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2)최종장 (2)
"진짜 오랜만이다~! 잘지냈어? 어떻게 지냈어?"
수척한 듯도 보이는 낯빛의 나영을 만난 안나는 활짝 웃으며 그녀의 손을 맞잡았다.
나영이 어색히 웃으며 시선을 피했다.
"아.. 으응, 잘 지냈지. 언니는 잘 지냈어? 어가이브 길드 총괄책임이라며?"
안나도 사실 알고 있었다.
자신이 길드를 떠난 이후, 중상에서 회복한 나영이 어느 길드에도 들어가지 못한 채 전전긍긍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그 퇴짜의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있기에 안나 역시 그녀를 어가이브로 영입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모든 길드가 일관하고 있는 그 이유 때문에 말이다.
이번엔 안나가 어색히 웃어야했다.
어색함을 감추려는듯, 휑한 주변을 둘러보는 그녀.
"아, 그렇게 됐어. 호호.. 그나저나! 갑자기 보자고 한 이유가 뭐야?"
둘이 있는 곳은 번화가에서도 동 떨어진, 후미진 골목에 위치한 낡은 카페였다.
나영의 전화에 미리 주문해둔 커피도 나와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인적은 어디에도 느껴지지 않았었다.
직원도, 손님도 말이다.
하지만 안나는 신경쓰지 못하고 있었다.
직원도 손님도 보이지 않는 이 허름한 카페로 걸음을 하며 사실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으니까.
나영이 개과천선했다며 고해성사라도 하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그렇다면 당장이고 그녀를 어가이브에 영입하기 위해 강준이를 설득해볼 수 있을 텐데.
어쨌든 나영이는 자신과 동고동락을 했으며 생사를 나눈 오랜 사이기도 했으니까.
무엇보다 떠난 이의 성공은 남겨진 이에게 죄스레 다가가기 마련이었다.
미리 주문해둔 커피잔을 매만지며, 나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 다른게 아니고.."
"왜왜, 뭔데 그래. 잠깐 안 봤다고 언니한테 말 못할 거리라도 생긴 거야?"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체, 체하겠다. 커피 좀 마셔. 급하게 온 거 같은데."
나영이 어중간하게 놓여있던 안나의 커피잔을 밀어주었다.
후줄근한 카페와는 달리, 깨끗하게도 닦인 새하얀 잔 속에 새까만 물이 출렁인다.
나영이 그 잔잔한 물결을 보며, 침을 삼켰다.
"어, 언니가 얘기했던 아메리카노야. 따뜻한 거."
"흠~ 하.. 오랜만이다. 이 향기. 역시 스틱 커피는 카페에서 뽑은 거랑 비교할 수가 없다니까?"
커피잔을 든 안나가 코로 시음을 한 후, 한모금 홀짝였다.
알싸하면서도 풍미 가득한, 씁쓸한 맛이 식도를 반긴다.
그리웠던 맛이다. 그간 너무 바쁜 탓에 울며 겨자먹기로 스틱 커피로 해갈하던 안나에겐 가뭄에 내린 촉촉한 단비와도 같았다.
그렇기에 한 모금 더 홀짝였는데, 흘깃 쳐다본 나영의 낯빛이 창백하리만큼 굳어있었다.
"…왜?"
"아… 미안해.. 언니."
"으..응? 아…니… 뭐…."
단지 두 모금 홀짝였을 뿐인데.
짙은 늪에 빠지는 것마냥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했고.
이내 잠에 들듯 정신마저 몽롱해져간다.
ㅡ쨍그랑!
급히 테이블을 잡으며 일어서려다 엎질러진 커피잔이 어둠에 잠식되어가던 고막을 강타한다.
하지만… 이미 잠식이 시작된 정신은 깨어나질 못했다.
비틀비틀, 안나가 만취된 취객마냥 테이블을 잡고 의자를 잡으며 안간힘을 써보지만.
