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저벅.
예고 없이 나타난 이용수의 모습에 시현이 한발자국 앞으로 다가간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지만 귀티 나는 외모는 가릴 수 없었다.
이용수가 확실했다.
“···고맙다. 근데 너 여기 웬 일이야. 회사에 있을 시간 아냐?”
“지금 회사가 중요하냐. 불알친구가 경사가 났는데, 춤을 춰도 모자를 판에.”
시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번졌다.
누군가 시간을 내어 찾아와준다는 것과,
시간 나서 찾아오는 것은 확연히 달랐기에.
안 그래도 1분 1초가 바쁜 이용수가 아니던가?
“너 그러다 회사에서 쫓겨나는 거 아냐?”
“얌마. 나도 사람이다. 시간이야 내려면 낼 수 있지.”
“그럼 시간 좀 더 내주라.”
“왜? 낮술이라도 하게? 크흠-. 그건 좀 곤란한데. 나 비싼 몸이다.”
“그럼 알지. 이 나라에서 너만큼 비싼 놈이 얼마나 될까.”
시현과 이용수가 담소를 나누는 사이.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둘에게로 집중됐다.
“저 사람··· TV에서 많이 보던 사람인데···.”
“연예인이야? 연예인할 얼굴은 아닌데?”
“음···. 9시 뉴스에서 자주 봤던 것 같은데.”
인터넷 포털사이트에 치면 바로 나오는 이용수였지만.
해외유학 이후 사내 요직에 앉은 지 얼마 안 되었기에 얼굴이 널리 알려진 건 아니었다.
그가 이용수라는 것을 안다면 모두 자지러지겠지만.
“그나저나 퇴소식은 잘 끝났고?”
“잘 끝났지. 높으신 분들까지 와서 축사를 해대느라 좀 따분했지만.”
“암. 퇴소식은 축사가 다지. 가자, 타.”
시현이 세단으로 다가가자.
철컥.
이용수의 기사가 문을 열어줬다.
“우리 본부장님 차는 얼마나 좋으려나.”
“차가 거기서 거기지, 내 차라고 뭐 다르냐? 아, 그런데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는 거야?”
“기사님 보내고, 간만에 둘이 드라이브나 한 번. 어때.”
“드라이브?”
“아, 그전에 나 양복 한 벌만 장만하고.”
.
.
.
영월의 한 봉안묘.
고급세단이 멈춰 섰다.
“부모님 찾아뵈러 온 거였어?”
“그동안 못 찾아봬서.”
무려 8년 만이었다.
던전에서 나온 뒤, 찾아올까 싶었지만.
이왕이면 헌터가 된 후 떳떳하게 찾아뵙고 싶었다.
그런데.
“뭐지?”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묘 자리가 8년 전과 바뀌어있었다.
단순히 착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억을 되짚어봤지만 부모님의 묘 자리는 여기가 아니었다.
더군다나 크기도 이것보다 훨씬 작았었는데···.
답은 엉뚱한데서 흘러나왔다.
“너희 부모님. 귀국한 뒤로 내가 모셨다.”
“···뭐?”
“매년 찾아뵀어. 시현이 이 놈 언제 오냐고 물어보려고.”
“아···. 고맙다.”
“고맙긴. 그런데 묘 자리 바뀐 건 왜 안 물어보냐?”
말 떨어지기 무섭게 시현이 입을 열었다.
“일단 제사부터 지내자.”
“그래.”
스윽.
용수가 자리를 피해주자 시현이 제사를 시작했다.
“아버지, 어머니. 저 왔습니다. 현자건설을 세계최고의 건설회사로 만들겠다고 그렇게나 자신 있게 말하고 다녔는데.”
그때만큼은 기업가의 꿈을 꾸었으며.
반드시 세계최고의 건설회사로 만들겠다고 부모님께 떠벌리고 다녔던 시현이었다.
하지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마치 악몽처럼···.
불행은 한순간에 들이닥쳤다.
“이제 편안히 쉬세요.”
시현이 제사를 끝내자 이용수가 입을 뗐다.
“시현아. 놀라지 말고 잘 들어. 8년 전에 너 행방불명되고, 1년도 채 안돼서 도굴됐어.”
