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허상던전?”
“네...”
모르긴 몰라도, 기존에 알고 있던 던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마치 VR기기를 통해 가상현실을 체험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대체 허상던전이 뭡니까?”
“여러가지 가설이 있지만... 알려진 바가 거의 없어요... 발생하는 빈도가 매우 높다는 것밖에는..”
“어쨌든 던전은 던전이라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실제던전이든 허상던전이든 클리어를 해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것도 매한가지.
시현은 슈트를 덧입은 뒤 발걸음을 옮겼다.
뜨거운 땡볕 아래의 모래사막에 자욱한 모래안개까지 깔려있는 신기한 기후였다.
푸욱.
걸을 때마다 발이 모래에 움푹움푹 빠진다.
발자국이 새겨지고, 신발 속으로 뜨뜻한 모래가 들어온다.
말은 허상던전이지만 모든 것이 실제처럼 느껴지는 공간인 것이다.
헌데 복도에서 서빙카트를 끌고 있던 고깃집 종업원들은 다 어디 갔는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일이 분은 걸은 것 같은데.’
“던전이 발생하면 던전 내의 사람들의 위치도 재배치됩니까?”
“그건 아닙니다...”
“흠.”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다 어디 갔단 말인가?
그런 생각을 할 무렵.
“꺄아아아악!”
“사, 살려! 사람 살려!”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비명소리.
긴박한 상황이 시현의 코앞에 도래했다.
허나 자욱한 모래안개 탓에 뭐가 보이지도 않았다.
빛으로 거둬낼 수 있는 어둠보다 깐깐한 존재였다.
기존의 투영스킬보다 상위단계를 써야했다.
“보고자하면 볼 것이요.”
스오오오···.
시현의 동공이 다섯 배가량 확대되더니,
그 중간지점에 묵색의 점이 찍혔다.
비단 암흑뿐 아니라 안개까지 투과할 수 있는 스킬인 것이다.
‘어디 한 번 보자.’
먼저 전방.
시현의 눈이 전방의 안개를 투시했다.
그리고 때마침.
“끄아아아아악!”
종업원으로 보이는 여성의 몸이 거꾸로 공중에 붕 떴다.
괴상하게 생긴 초록색 촉수가 그녀의 다리를 낚아챈 것이다.
“꺄아악! 살려주세요!”
그녀 뒤에는 3미터에 다다르는 괴수가 촉수를 꿈틀이고 있었다.
겉보기엔 거대한 콩벌레와 문어를 합쳐놓은 듯한 귀여운 외양이었지만 실제론 상정이 포악한 사막 몬스터였다.
일명 텐타크로치(Tentakroach).
번역하자면 촉수바퀴정도.
7성 레어 몬스터였다.
훽!
“아아아악!”
텐타크로치가 여덟 개나 되는 촉수로 시민들을 낚아채 입에 넣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시현은,
‘대충 어떤 곳인지는 알았으니.’
피융!
말콤을 남겨두고, 나비처럼 날아가 안전하게 착지했다.
두꺼비 같은 텐타크로치의 주둥아리 위에.
-그억?
식사를 방해당한 텐타크로치가 고개를 든 사이.
시현의 두 손이 칼날처럼 날카롭게 변했다.
그리고.
사악!
-그어어어어!
텐타크로치의 콧등을 관통.
두터운 턱까지 일직선으로 뚫어버렸다.
푸악!
텐타크로치의 비명과 동시에 노란 액체가 터져 나왔다.
피 대신 신비로운 액체를 체내에 지니고 있는 것이다.
‘값어치가 있는 놈이야. 생포해야겠군.’
스윽.
시현은 발걸음을 뒤로 무른 뒤 몬스터의 언어로 말했다.
“촉수로 묶고 있는 사람들을 풀어주어라. 그럼 살려줄 것이니.”
-이 노옴! 인간 주제에 우리말을 할 줄 아는구나! 좋다. 당장 먹어주마!
힘의 차이를 느꼈을 만도 한데.
상정이 포악하기로 유명한 텐타크로치는 되레 반대로 행동했다.
촉수에 매달은 시민들을 입에 넣으려는 것이었다.
그 광경에 시현은 딱 두 번.
쯧쯧.
혀를 찬 뒤 눈 깜짝할 사이에 텐타크로치 앞에 섰다.
-어, 어느 틈에······!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지.”
스컹!
솨스스스스슥!
-그어어어어어어어!
군더더기 없는 몇 번의 동작.
그 뒤엔 뭉툭한 텐타크로치의 몸뚱이만이 남았다.
