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
이명표가 자리에 앉으며 말한다.
“배가 많이 고프셨다고요?”
초면에 반말하는 양아치들과는 다르다.
품위가 있으며 남을 대접할 줄 안다.
“이러다가 굶어죽겠네요.”
시현은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생사의 갈림길에 숱하게 서다보면 배짱 하난 두둑해지기 때문.
“그럼 거기서는 뭘 먹고 사셨습니까?”
오호, 이것 봐라?
협상도 끝나지 않았건만 은근슬쩍 질문을 던져?
속보이는 영감이다.
“허허. 제가 너무 서두른 겝니까?”
“천천히 하시죠.”
하지만 미끼는 던져줘야지.
대형마트에서도 음식팔기 전에 시식을 하니까.
맛보기로 살짝.
“육식을 즐겼죠.”
“호오···. 던전에 무언가 있던 게로군요?”
이명표가 좀만 더 맛보게 해달라고 살살 꼬드겼지만 시현은 넘어가지 않았다.
“여기까집니다. 아, 그런데 던전에 소고기는 없더군요. 그래서 말인데, 이제 저도 소고기 좀 먹어볼까 하는데.”
“특급한우로요?”
시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덧붙인다.
“특수부위로요.”
최대한 많은 걸 뽑아먹으려는 시현이다.
그래도 사람답게 살려면 최소한 빚은 청산해야하지 않겠는가?
“허허. 배가 얼마나 곯으신 겝니까?”
“제 배는 이미 심해로 떨어졌죠. 더 이상 떨어질 곳도 없습니다.”
“하기사, 잔존채무가 남아있으니 당연히 이자도 불어났지요.”
부담감이 배가된다.
이명표가 말을 이었다.
"실종선고가 된 상태였습니다만, 돌아오셨으니 허공에 붕 떠있던 빚은 다시 되돌아 가는 것이 순리인 것이지요. 상속포기를 안 하셨잖습니까? 아니면, 지금 상속재산에 따른 파산신청을 하시겠습니까?"
“아뇨. 상속은 포기하지 않을 건데, 그거 다 변제해주심 안 되나요?”
“단도직입적이시군요.”
“어차피 알고 있었잖아요? 내가 이런 요구를 할 거란 걸. 크으.”
현재 시현의 가치는 수백 조를 줘도 모자를 판!
돈으로 환산할 수 없었다.
이명표 장관이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일단 절반은 변제해드리죠.”
“그럼 나머지는?”
턱-.
이명표가 책상에 양손을 올리고 몸을 앞으로 당긴다.
“나머지는 일 끝나고 얘기합시다.”
“그럼 확신을 받아야겠는걸요?”
알고 있는 정보를 모두 알려주는 대신.
모든 빚을 변제해준다는 확신이 필요하다.
나중에 가서 딴말하면 곤란하니까.
이에 이명표가 난감하듯 말한다.
“국가는 거짓말을 안 합니다.”
“하지만 속임수를 쓰지 않습니까?”
“속임수가 통할 상대에게만 쓰지요.”
시현은 승낙했다.
“오, 좋아요. 그럼 계약서나 한 장 가져오시죠.”
협상은 깔끔히 끝났다.
매부 좋고 누이 좋은 결과였다.
“협상은 끝났으니 뭐든 물어보시죠. 배가 고파서 얼른 밥이나 먹으러 가고 싶군요.”
“좋습니다. 바로 시작하지요.”
이명표 장관이 목소리를 낮춘다.
“아까부터 이게 가장 궁금하더군요.”
“뭐 말입니까?”
“그 안에서, 뭘 드시고 살았소?”
.
.
.
지금생각해도 고블린 고기는 끔찍하다.
너무 질기고, 또 냄새는 어찌나 역겨운지.
그런데 이건 다르다.
지글지글!
“살살 녹네, 녹아.”
역시 한우야.
그것도 1++ 특수부위.
장관이 추천해준 한우전문점이라 그런지 서비스도 출중하고.
던전에서 먹던 거랑은 차원이 다르다.
간만에 한우를 실컷 포식한 시현은 벨을 눌렀다.
어여쁜 종업원이 문을 열고 들어와 꾸벅 인사한다.
계산서에 찍힌 금액은 62만원.
“계산은 다 되셨습니다.”
“그래요?”
장관이 했나보다.
그럼··· 팁을 줘야하나?
어렸을 적 부모님과 이런 곳에 올 때면, 아버지가 항상 팁을 꽂아주던데.
“여기.”
장관 비서관에게서 받은 십만 원짜리 지폐를 건네주었다.
“감사합니다.”
“수고해요.”
드르륵-.
이쑤시개로 고기를 빼내며 밖으로 나가보니 복도에 꼬마 하나가 뛰어다닌다.
저러다가 넘어질 텐데.
“와아아아아!”
콰당!
“으아아앙!”
뭐야?
지 혼자 넘어지더니 갑자기 울어버린다.
