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9)무너지는 대헌터군단장
"아, 안녕하세요.. 강준이 덕분에 가입하게 된 이사벨라라고 합니다.."
가냘픈 소녀마냥 파리하게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는 벨라.
`부길드장`실에 앉아 업무를 처리하던 서윤이 서류를 덮고는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쇼파로 다가가며 벨라에게도 착석을 권했다.
"앉으세요. 길드장님께 미리 얘기 들었었어요. 그.. 사연도 들었고요."
"아… 넵.."
그녀가 말한 사연이 어떤 사연인지 알기에, 벨라는 죽을 죄를 지은 것마냥 고개를 숙여야했다.
잠시 안쓰레 그녀를 바라보던 서윤이 입을 열었다.
"흠, 일단 가입은 환영해요."
"아? 네, 넵. 감사합니다…"
"벨라씨는 강준이, 아니.. 길드장님과 오래 사겼던 연인사이였죠?"
"네? 아, 넷.. 그치만 오래 전에 헤어졌어요."
"알고 있어요. 혹시 길드장님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나요?"
"네..? 무슨…"
벨라를 바라보는 서윤의 눈은 첨예했다. 탐탁지 않게 보는 듯도 했는데, 그 눈빛에 벨라의 어깨는 한없이 우그러든다.
"벨라씨도 아시죠? 헌터들에겐 일부다처제, 일처다부제가 허용된다는 거."
"네…? 아, 알고는 있어요. 근데 그걸 왜..?"
서윤이 기세등등히 어여쁜 미소를 지었다.
"제가 강준이의 정실이거든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혹시나 싶어서 확실히 해두려는 거에요."
굴러들어온 돌은 박힌 돌을 뺄 수 없다고 으름장을 놓는 서윤에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벨라가 이내 깨달았다는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 그럼요! 전 강준이 아니, 길드장님께 마음 없어요..! 이렇게 가입시켜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데 제가 어떻게..!"
"호호호, 그렇담 다행이네요."
벨라의 생각을 확인한 서윤이 곱게 웃는다. 벨라가 만약 처세술의 달인이라면 모를까, 거짓 없는 진실된 모습에 한시름 놓은 서윤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길드 가입 승인서였다.
"여기 가입 승인서에요. 이제 벨라씨도 저희와 한 식구랍니다. 초면에 무례하게 굴어서 죄송해요. 안나 그 기지배, 아니.. 호호 입에 참 안 붙는다니까. 유안나 총괄책임도 많이 걱정하더라고요. 혹시나 옛감정에 벨라씨를 데려온 게 아닐까 하구요.. 그래서 그만.."
"아, 거, 걱정마셔요..! 그런 일 절대 없어욧..!"
벨라가 걱정말라는듯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감히 제 주제가 무어라고 이강준이란 사람의 옆자리를 탐하겠는가.
그건 정말이지 파렴치하고 안일한 생각이라 여기고 있는 그녀에게 서윤과 안나의 걱정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서윤이 만연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길드장님께서 부탁하신 일들에 대해서도 말씀드릴게요."
"네…? 부탁하신 일요?"
"저희 어가이브 길드의 모토는 가화만사성이랍니다. 가정의 행복이 일의 성공으로 이어진다는 뜻이죠."
"그건.. 아는데.. 그걸 왜..?"
"다름이아니라, 지금 아버님께서 강원교도소에 계시죠? 출소는 다음 달이시구요."
"네, 넵. 맞습니다.."
아버지의 얘기에 가을벼마냥 저절로 고개를 숙이는 벨라. 자신 때문에 혹여나 어가이브에 피해가 가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만연해보였다.
그에 서윤이 벨라의 손등에 손을 살며시 포갰다. 놀란 눈으로 서윤을 쳐다보는 벨라.
"부, 부길드장님.."
"그런 표정 짓지 말아요. 어가이브의 일원이 된 이상, 벨라씨의 일은 저희의 일이니까요."
"부, 부길드장님… 감사해요.."
그녀의 따스한 위로에 일순간 왠지모를 감정이 북받쳐올랐고, 벨라의 눈동자가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이제껏 사회에서 모진 일만 당했던 그녀에게, 든든한 아군이 생긴 듯한 느낌은 감격 그 자체였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그것을 아는지 서윤이 벨라의 쇼파에 앉으며 등을 따스히 쓰다듬는다.
"울지말아요. 그간 마음 고생이 심했죠? 이제 우리 어가이브에서 날개를 펼쳐봐요. 알아보니까 잠재력이 상당하던데요? 힐의 순도만 봤을 땐 솔직히 A급에 준하는 수준이에요."
"과, 과찬이셔요…"
벨라도 알고 있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해선.
하지만 로열티 길드는 왜인진 모르겠지만 진급시험을 막고 있었고, 그탓에 진급을 하지 못했었던 것이었다.