여덟 개의 촉수가 깔끔하게 잘려나갔기 때문.
시민들은 무사히 모래 위에 착지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오오오오오!
먹이를 놓친 텐타크로치가 분노한다.
그러자 그 순간,
좌아아악!
가지 잘린 나무에서 나뭇가지가 도로 자라나듯.
텐타크로치의 몸에서 촉수가 재생되었다.
역시 7성 레어 몬스터답게 스킬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시현이 아닌 다른 헌터였다면 경악을 했겠지만.
시현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손상이 없는 생물몬스터가 가장 비싸게 팔리니까.
꽈득.
주먹을 말아쥐고,
텐타크로치의 면상이 터지지 않을 정도로만.
퍽!
카앙!
텐타크로치를 잠재운 뒤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다시금 발을 뗐다.
“가죠, 말콤.”
“으흥....?”
이제 막 잠에서 깬 듯 두 눈을 껌뻑거리는 말콤.
“······여기가 어디죠?”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 같았다.
이제야 시현의 스킬효력이 끝난 것이다.
“기억이 안 나시나 봐요. 아까 한참 술 먹다가 취해서 잠 드셨는데.”
“아··· 그렇습니까?! 그럼 여긴···”
“허상던전입니다.”
.
.
.
“가, 감사합니다! 이 은혜 꼭 잊지 않겠습니다!”
“따, 따라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죠.”
같이 동행해도 되겠냐는 시민들의 부탁에,
시현은 흔쾌히 승낙했다.
누가 따라오든, 자신의 헌팅에 방해만 되지 않으면 상관없었기 때문이다.
앞서가던 시현이 말콤에게 물었다.
“허상던전도 엘리트 몬스터를 잡아야 클리어 됩니까?”
“Yes.. 보통은 그렇죠.”
“그럼 엘리트가 있는 곳까진 얼마나 걸리겠습니까?”
허상던전은 본 적도 겪어본 적도 없었기에 시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I팀에 근무하면서 허상던전을 숱하게 겪어봤을 말콤이 더 잘 알 것이리라.
아니나 다를까,
“음···. 텐타크로치가 나왔다고 했죠? 그렇다는 건··· 경우의 수가 몇 가지 됩니다.”
“경우의 수?”
“네. 음···. 이건 I팀으로서 미스터 팍에게 정보를 주는 것뿐이에요.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서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끄덕.
시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말콤이 말을 이었다.
“제 경험상 ‘사일런트 샌드웜’이 엘리트 몬스터로 있을 확률이 98% 이상이에요.”
8성 엘리트 몬스터 사일런트 샌드웜.
즉, 이곳은 8성 던전이라는 얘기였다.
“그럼 나머지 2%는 뭡니까?”
“그건··· 운이 아주 없는 케이스인데, 배제해도 좋아요. 한반도에서는 나타난 적이 한 번 밖에 없는 몬스터거든요.”
사일런트 샌드웜보다도 강한 놈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뜻.
아무리 2%의 가능성이라지만 철저히 준비하고 가야할 것이다.
“후.... 미스터 팍? 그런데 있잖아요...”
“말씀하세요.”
“잠깐만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술이 덜 깨서···. Just 5 minutes please.”
말콤은 죽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만약 일반 시민이 부탁했다면 거절했겠지만 말콤은 달랐기에 시현은 발걸음을 멈췄다.
“그럼 5분만 쉬었다 가겠습니다.”
“후···. 고마워요. 미스터 팍.”
사람들이 앉아서 쉬는 사이.
“!”
시현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섬뜩한 기운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
‘뭐지?’
스벅-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오는 발소리.
쉿.
시현이 입술에 검지를 갖다 댔다.
다만 그것이 몬스터인지 사람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시현은 청력을 강화시킨 뒤 단신으로 길을 나섰다.
그로부터 200미터 지점.
그 정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던전에 갇힌 건 고기 집 사람들만이 아니었군.’
시현의 일행처럼,
수백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유목민처럼 일렬로 나아가고 있던 것이다.
그러던 중.
훽!
선두에서 걸어가던 남자가 몸을 틀어 시현을 경계했다.
슈트를 입고 있는 걸로 봐선 헌터인 모양.
그가 먼저 외쳤다.
“우리는 한성E&M 소속 헌터입니다! 그쪽 신원을 밝히십쇼!”
한성E&M.
원수만도 못한 친구 천우현의 회사 헌터들이었다.
.
.
.
시현은 그들에게 굳이 헌터중앙기구의 소속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D급 헌터라 이거죠?”
“그렇습니다.”