마치 바닥에서 나온 촉수가 온 몸을 휘감고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나, 나영아… 이게.. 무슨…"
헤어나올 수 없음을 직감한 안나가 바닥에 엎어지며 나영을 부른다.
하지만 그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 그리고 이곳으로 오며 가슴에 품었었던 기대감은 절망감으로 탈바꿈해 심장을 할퀸다.
나영이가, 자신이 알던 나영이가 이런 짓을 벌일 줄이야.
"언니.. 미안해.. 미안해… 어쩔 수 없었어… 군단장님의 명령이야…"
"아.. 나영아…"
원망이 섞인 목소리가 힘겹게 목구멍을 타고 나온다.
슬쩍 들어본 시선에 나영이 테이블에 고개를 박은 채로 얼굴을 감싸고는 떨고 있었다.
"왜… 대체 왜…"
그때, 카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안나가 구호를 청하기 위해 고개를 틀었지만, 시야에 잡힌 건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순백의 얼굴이었다.
자신을 음해하고, 미녀사총사 파티의 몰락을 사실상 이끈 장본인.
신나희였다.
"킥킥, 거봐요 잘할 수 있잖아요?"
그녀가 표독스레 웃으며 다가와서는 독에 마비된 듯 굳은 안나의 곁에 섰다.
그리곤 한껏 조롱 섞인 미소를 지으며 구경하듯 내려본다.
"킥킥킥. 보기 좋네요. 그러게 왜 우릴 버린 거에요? 이것도 다 자업자득이에요~"
"이… 나쁜…"
안나가 힘겹게 손을 내뻗어보지만, 꿈 속에서 움직이는 것마냥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나희가 가소로운듯 콧방귀를 뀌며 그 손을 뿌리쳤다.
"아… 강준…아…"
결국 안나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강준의 이름을 읊조리는 것 밖에 없었다.
잠에 들듯 희뿌옇게 번져가던 시야가 이내, 불이 꺼지듯 암전되고 말았다.
ㅡ풀썩…
**
"으음…"
외마디 신음과 함께 눈을 뜬 안나.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우둘투둘한 바닥과 종유석, 그리고 박쥐들이 날아다닐 법한 어둑한 돌벽들이 보였다.
거기다 몸 속에서 느껴지는 마나까지.
아무래도 던전인 듯했다.
'젠장..! 이것들이 무슨 짓을..!'
당장의 위협이 없음을 인지한 안나가 급히 몸을 일으키려했는데, [ 흑! ]하는 숨소리와 함께 펴질려던 무릎이 다시 굽혀지고 만다.
커다란 족쇄였다.
참수형에라도 처하듯, 양 팔목을 바닥과 묶은 족쇄였는데, 힘을 줘봐도 두툼한 체인은 끊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설마…! 마력제억석으로 만든 거야..?!'
마력제억석.
말 그대로 몬스터 혹은 헌터들의 마력을 억제하기 위한 것으로 일시적으로 상위 보스몹의 공격력을 낮추거나, 위급상황에서 헌터들이 기척을 숨기기 위해서 사용되곤했다.
지금처럼 헌터를 속박하기 위해 사용된 적은 없었건만.
거기다 사용량으로 보아 족히 하루 이상은 지속될 듯했었다.
던전에서 마력억제를 당한 채 속박까지.
불길한 낌새에 안나가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고, 뒤편에서 요사스레 웃고 있는 나희가 보였다.
"야! 신나희! 이거 어서 안 풀어!?"
안나가 으르렁대며 겁박을 해보지만, 나희는 뭐가 즐거운지 바위에 걸터앉은 채로 웃을 뿐이었다.
"킥킥킥, 그러니까 매니저 같은 하찮은 놈한테 무릎을 꿇고 그래요. 헌터로써 위신도 없으신가~ 그러니 그런 꼴이나 당하고 사는 거에요. 유안나씨."
"너 미쳤어!? 이러고도 무사할 거라 생각해?!"
