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쥐구멍에 볕들 날이 올 것인가?
그렇다면.
돌아가신 아버지를 대신해 채무자들에게 진 빚을 갚을 수 있고.
인적 드문 시골의 야산에서 잠을 청하지 않아도 된다.
남들만큼 떳떳하게 살 수 있다.
집안이 풍비박산 나자마자 시현을 버렸던 여자 친구에게도.
복수 정도는....
“후-”
간만에 돌이켜보니까 너무나 더러운 추억이었다.
세상에 좋은 이별 따위는 없다지만, 사람을 그렇게 매정하게 차버리다니.
가뜩이나 부모님 장례다, 빚이다 뭐다하면서 정신없었는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수능 끝난 기념으로 교회오빠랑 겨울바다를 갔다고 한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진짜 복수를 원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녀가 부모님을 죽음으로 몰아갔다고 생각했기에.
“퉤-.”
이제는 나갈 때가 됐다.
오랜 세월 간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한다.
그런 시현의 바람을 알아준 것일까?
쿠궁-.
땅이 울린다.
바다 저편에 놓여있는 산이 요동친다.
분화구가 쩌적- 갈라지고, 용암이 분출된다.
하늘이 재로 가득하고, 단단히 굳은 용암이 메테오가 되어 날아온다.
젠장.
무슨 일이 벌어지려는 것인가?
대지가 메마르기 시작한다.
밀랍처럼 굳는다.
설마 이 공간이 붕괴되려는 것인가?
드디어?
문득 가지게 되는 희망 한줄기.
그래, 이쯤 했으면 나갈 때 됐지.
그와 동시에 바다에서 검은 섬광이 일어난다.
좌아아아아아 ―
섬광 뒤에 거대한 존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드래곤?”
전혀.
외양은 드래곤과 흡사하나 본질은 다르다.
크기는 용 따위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하며, 눈은 악마의 그것처럼 사악하다.
-키요오오오오오오오!
끔찍한 괴성을 내지르며 하늘 위로 승천한다.
천지를 뒤흔든다.
하늘이 갈라지고 대지가 파멸한다.
쓰나미가 일어 화산의 불길을 덮친다.
시현이 서있는 땅이 무서운 속도로 갈라진다.
안전한 곳은 오로지 한 곳.
바다 건너 놓여있는 화산.
시현은 달렸다.
대지가 파멸되는 속도보다 빠르게 도망쳤다.
하지만 스킬을 사용하면 기력이 소모되기에.
마음 놓고 사용할 수 없다.
더군다나 쿨타임이 있기에 연달아 사용할 수는 없는 노릇.
이제부터는 걸어가야 한다.
화산으로 가는 길은 한 곳을 제하고 모두 막혀있다.
유일한 통로는 바다 위의 다리뿐.
시현은 다리 위로 발을 뻗었다.
그 뒤로 쓰나미가 몰아쳤고, 시현의 몸은 어디론가 휩쓸려갔다.
***
지구.
원래는 인간들이 지배했던 곳.
한때는 잠깐이나마 몬스터가 점령했던 곳.
하지만 이제는 인간과 몬스터가 대립하며 살아가는 곳이었다.
언젠가 그런 일이 있었다.
세계 일곱 군데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사건.
대지 한 가운데에 검은색 장막이 생성되었다.
바로 던전.
그곳에 사람들이 갇혔다.
미국에 14명 추정.
러시아에 6명 추정.
폴란드에 24명 추정.
등등.
마지막으로 대한민국은 0명 추정.
이라고 정부의 공식발표가 잇따랐다.
대한민국의 경우, 의문의 공간이 생성된 지역은 다름 아닌 인적 드문 시골의 야산이었다.
몬스터의 침공으로 재건작업이 예정되어있던 곳이라, 데이터 상 거주민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그런 곳에 재앙이 내렸다.
시골의 어느 한 야산.
이곳에서 대량의 기력이 탐지되었던 게 15분 전이다.
국가차원에서 공기업소속 헌터들을 출동시켰고,
근처에 있던 헌터들이 팀을 꾸려 야산에 도착했다.
한데 그곳에서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검은색 장막이 산산조각 나있었는 것이 아닌가?
“팀장님. 동쪽엔 출구가 없습니다!”
“북쪽은 막혔냐? 북쪽도 수색해!”
“아··· 예!”
출구는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안쪽이 보이는 것도 아니고.
들어갈 수 없는 공간인가?
7명의 헌터로 구성된 팀의 팀장이 외친다.
“모, 모두 피해!”
“대피하라!”
“대피해!”
탐지기에 격동적인 움직임이 포착됐다.
저저적-!
거대한 알이 부화하듯 던전의 장막이 갈라진다.
그 안에서 알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회, 회오리······?”
그렇다.
하지만 보통 회오리가 아닌 물 회오리.
휘요오오오오!
엄청난 풍압이다.
나무가 뿌리 채 뽑힌다.
"크라우드 배리어!"
솨아아아-.