목격자는 시현뿐.
뭔가 불길한데?
드드르륵!
불길한 예감은 언제나 적중한다.
“당신 뭐에요?”
젊은 아줌마 하나가 나와 시현에게 삿대질을 한다.
“손님인데요?”
“아니, 왜 남의 애를 울리냐고요?”
기가 찬다.
아무리 개념이 없어도 그렇지, 상황 파악이 먼저 아닌가?
“웬 거지새끼가. 별 꼴이야.”
이제는 혀까지 끌끌 찬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시현의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8년 동안 한 번도 자르지 않은 산발머리.
그래도 오거의 뒷다리힘줄로 묶어놔서 꽤 깔끔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그렇다 쳐도 치아가 많이 없었다.
입고 있는 옷도 걸레짝이나 다름없었다.
언령으로써 청결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던전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피 터지는 일이 다반사였기에, 그런 일에 기력까지 쓸 이유는 없던 것이다.
쉽게 말해서, 시현의 현 상태는 알거지.
따라서 아줌마의 생각은 일반적인 것이었다.
다만 그 태도가 일반적이지 못했을 뿐.
“으아아아앙!”
설상가상으로 애는 더 울어재낀다.
무릎이 살짝 까져서는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려대는데.
어쩌라고?
“나도 당당히 돈 내고 왔습니다.”
그 말을 하고 지나치려는 시현의 뒤통수를 향해,
퍼억!
여자가 식당 슬리퍼를 던졌다.
그리고 하는 말이···.
“여기 지배인! 지배인!”
지배인이 황급히 달려왔지만 상황은 해결되지 않는다.
그는 일단 울고 있는 아이를 식당 입구로 데려갔고.
급기야 사장까지 호출됐다.
“요즘엔 거지들도 받나보죠?”
“저, 사모님··· 저분은 거지가 아니라···”
“사장님. 저 누군지 모르세요?”
성난 아줌마는 무섭다.
보이는 게 없다.
난감해하는 사장을 대신해 시현이 나선다.
“이봐요, 아줌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끝냅시다. 내가 그쪽 애한테 뭐 한 것도 아니고.”
“아줌마?”
여자로서는 기가 찰 노릇.
최근에 아줌마 소리 들었던 적이 언제였던가?
잘나가는 남편과 결혼한 뒤로는 들어본 적도 없는 것 같은데.
반평생을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살아왔는데!
“어디서 이런 별, 족보도 없는 거지새끼가 나타나서······.”
발끈.
더 이상은 못 참겠다.
그래도 귀빈식당이고 해서 참으려고 했는데.
뭐? 족보가 없어?
까득.
시현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귀빈만 받는 식당이라고 해서,
행색이 초라하다고 남을 악인으로 몰아가는 것이 정상인가?
그리고 손을 올리려는 찰나.
“손님. 죄송합니다···. 일단··· 밖으로 나가주심이······.”
사장이 시현에게 고개를 숙인다.
사장은 이명표 장관 비서관의 전화를 받고 시현에게 식사를 대접한 것이다.
하지만 시현과 장관 비서관 사이의 정확한 관계는 알지 못했다.
‘외양을 보아하니··· 아마 장관 비서관님이 자원봉사를 하시는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한 사장은 시현을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유감이지만··· 권력의 편에 서야했기에.
“밖으로 나가기 전에 사과부터 하라고!”
그럼에도 여자의 성질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소란이 커지자, 위층 대접실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편이 내려오고야 말았다.
“무슨 일이야? 억!”
계단에서 내려오자마자 사색이 된 남편.
“수사관님 아니십니까?”
“어어··· 예, 예···. 박시현 씨께서 여긴 어쩐 일로······.”
그렇다.
그는 불과 한 시간 전에 심문을 담당했던 수사관이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사태파악을 끝낸 수사관은 부인에게 조용히 말했다.
“어서 사과드려···.”
“뭐야? 당신 지금 미쳤···”
“당장 사과드리라고!”
“여보....? 커, 커헉!”
수사관이 여자의 뒤통수를 잡고 짓누른다.
본의 아니게 90도 인사를 받게 된 시현은 손을 저었다.
“이러실 필요까진 없습니다.”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아내관리 못한 제 잘못입니다.”
“흠. 사과는 받을 걸로 하죠.”
“그럼 불미스러운 일은....”
“없을 겁니다. 안심하세요. 그러니 부인되시는 분 그만 고개를 들라 하세요.”
여자가 고개를 천천히 든다.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얽혀있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쪽팔리고 분하다.
남편이 이것 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다니!
그녀에게 인생 최대의 굴욕을 안겨준 시현이었다.
툭툭, 시현은 수사관의 어깨를 다독이며 복도를 나왔다.
“입맛만 버렸네.”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면 안 되는 것이다.
헌데 식당 밖 유리창을 통해 바라보니,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인다.
“심하긴 하네.”
아무리 그래도 겉모습은 좀 바꿀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