이가 똬리를 트는 것처럼 녀석이 몸을 움츠린다.
거뭇한 비늘이 좌르륵, 허물이 벗겨지듯 흘러내리더니 본 모습이 드러났다.
수룡을 방불케 하는 외양.
푸른 비늘에 가고일의 그것과도 같은 거대한 날개를 지니고 있었다.
몸뚱이는 크고 꼬리는 가늘었다.
머리에는 날카로운 두 개의 뿔이, 그 밑에는 악마의 눈을 달고 있었다.
그리고 전신에 굵직한 사슬이 둘려있었다.
‘악마가 따로 없군.’
이 순간만큼은 한 톨의 기력조차 낭비할 수 없다.
더욱이 언령 진이 먹혀들 만한 상대도 아닌 듯하다.
파하아아아-
일차적으로 육체강화3단계는 물론, 그 외에도 필요한 버프를 몸에 둘렀다.
혼자였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정부 측이든 민간 헌터들이든 상황을 파악하러 이곳에 오겠으나, 그들이 와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
시현은 확신했다.
놈과 대적할 수 있는 건 자신뿐이라는 것을.
적어도 지구에서는.
-카아아아아아아!
괴물이 흉포하기 짝이 없는 입을 벌린다.
상하의 날카로운 어금니 사이로 구체가 형성된다.
주와아아아-
푸른빛의 구체가 시현에게로 날아간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똑같은 상태의 구체가 괴물에게 날아간다.
동시에 시현의 일격이 그것에 합세해 쇄도한다.
파아아아앙!
허공에서 맞부딪히는 두 개의 기 덩어리.
힘겨루기인가 싶었으나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좌즈즈즈즈-!
솨아아악!
어떻게 된 일인지 시현의 상체가 갈기갈기 찢어진 것이다.
의식을 잃고선 바닥으로 추락했다.
그로서도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존재인 걸까?
분명 녀석의 공격을 그대로 카피한데다가 SSS급의 스킬까지 끼얹었다.
그런데도 역부족이라?
아니, 어째선지 공격이 아예 먹혀들지를 않는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시현의 공격을 모조리 흡수했다고나 할까.
넝마가 된 시현은 무릎을 탈탈 털고 일어섰다.
처절할 만도 한데 아직까지는 여유가 있었다.
‘흠···. 이대로는 가망이 없겠는데.’
거의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헌데 그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게임은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
불 보듯 뻔했다.
시현의 패배! 인류의 패배였다!
‘어째서 이제야 나타난 거지?’
그것도 그것대로 의문이었다.
인간을 이렇게 제압할 정도면 왜 이제 와서 나타난 것인지.
마치 인류를 가지고 노는 것처럼 말이다.
-크오오오오!
그 괴물이 몬스터의 언어로 낮게 깔리는 음성을 냈다.
-열쇠를 내놓거라.....
아까 몬스터들이 10성 던전을 뚫고 최 회장을 덮친 것도 그 이유일 터.
짐작컨대, 최민호가 열쇠를 사용해서 놈들이 그 힘에 이끌려온 것이리라.
“역시 그것 때문에 나타난 거였나?”
-그렇다. 열쇠만 내놓는다면 살생 없이 돌아가 주겠다.
“후우···. 지금 그 말을 믿으라는 건가?”
결코 주눅 들지 않은 시현이었다.
그 모습에 괴물의 콧구멍에서 폭염의 순풍이 휘몰아쳐 나온다.
화아아아아아!
-나를 본 이들은 본인을 이렇게 부르더군. 질투의 화신. 지옥의 뱀. 굽이치는 신화. 레비아탄!
“썩 괜찮은 이름이네.”
-배짱한 번 좋구나. 그래, 그건 칭찬해주겠다. 하지만 이것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할 것이다. 열쇠를 내놓지 않는다면 네놈은 지옥의 나락 끝으로 떨어지리란 것을!
열쇠를 넘겨준다면 향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뭔지는 몰라도, 위험한 건 확실하다.
지구의 운명이 달린 일일지도 모른다.
아무도 알지 못한다.
저것을 막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한반도가 소멸될 수도, 최악의 경우엔 지구가 멸망할 수도 있다.
인간이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무너질 종족은 아니지만 지금은 혼란의 시대!
저 정도의 규모라면 인류는 패할 것이리라.
바득, 시현은 이를 꽉 아물며 주먹을 쥐었다.
‘슬슬 힘에 부치는데.’