"풉,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되시나보네. 그러니 일개 길드 따위나 맡지. 이제 서로 존중 좀 해주시죠? 곧 하얀 깃발 수호단의 힐러가 될 몸인데?"
자랑스러운듯 턱을 치켜들며 거드름대는 신나희.
하얀 깃발 수호단에 입단한다는 건 대한민국에서 헌터로써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영광이었다.
그 영광을 약속 받은 그녀에게 이제 유안나 쯤은 일개 헌터 따위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
"무, 무슨 소리야! 너 같은 게 어떻게 거기를..!"
"킥킥, 믿기지 않겠죠~? 이제 전 대헌터군단장님 라인을 탄다니까요? 그러니 일개 헌터 따위는 저에게 경외심을 가지셔야해요. 호호호!"
날카로운 웃음소리가 동굴 가득 퍼져나간다.
자신을 업신여기고, 자신을 속인 댓가를 톡톡히 치르게해주겠다는듯 한껏 높아진 콧대.
하지만 이내, 그 콧대 위로 또 다른 웃음소리가 울려퍼진다.
"푸핫..! 푸하하핫ㅡ!"
되레 더 큰 웃음을 터뜨리는 안나에 나희가 심기가 불편한듯 인상을 구겼다.
"…뭐죠? 미치신 건가요?"
"푸하핫..! 웃기잖아. 지금 잡은 게 썩은 동앗줄인 줄도 모르고 나대는 꼴이."
"썩은 동앗줄…? 그, 그게 무슨 소리죠?"
"그때나 지금이나 바보 같은 건 여전하네. 어젯밤에 강준이가 대통령 호출을 받았었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아?"
한순간에 역전되버린 분위기에 신나희가 표독스레 눈을 뜨며 바위에서 일어섰다.
"무, 무슨 소리냐고요!"
"대헌터군단장이 파면된다는 의미지. 어떤 식일지는 강준이가 알겠지만은.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라인 잘못 탔다는 거야. 그것도 아주 제대로."
신나희가 발끈하며 소리쳤다.
"허, 허튼 소리 집어치워요!! 그리고 만에하나 일이 잘못되도 전 그저 상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며 군단장님께서 보호해주기로 하셨거든요!?"
"푸훗. 누가 누굴 보호해준다는 거야? 정신차려. 넌 지금 이용 당하고 있는 거라고."
거듭된 비웃음에, 신나희가 단도를 꺼내들었다.
부정하고픈 현실을 차단하려는 발악이었다.
"하, 개소리 더 이상 못 들어주겠네요. 어차피 여기서 매몰사 처리될 목숨인데 주둥이는 좀 찢어놔도 되겠죠?"
"…뭐? 매몰사?"
“풋, 이제야 상황파악이 되시나요? 당신과 이강준 그 개새끼는 마나핵의 폭발로 인해 무너진 던전에서 매몰사 처리되는 거라구요.”
볼을 긋는 듯한 시늉을 한 신나희가 섬뜩히 웃으며 다가왔다.
서슬퍼런 미소에 안나가 본능적으로 뒷걸음질을 쳐보지만, 이내 사슬에 묶인 발은 도망을 윤허하지 않는다.
제 아무리 S급 탱커라하더라도, 속박당한 상태에서 칼을 든 S급 힐러를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나, 나희야! 그만둬!”
“킥킥, 이제야 주둥이를 좀 다물 생각이 드시나요?”
하지만 나희는 좀체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마치 실성한 사람마냥, 킬킬거리며 다가온 나희가 한 손으로 안나의 머리채를 젖혀 잡고는 칼을 뺨에 갖다댔다. 섬뜩한 냉기가 볼에 느껴지자 안나의 안색마저 차갑게 식는다.
“이, 이러지마..! 넌 그저 이용당하는 것 뿐이라고..! 정신 차려..! 제발!”
“킥킥킥, 입 다무세요. 고운 주둥이 찢어버리기 전에.”
안나의 볼을 짓누르는 칼끝이 점점 파고들기 시작한다.
“그, 그만둬어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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