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뜨거운 밤이 지나고 다음날 오후.
경상도 구미시의 아진 몬스터연구개발단지.
인근 조용한 산속에 위치한 별장에서 성난 언성이 터져 나왔다.
비율 좋게 잘 빠진 남자, 최민호의 목소리였다.
“염병할!”
어젯밤 들은 소식에 의하면 박시현의 암살이 수포로 돌아갔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한성의 천우현은 행방불명된 상태.
‘확실히 준비해놓으라니까, 이 쓰레기 같은 놈이···.’
그때문의 아진그룹 역시 피해를 입고 있는 상황.
여태까지 그런 놈과 함께 일해 왔다니, 남자는 기가 찼다.
“미친놈.”
남자는 독하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이토록 화가 난 이유는 그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 옆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있는 여자.
애인 김은혜에게도 한껏 화가 나있었다.
“미쳤어? 너도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며?”
“오빠 난··· 걔가 돌아왔다고 해서 혼자 뭘 어쩌겠나 싶었지...”
“쯧쯧. 그걸 말이라고. 무뇌아 같은 년.”
“오빠! 암만 그래도 그게 나한테 할 소리야? 나 방금까지 일하다 온 사람이야.”
“일? 일 좋아하네. 전국방방곡곡을 싸돌아다니는 게 일이야?”
“열쇠랑 구슬 찾으려고 그런 거지. 내가 어디 놀러다녔어?”
“뭐? 이게 어디···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짝!
최민호가 김은혜의 뺨을 후려쳤다.
“하도 매달려서 좀 만나줬더니 누구 앞이라고 큰 소리야? 분수를 알아야지.”
“흐윽... 그래도 나도 내 나름대로 해결하려고 했단 말이야! 그러지 말고 일단 내 말 좀...”
“해결? 청담동 치과에서 던전을 발생시켰던 거? 네 눈에는 박시현이 그딴 메카오거한테 죽을 놈으로 보였나보지?”
“그때는 나도 박시현이 그렇게 강할 줄 몰랐단 말이야... 그럼 이왕 이렇게 된 거 오빠가 나서서 처리하면 되지 않을까?”
“처리? 지금 이 상황에?”
안 그래도 나이지리아의 영웅이다, 조국의 초신성이다, 라며 영웅취급을 시현이다.
그런데 그런 와중에 또 암살을 시도한다?
가당치도 않은 소리였다.
다시는 그런 기회를 얻기 힘들 것이다.
“그리고 너는 내가 그 괴물을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봐?”
“그건...”
김은혜가 말을 잇지 못한다.
최민호가 그녀를 무섭게 흘겨본다.
“쯧. 너 같이 멍청한 년에게 일을 맡겼던 게 잘못이지.”
“뭐······?”
“앞으로 너는 몬스터연구소 소속이 아니라 아진H&M의 일개 헌터가 될 거다.”
“갑자기 그게 무슨···!”
“쉿······ 기밀에 관해선 실수라도 누설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래도 정을 나눴던 여잔데, 내 손으로 죽이긴 싫으니까.”
“하.. 하지만 내가 없으면 연구소가 돌아가지 않을 텐데···?”
“네 대타, 이미 구했어. 그러니까 나가.”
“나가라고? 정말 이럴 거야? 후회할 텐데?”
“후회? 후-.”
최민호는 뼛속까지 매정했다.
“던전컨트롤러나 두고 나가.”
“쳇.”
툭.
김은혜가 코트 안감 주머니에서 새끼손가락만한 기계를 꺼냈다.
“그때 가서 후회하지 마.”
그런 뒤 얼굴을 붉히며 별장을 나갔다.
그 모습에 최민호는 전화기를 들며 중얼거렸다.
“끝까지 멍청하군. 해외에 가서 조용히 살겠다고 해도 모자를 판에.”
이어 그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예, 이사님.
“박시현이 분명 김은혜를 찾아갈 거다. 그러니까 오늘 밤에 강도로 위장해서 깔끔하게 죽여.”
-누구를··· 말입니까?
“누구긴 누구야. 김은혜지.
했던 말과는 다르게 김은혜를 죽이라는 명령.
구슬과 열쇠에 관한, 그리고 연구소에 관한 기밀을 알고 있는 김은혜를 살려둘 수 없는 것이다.
그녀는 이미 신뢰를 잃었으니까.
지이잉-
전화를 끊자 이번엔 비서한테서 전화가 왔다.
매우 다급한 목소리였다.