저 괴물 앞에 있으니 자신이 하찮은 존재라고 느껴졌다.
만약 반쪽짜리의 권능이 아닌, 완전한 권능이었다면 이길 수 있었을까?
시현은 피식 웃었다.
아직은 포기할 때가 아니었으니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숨겨둔 비장의 조커카드가 남아있으니까.
바로 그때였다.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역시나 뭔가 터졌군요.”
어느새 도착한 류건이 앞에 서있었다.
시현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미행하셨나요?”
“뒤를 봐드리고 있었습니다.”
“같은 말이군요.”
“······크흠. 아무튼 저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시현 씨의 길잡이가 되어드리겠습니다. 이거 받으시죠.”
류건이 시현에게 초소형 인이어 무전기를 건넸다.
“든든한 지원군이 무전을 해줄 겁니다.”
“지원군요?”
“말콤이요. 죽을 판이니 말씀드리는 건데, 그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습니다.”
“옵저버.”
“······알고 계셨군요.”
듀오를 결성한 두 남자.
아니 세 남자!
셋은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의 처세술을 펼쳤다.
시현이 측면으로 돌파하여 괴물에게 스킬을 퍼부었다.
정면승부는 무리였으니까.
측면만을 노렸다.
하지만 공격은 전혀 유효하지 않았다.
-말콤입니다. 좀 더 있어봐야 알겠지만 놈에게는 일반적인 공격이 먹혀들질 않는 것 같아요.
“무슨 말이죠?”
-음···. 놈의 피부가 너무나도 단단하다는 거죠. 급이 낮은 스킬에 면역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공격으론 어림도 없을 거예요.
S-SSS급 스킬이 일반적인 공격이라니!
그럼 어떤 수준의 공격을 해야 한단 말인가?
참으로 말도 안 되는 능력을 지닌 놈이다.
이길 가능성은 점점 줄어들어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놈의 주위에 시커먼 구멍이 생성됐다.
“게이트입니다!”
그 속에서 튀어나오는 몬스터 떼.
소환된 몬스터들의 질 자체가 달랐다.
엘리트는 기본이고 에픽 몬스터들이 주를 이루는 부대였다.
거기에 ‘군주’라 불리는 유니크(Unique) 등급의 몬스터 해일군주까지.
-열쇠를 탈취하여 오거라.
-그아아아아아!
괴물의 명령에 해일군주가 에픽 몬스터들을 대동해 나섰다.
-시현 씨. 좌측의 샤미르루들이 고속창을 내지릅니다.
9성 에픽의 샤미르루.
그것의 기력을 감지한 류건이 시현에게 일렀다.
팟, 순간적으로 비상해 샤미르루의 넓적한 물갈퀴 위에 앉았다.
-놈의 약점은 풍지! 왼쪽 허벅지의 관절이 약합니다!
말콤의 스캐닝 정보까지.
시현의 두 주먹이 풍지(風地)의 속성으로 변환된다.
회전하는 돌주먹이 뻗어나간다.
촤르륵!
-키야아아악!
샤미르루의 매끄러운 허벅지가 터져나간다.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다.
그 뒤로 더욱 더 강력한 해일장군이 몰아친다.
한반도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해일이 숲속을 뒤덮는다.
솨아아아!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지.”
넘실거리던 물줄기가 시현의 앞에서 멈춰 선다.
진득한 기를 실어 힘껏 내지른다.
파앙-!
워터 배리어를 무마시키고 보이지 않는 칼날이 해일군주의 전신을 베어 양분했다.
“후···.”
군주 급의 유니크 몬스터는 언제 상대해도 스릴이 넘친다.
조무래기들과는 차원이 다른 맷집과 힘, 스킬까지 보유하고 있으니까.
힘을 정도껏 써야하긴 하나 못 잡을만한 수준은 아니다.
진짜 문제는 저 괴물 레비아탄일 뿐···.
어지간한 공격은 먹혀들지 않는다.
“후.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해.”
비포 앤 애프터(Before & After).
이 정도로 처절하게 싸웠으면 전과 후의 차이를 확실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조커카드의 효능을!
지금까지 꼭꼭 숨겨왔던 것을···.
시현은 아공간에서 꺼냈다.
“······!”
여태껏 류건이 저렇게 놀랐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봐선 안 될 거라도 봤는지 말까지 더듬거린다.
“시현 씨··· 그건!”
“이거요? 구슬이라던데요. 생긴 것도 구슬이고.”
구슬.
중앙에 열쇠구멍이 하나 나있는 구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