팀의 서포터가 배리어를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모두가 휩쓸려갔을 것이다.
그녀의 활약에 어윤성 팀장이 혀를 내두른다.
‘역시, 김은혜···. 듣던 대로 침착하고 상황파악이 아주 빠르군. 스물다섯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서포터 김은혜.
사실 그녀는 공기업소속이 아니었고, 휴가차 인근에 나와있던 사기업소속의 헌터였다.
정부차원에서 급한 대로 사기업에 거금을 쥐어주고 부탁했던 것이다.
‘감탄은 여기까지.’
이제 공기업 헌터팀장의 저력을 보여줄 때다.
팀장 어윤성은 외쳤다.
“안에서 뭐가 나올지 모른다. 원거리 딜러는 포지션 잡고 교란준비하고! 누커는 12시 방향으로 올라가서 일격준비하고!”
완벽한 전술. 군더더기 없는 명령.
하지만 그건 상대가 평범할 때나 먹히는 것이지.
이런 경우는 소용없다.
-키요오오오오오오!
저저저적!
괴성과 동시에 산산조각 나는 장막.
팀 전원이 명령을 무시한 채 귀를 막고 눈을 가렸다.
그 끔찍한 장면을 계속 보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어윤성이 끝까지 그 정체를 응시하였다.
그리고 보았다.
차마 두 눈으로 보기 힘들 정도로 흉측한 눈알을.
“크윽·····.”
털썩-.
결국 그 위압을 버티지 못하고 무릎을 꿇은 어윤수.
제기랄!
명색에 B급 헌터인데.
고작 몬스터랑 눈을 마주쳤다고 무릎을 꿇어?
도대체 저건 무엇이란 말인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티, 팀장님.....!”
어윤성은 나직이 들려오는 무전소리에 눈을 떴다.
고개를 찬찬히 들어보니 언제 그랬냐는 듯 더없이 맑은 하늘이 보인다.
'아, 살았구나.'
그런데 그건 도대체 뭐였지?
처음 보는 것이었는데······.
그래도 다행이다.
다친 인원은 없고, 앞으로 다칠 일도 없어 보이니까.
그런데.
“저기요. 팀장님.”
“예, 은혜씨.”
“장난하세요?”
난데없이 이게 무슨?
“몬스터가 공격이라도 했으면 어쩔 뻔 했어요?”
김은혜가 신경질을 내며 일갈한다.
“몬스터 식별은 기본 아닌가요? 그리고 대응이 너무 늦었던 거 아닙니까? 좀만 늦었으면 물 회오리에 휩쓸려 죽었을 거라고요.”
“예. 제 잘못 인정합니다. 죄송하고요. 하지만 그 상황에선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제가 배리어 친 덕분에 모두가 살았죠. 안 그래요?"
"맞습니다."
"그래서 어떡하실 건데요?”
“예?”
저 눈빛, 수상하다.
김은혜는 단순히 화가 난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
김은혜가 눈을 내리깔면서 말한다.
“8월에 그쪽 회사 승진시험이 있다면서요?”
“아······.”
“안 그래도 세계에 7개 밖에 없는 던전이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다니요. 회사에서 알면 한 소리 들으시겠어요. 팀장님뿐만이 아니에요. 나머지 분들도 제가 다 확인했어요. 교전 중에 고개 숙이는 거, 제 카메라에 녹화됐거든요? 이거 직무유기 아닙니까?”
“하지만 그건 우리가 아니라 다른 팀이 왔더라도······!”
“A급이라면 달랐겠죠?”
“하아-.”
내리깔리는 어윤성의 한숨.
어쩔 수 없음을 직감했다.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수밖에.
“그, 그래서 제가 뭘······.”
“깔끔하게 적당한 거 한 장으로 끝내죠.”
“하지만 그건 너무 많습니다······.”
“많아요? 그럼 친한 기자한테 전화해야겠네.”
“아······.”
타격이 클 것이다.
안 그래도 정부에서 관심 있게 지켜보던 사건이었는데.
몬스터를 놓친 것으로도 모자라 일처리까지 미숙하게 했으니 징계를 피할 순 없을 것이다.
심할 경우 해직까지······.
이럴 거면 핑계를 대서라도 오는 게 아니었는데.
염병할!
“····예, 드리겠습니다.”
그래, 이 정도는 감수하자.
먹여 살려야하는 가정이 있으니까.
“돌아가서 보고 끝나는 대로 드리겠습니다.”
“현금으로요.”
“····물론이죠.”
찡긋, 김은혜가 윙크를 하며 발을 뗀다.
그런데 그 순간.
저저저적!
장막이 전부 갈라졌던 것이 아니었나?
촤아아앙!
남아있던 장막이 모두 박살나더니,
“새, 생존자가 있습니다!”
웬 거지꼴을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그 모습에 김은혜가 발걸음을 멈추고 등을 돌렸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그 가운데, 남자가 쓰디쓴 미소를 머금으며 말한다.
"오랜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