-이, 이사님!
“무슨 일이야?”
-열쇠를 찾았답니다!
오랜 염원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
.
.
삼성동 인근의 최고급 호텔사우나.
시현은 따스한 온천수에 몸을 담갔다.
서울 한복판에서 노천탕을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오랜만에 하니까 좋네.’
단순한 휴식이나 피로회복 스킬로는 풀리지 않는 피로가 해소되는 기분이었다.
가끔씩 이렇게 날 잡아서 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헌데 시현은 자꾸만 뒤통수가 따가운 느낌이 들었다.
“어? 나 저 아저씨 알아요! TV에서 봤어요!”
“스읍. 아빠가 손가락질 하면 안 된다고 했지?”
많은 사람들이 시현을 알아본 것이다.
하지만 장소가 장소다보니 누구도 선뜻 다가가진 못했다.
온천욕을 충분히 즐긴 시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와! 근데 저 아저씬 왜 저렇게 커요? 아빠”
“······.”
시현은 어째선지 더더욱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요 근래 들었던 칭찬 중 최고였으니까.
“주문하신 수정과 나왔습니다.”
“고마워요.”
이윽고 VIP전용 응접실에 들어가 수정과를 한 잔 즐길 때가 돼서야 사람들이 하나둘 씩 시현에게 찾아왔다.
대부분 중후한 멋을 풍기는 중년신사들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실례가 안 된다면 합석해도 되겠습니까?”
“누구신지.”
“아, 제 소개가 늦었군요.”
고개를 살짝 숙이며 명함을 내미는 남자.
명함에는 ST화학 대표이사 김명철이라고 적혀있었다.
화학회사에서 ‘헌터중앙기구 헌터’에게 무슨 볼일이 있겠냐마는 인맥이라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다.
어느 분야든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훨씬 나은 것!
너나 할 것 없이 시현에게 찾아와 인사를 건넸다.
대부분 미팅을 명분으로 점심시간에 사우나를 즐기러 오는 기업가들.
대부분이 한 자리씩 꿰차고 있는 사내들이었다.
“그러죠. 다음에 점심이나 드시는 걸로.”
“만나게 돼서 영광이었습니다. 그럼.”
어차피 시현은 자신만의 회사를 설립할 계획이 있었다.
그로서도 알아둬서 나쁠 것 하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한민국의 최상위층이니까.
이후에도 시현의 테이블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대부분 포털사이트에 검색하면 나올만한 사람들.
저자세로 인사를 나누는 이들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자신을 강하게 어필하는 이도 있었다.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이런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30대 중반 일찍이 자수성가한 IT계열중소기업의 대표였다.
“앞으로도 종종 뵈었으면 합니다. 저희 회사도 곧 헌터 매니지먼트사를 차릴 계획이거든요.”
“음. 이직제안이라면 됐습니다.”
“에이, 말씀도 다 안 드렸는데 무슨 말씀을 그리 섭섭하게 하십니까! 그저 편한 친구가 되자는 거지요. 서로 도움도 주면서 말이죠! 하하하!”
“친구는 한 명으로 족하죠.”
“···음?”
시현이 한 말이 아니었다.
지금 막 응접실에 들어와 시현의 테이블로 직행한 남자.
“······대, 대한그룹 이용수 부사장님 아니십니까? 아, 안녕하십니까.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오늘 시현과 만나기로 한 이용수였다.
이용수는 남자가 건네주는 명함을 받아줌으로써 그를 돌려보냈다.
“지각이다. 30분 전에 만나기로 해놓곤.”
“야···. 네가 준 생일선물··· 그거 때문에 회의 끝내고 오느라 늦었다. 그거 진짜 뭐냐?”
“신호탄.”
“신호탄 치고는 스케일이 너무 큰 거 아냐?”
“글쎄.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서 그렇게 됐네. 운이 좋았어. 주변에서 도움도 많이 받고.”
“허허···.”
이용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최근에 일어난 사건들.
가장 친한 친구 놈이 그랬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특히 나이지리아 건.
시현이 그렇게나 강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너 혹시, 9년 동안 폐관수련이라도 하고 온 거야?”
“폐관수련은 얼어 죽을. 그냥 네가 준 슈트 빨이지.”
“큭. 큭큭. 미친놈. 재미없어 이 새꺄.”
이용수가 킥킥대다가 짝! 박수를 쳤다.
“너 어제 부탁할 거 있다고 하지 않았어?”
“어. 김은혜 사는 곳 좀 알아내줄 수 있지?”