“뭐? 도굴?”
“어. 중장비를 끌고 와야 할 정도의 강도였는데. 하룻밤 사이에 도굴됐다더라.”
번뜩.
시현의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불현듯 스쳤다.
아버지의 유품.
필경 누군가가 아버지의 유품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범인은?”
“나도 미국에서 전해들은 거라 당시 정확한 정황은 모르는데, 흔적하나 없어서 못 잡았다더라. 더 웃긴 건 관련 기사하나 안 났다는 거지.”
중장비로 파내야할 정도의 강도인데.
범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전문도굴꾼이 아니라 도굴왕이 와도 어림없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권능을 받은 놈의 짓임에 틀림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유품은 아버지의 묘에 없었다.’
시현은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묘에는 유품이 없었다는 것을.
그렇다면 유품은 대체 어디로 간 것인가?
불의의 사고로 죽음을 목전에 두었던 시현의 아버지는 시현에게 이러한 유언을 남겼다.
‘여, 열쇠···를··· 남겨놓···았···.’
그 말만 남기고 명을 달리한 시현의 아버지였다.
‘열쇠라···.’
지금 생각해봐도 어이가 없는 유언이었다.
수수깨끼도 아니고.
비밀스러운 유품을 남길 거면 최소한 위치는 알려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면 그 자리에서 ‘김은혜’가 있었기에 위치를 알려주지 않았던 것일까?
그날부터 시현은 전국을 뒤지며 아버지의 유품을 찾아봤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흠.”
고민이 거듭 생긴다.
유품도 유품이지만, 열쇠를 찾고 있는 상대세력도 찾아야할 것이다.
단, 먼저 모습을 비춰선 안 된다.
의심되는 상대가 먼저 모습을 드러내도록 미끼를 던져야할 것이다.
생각을 마친 시현은 이용수에게 말했다.
“저번에 말했던 거 아직 유효하지?”
“뭐?”
“정식헌터 되면 축하선물 사주기로 한 거.”
“아아-. 뭔데? 말만 해. 구할 수 없는 아티팩트라도 구해다줄 테니까.”
“그런 건 괜찮고.”
“그럼?”
“8년 전 아버지의 죽음. 자세히 알아봐줘. 난 내 방식대로 알아볼 테니까.”
.
.
.
12월은 춥다.
몸이 굼떠지고 머리가 굳는 계절이다.
사람들은 오로지 말에 있을 연휴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시현에게는 첫걸음을 떼는 날이었다.
[용산구 헌터중앙기구 별관09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매니저 류건-]
헌터중앙기구.
헌터로서의 첫 출근인 것이다.
현재시각은 아침 6시.
출근까지는 3시간이나 남아있는 상황이라 여유로웠다.
아침운동이나 잠깐 나갔다 올까 싶었지만.
딩동-.
경비실로부터 인터폰이 울렸다.
-택배 왔습니다.
그와 동시에 날아온 문자 한 통.
[취업축하선물. 미리 보냈다. 비밀번호는 니 생일]
이용수의 문자였다.
그리고 잠시 후.
건장한 남성 넷이 커다란 초경량합금상자를 손수레에 실고 올라왔다.
자세히 보니 택배직원이 아니었다.
딱 봐도 이용수가 보낸 회사 직원이었다.
“여기 싸인만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예,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꾸벅.
직원들이 90도 인사를 하고 떠난 뒤.
시현은 커다란 초경량합금상자를 보았다.
마네킹이 들어갈 정도로 길쭉한 상자였다.
안에 뭐가 들어있길래 특수 장치로 잠가놓기까지 한 것인지.
“그럼 어디···.”
시현은 내심 기대하며 비밀번호를 입력해 상자를 풀어보았다.
0305.
삐빅.
선물은 마음으로 받는다지만.
이건 기대를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는 사이즈.
안에 들어있는 것은···.
“엄청나군.”
마틴 제너럴시리즈 A5-Chaotic 슈트.
언뜻 보면 라텍스 재질의 전신잠수복처럼 보이지만.
이것은 미국 최대의 방위산업체인 마틴 사에서 만들어낸 아티팩트로, 세계에서 알아주는 슈트 중 하나였다.
소재는 카오틱(Chaotic).