D급 헌터라는 말에, 선두에 서있던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한성E&M 수도권지부 제1팀장 허영무였다.
토요일이고 해서 간만에 팀원들과 양재동에서 회식 중이었는데,
허상던전에 갇힌 뒤로 팀을 이끌던 중이었다.
그 외에도 수백 명에 달하는 시민들을 구조 중에 있었다.
그런 그가 시현에게 말했다.
“저-기 맨 끝, 행렬 뒤로 가서 붙으세요.”
“구태여 같이 가야할 필요는 없어 보이는데요.”
“예? 당신 D급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는 최소 7성 던전. 당신 같은 신입헌터가 혼자 돌아다닐만한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허영무는 자기 할 말만하고 발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시현은 그의 말을 듣지 않고 시민들을 이끌어 다른 길로 이동했다.
“이 사람이···.”
“신경 쓰지 말고 각자 갈 길 갑시다.”
“허, 참. 혹시나 해서 말해두겠는데, 몬스터 스틸은 절대 용납하지 않습니다. 먼저 쳤건 늦게 쳤건, 더 많은 딜을 넣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알겠어요?”
“좋군요.”
알게 모르게 피어나는 신경전.
허영무는 자신의 팀원들에게 속삭였다.
“혹시 모르니까 긴장들 해. 하나라도 놓치면 다들 죽을 줄 알아.”
“예. 그런데 저 남자가 입고 있는 거, 마틴 사 제너럴슈트 아닙니까? 카오틱 버전 같은데···.”
“뭐, 어디 잘 사는 집 아들인가보지.”
“150억이나 하는 걸요?”
“뭐? 그렇게나 비싸다고?”
허영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마틴 사라고 해봤자, 기껏해야 수억 짜리 양산품일 줄 알았는데.
무려 150억짜리였다니!
시현을 잘 사는 집 아들정도로만 생각했던 허영무는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알만한 재벌가의 자제는 아닐지.
그게 아니라면,
“이미테이션 아냐?”
휙!
다시금 시현의 슈트를 확인하고자 허영무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어, 어디 갔지?’
시현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전방으로 도약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흙무더기를 향해,
파아앙!
주먹을 내리꽂았다.
이게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린가 싶었지만.
이윽고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스아아아아-
모래안개가 걷히고, 몬스터의 사체가 지상 위로 드러난 것이었다.
다름 아닌 데저트 인페르노(Desert inferno)
8성 레어 몬스터.
놈이 땅 속에서 매복을 준비하고 있던 것이다.
시현은 그것을 감지하고 미리 처단한 것이고.
‘그것도 한 방에······?’
허영무의 눈에, 시현은 절대 D급 헌터가 아니었다.
‘최소 A급....!’
얼마 전 A급 헌터로 승격한 허영무였다.
아무리 못해도 시현이 자신보다는 강하다는 걸 통감할 수 있었다.
그는 속으로 울분을 삼켰다.
경쟁이고 나발이고, 아무래도 오늘 헌팅은 다 끝난 듯싶다.
몹이 동시다발적으로 대량소환되는 것이 아니라면 한 마리도 건질 수 없으리라.
‘제발 한꺼번에 나오길···.’
그의 바람이 통한 것인가?
푸와아아아아-!
곳곳에서 온천수가 터지듯 데저트 인페르노들이 튀어나왔다.
거기에 더해, 그 가운데엔 보스 몬스터로 보이는 위압적인 존재까지.
-그어어어어어어어어!
8성 엘리트 사일런트 샌드웜이 아닌···
“사, 사막장군······?”
“사막장군이다아아아!”
“Oh, Shit....”
8성 에픽 몬스터 사막장군(Dessert general).
그것의 크기는 어림잡아도 아파트 10층 높이.
시민들은 모두 줄행랑을 쳤고,
한성E&M의 헌터들도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헌데 그 와중에 앞으로 걸어 나가는 이가 있었다.
“사막장군?”
사막장군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시현이었다.
녀석은, 미지의 던전에서 시현의 샌드백이 돼주었던 몬스터였기에.
“이렇게 보니 또 색다르군.”
그러나 이번엔 좀 다르다.
여태껏 보아왔던 사막장군 중에서도 제일 거대하고 육중하며.
몸에는 견갑까지 두르고 있었다.
하지만 한 번 샌드백은 영원한 샌드백.
“이젠 좀 때릴 맛이 나려나.”
그 모습에 허영무는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맙소사... 저걸 솔로잉 하겠다고? 지금 제정신인가...?'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슥-
시현은 당당한 면모로 전투태세를 갖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