“김은혜? 설마··· 네 전 여친 김은혜? 너 설마 아직도···.”
“그런 거 아니니까 좀 닥치고... 집주소만 알아내줘.”
“후···. 정 여자가 급하면 내가 소개라도···.”
“소개팅은 너나 많이 하시고.”
“그럼 다행이네. 큭큭.”
이어 이용수는 웃음기를 쫙 빼며 말을 이었다.
“좀만 있어봐. 곧 알아내줄 테니까.”
“아니, 전화로 알려줘.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약속이라도 있는 거야?”
“응. 대통령이 보재.”
.
.
.
청와대 귀빈실.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대통령과 자리를 가진 시현.
그래도 대통령이 초청을 해준 만큼 받아주는 게 예의니까.
한 번쯤은 먼저 찾아가주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허허. 편하게 앉으시지요.”
“예.”
공식적인 자리는 아니었기에 기자는 없었다.
비서실장 단 한 명만이 근처에 서있을 뿐이다.
“국가의 위상을 이렇게나 높여주시고... 대통령으로서 자랑스럽고 또 감사할 따름입니다.”
시현의 활약상을 주제로 한 화기애애한 담소가 있은 뒤 대통령은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지금 던전 관리국 수색부에서 일하신다고 들었는데,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오호. 좋은 일을 하시는군요. 그래서 말인데···.”
중요한 말을 하려는 듯 한 번 뜸을 들이는 대통령.
이어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더 좋은 곳에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드리고 싶은데. 우리 박시현 씨 생각은 어떠십니까?”
뻔하고도 뻔뻔한 레퍼토리.
시현은 이미 대통령의 말뜻을 알아차렸다.
“혹시 국가를 위해 하는 일입니까?”
“눈치도 대단히 빠르시군요. 말이 나와서 드리는 말씀인데, 공무원을···”
“아뇨.”
대통령의 말을 냉큼 자르는 시현.
“죄송하지만, 사양하겠습니다. 지금 하는 일에 만족해서요.”
“허허. 어마어마한 보상과 조건이 있을 텐데요.”
시현이 완강히 거절했음에도 대통령은 포기하지 않았다.
거기에 비서실장이 슬쩍 오더니 봉투 하나를 내밀며 거들었다.
“고액연봉 보장, 군 면제, 헌터등급특진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혜택을 드리겠습니다.”
분명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선심 써준다는 듯한 꼬락서니는 역겨워 가만히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냥 해주시면 되는 거 아닙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인지요.”
“굳이 국가를 위해 일해야지만 그런 대우를 해주신다는 거 아닙니까? 하지만 제 생각엔, 제가 국민으로 있는 것만으로도 국가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은데요.”
“허허허···.”
대통령이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언제나 시현 씨의 자리를 비워놓고 있겠으니 마음 바뀌시면 언제든지 연락주시지요. 아, 그리고 다음번엔 공식적으로 초청해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위상을 높인 것에 대해 대통령상을 수여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시현은 무언가 내키지 않는 듯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게 끝인가요?”
“음···. 제게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군복무요.”
“예?”
“조만간 타국에서 귀화요청이 들어올 텐데. 저는 군대 가기 싫습니다.”
“면제를 해달라는 말씀이시군요.”
“예. 그럼 안 가도 되는 거죠?”
현행법 상 시현의 수준이라면 군대는 당연히 면제다.
하지만 시현의 목적은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군면제는 시작이었을 뿐.
협상테이블은 이제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 제가 귀화하지 않는 조건으로 뭘 해주실 겁니까?”
대통령은 탐스런 조건을 내걸어야 할 것이다.
시현이 타국에 빼앗기지 않으려면.
.
.
.
청와대에서 나오는 길.
시현이 차에 오르자 류건이 물었다.
“말씀 잘 나누셨습니까?”
“예. 그런데 좀 길어질 것 같아서 다음에 또 보기로 했네요. 다음엔 자기가 찾아오겠다하더군요.”
오늘 대통령은 파격적인 제안들을 내세웠다.
귀화의 유혹을 떨쳐버릴 정도의 제안들을.
하지만 또 모른다.
타국에서 더 좋은 조건을 들고 나오면 마음이 바뀔지도.
“타시죠. 집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뇨. 또 만날 사람이 있어서, 양재동으로 좀 가주실래요?”
이윽고 도착한 양재동.
시현의 발길이 당도한 곳은 인근 아진물산의 고급아파트.
김은혜의 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