한 때, 미 텍사스 주를 공포로 몰고 갔던 ‘혼돈의 장군’으로부터 얻은 부산물로 제작한 걸작.
정식판매가는 한화로 무려 158억 원.
더군다나 이건 아무에게나 팔지 않는 특수제작 슈트다.
부와 명예가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아티팩트란 뜻.
수십, 수백만 원짜리 양산형 바디슈트와는 궤를 달리한다.
시현은 곧바로 이용수에게 문자를 넣었다.
[무리한 거 아니야?]
[무슨. 더 좋은 것들도 많은데. 제작기간이 오래 걸려서 급한 대로 그거 보낸 거야. C급 헌터 되면 더 좋은 거 사줄게]
역시 친구밖에 없는 것이다.
아침 6시.
시현은 집을 나섰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야산을 찾아 올라갔다.
‘이쯤이면 되겠지.’
시현은 아공간에서 카오틱 슈트를 꺼냄과 동시에 생각했다.
‘장착.’
그러자.
척.
척-.
촤악!
발동스킬이 걸려있던 카오틱 슈트가 시현의 몸에 저절로 착용됐다.
놀라움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가볍다.”
슈트가 원래 이렇게 가벼운 것인가?
역시 비싼 것은 돈값을 하는 것이다.
슈트의 등급만 해도 7성 에픽으로 분류돼있으니 당연지사였다.
‘그럼 어디.’
슈트의 성능을 바로 확인하고 싶었던 시현은.
꽈득-.
바로 시험에 나서보았다.
“일단.”
무(無) 언령으로 맨몸으로 하늘로 주먹을 뻗자.
파아앙!
“!”
대기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전과는 확실히 다른 파워다.
근력, 민첩 등 신체능력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스킬도?
꾸득-.
주먹을 말아 쥐고, 다리를 벌렸다.
개구리가 점프하듯 자세를 낮추고.
뛰어오른다!
“나비처럼 날아서.”
피유웅!
‘이건 뭐···.’
가히 사기 급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
D급 헌터도 이 슈트만 있다면 C급을 손쉽게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아티팩트가 전투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던 시현이다.
게다가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기력의 양도 늘었다.
‘엄청나군.’
동시에 의아했다.
아티팩트 하나 걸치고 있지 않았던 자신이 어떻게.
8년 간, 그 지옥 같은 던전에서 살아남았던 것인지.
그렇다면, 앞으로 강해질 길은 차고 넘쳤다는 것.
지금 당장만 해도 점프력이 전보다 최소 1.5배는 상승했으니.
더 뛰어난 아티팩트를 착용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솨아아아-
30미터 상공으로 떠오른 시현은 가슴이 두근거림을 느꼈다.
꽈득.
꽉 쥔 자신의 주먹처럼 굳건한 미래가 기대됐다.
.
.
.
서울특별시 용산구.
헌터중앙기구 한국지사 별관09.
시현이 첫걸음을 내딛는 건물이었다.
헌터특별본부로 가는 통로에는 보안 문이 곳곳에 놓여있었다.
“이걸 여기에 스캔하면 됩니다.”
매니저 류건이 시현에게 보안카드 겸 사원증을 건넸다.
<헌터중앙기구 KR01 던전관리국 수색부 헌터 박시현>
“이게 제 위장용 직업이군요.”
“그렇습니다. 하시는 일에 대해선 프린트해서 따로 드리겠습니다. 기본적인 업무만 숙지하고 계시면 됩니다.”
“네. 그런데 원래 팀원에게도 존대하십니까?”
“저는 이게 편해서요. 팀원들에게 정 주지 않아도 되고···. 아, 얼른 가시죠. 팀장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
시현은 철통같은 보안 문을 거치고 거쳐.
지하 7층으로 내려간 뒤 마지막 보안 문 앞에 섰다.
“긴장마세요.”
“아뇨. 긴장 된다 기 보다는···.”
“그럼요?”
“기대되네요. 과연 어떤 사람들이 있을지.”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얼마나 강한 사람들이 있을지.
그게 궁금했다.
베일에 감춰있는 헌터중앙기구의 S팀이었기에.
“다들 좋은 분들입니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고, 시현은 류건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