"조금 놀랐어요. 잠재력이 그리 높을 줄이야. 능력 개화만 한번 더 하면 A급은 수월하게 올라갈 거에요. 우리가 도와줄게요."
"흐윽… 부길드장님.. 감사해요.. 정말 감사해요…"
사회에 나와 처음 느껴보는 따스함에, 벨라는 눈물을 훔쳐야했다.
서윤이 짓궂은 미소를 지었다.
"호호, 벌써 그리 울면 안 되는데. 사실 길드장님이 부탁하신 건 아직 얘기도 안 꺼냈는 걸요."
그녀의 말에 눈 주변이 벌개진 벨라가 어안벙벙한듯 고개를 들었다.
"네…? 그게 무슨…?"
"가화만사성 말씀드렸죠? 벨라씨가 훈련에 매진할 수 있게끔 길드 측에서 그 악의적인 보도글에 대해서 엄중히 대응할 것이며, 벨라씨의 존엄을 회복하는 데에 모든 역량을 집중할 거에요."
"네, 네?"
"그리고 아버님 출소하신 후에 살 집도 마련해드릴 겁니다. 또 그리고 아버님께서 동의하신다면, 저희 어가이브 길드에서 일하실 수 있게끔 도와드릴 거구요. 사회로의 복귀를 도와드리는 거죠."
"네, 네…? 아니, 대, 대체 왜요…?"
꿈만 같은 말들에, 벨라가 살짝은 경계심 섞인 어투로 물었다.
대가 없는 호의가 없다는 걸 로열티 길드에서 뼈저리게 느꼈었던 그녀니까.
작은 호의에도 큰 대가를 뜯어가는게 사회가 아니던가.
1을 주면 10을 가져가려하는 게 사회지 않던가.
그렇기에 벨라의 귀에는 그저 달콤한 감언이설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서윤은 그저 미소지을 뿐이었다.
"호호, 놀라지말아요. 물론 아버님과 살게 될 집은 무이자로 가불해드리는 거에요~ 우리 어가이브에서 열심히 레이드 뛰어서 갚으시면 돼요. 물론 그렇다해서 무리하면 안 되구요."
가불?
무이자 가불이라면 오히려 자신에게 좋은 조건이지 않은가.
은행에 빌려도 몇 프로의 이자가 기본인데다, 100퍼센트 대출도 안 되는데 말이다.
로열티 길드에 있으며 착취만 당해 수중에 남은 돈은 거의 없었었다.
그렇기에 사실상 은행권 대출로 집을 마련하는 건 불가능이었었고.
이내 벨라의 붉은빛 눈동자에 감격이 다시금 벅차오른다.
벨라가 와락 서윤을 안았다.
자신을 위해 몇 년의 세월을 바친 아버지를 모시게 될 집 한 채 마련하지 못한 게 마음의 죄가 되고 있었던 그녀에게.
어가이브의 도움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선물이었었다.
"흐아앙..! 감사해요..! 부길드장님 감사해요..!"
서윤이 토닥토닥, 벨라의 등을 다독이며 지그시 웃었다.
"제가 한 게 아닌 걸요. 모두 길드장님의 뜻이랍니다. 길드장님께 감사인사드리도록 하세요."
**
졸업인데 뭐 어쩌라고.
헌터의 입학과 자퇴는 자유 의사이고, 난 그저 자유 의사를 표현할 뿐이다.
물론 학장에게는 조금은 미안한 감정이 들지만, 이강호의 옆에서 간신배마냥 히죽대는 걸 떠올릴 때면 그 감정도 쏙 들어가고 만다.
애타게 들리는 학장의 부름을 뒤로한 채, 문을 닫고 나온 난 곧장 길드로 향하려했다.
아무래도 안나 누나와 서윤 누나에게 먼저 알려야할 듯했다.
졸업이 늦어질 것 같다고.
함께 레이드 뛰고 싶어하던 누나들의 눈빛이 아른거리지만 어쩌겠는가.
이대로 졸업하게되면 이강호 저 인간의 호의를 인정하는 셈이 되는 꼴인데, 그건 목에 칼이 드리워도 할 수 없었다.
어머니의 원수이자, 우리의 원수인 놈의 호의는 잘근잘근 짓밟아야만 할 테니까.
그렇기에 길드로 가기 위해 복도로 나섰는데, 학장실 문이 쾅! 하고 열리며 진노한 음성이 쩌렁하게 울린다.
"이강준 헌터ㅡ!"
호랑이의 기백이 고스란히 터져나오는, 단전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올린 그 음성.
코찔찔이 헌터가 들었다면 당장이고 오금이 저릴 만큼, 극대노한 음성이었지만.
애석하게도 난 오금은 고사하고 가소로운 콧방귀만 나올 뿐이었다.
그래, 이쯤에서 한번 직접 움직여주셔야지.
발등에 불이 떨어지다못해 발이 활활 타오르고 있을 텐데 말이다.
마신 강림 전조현상도 그렇지만.
현재 그에 대한 여론은 최악이었었다.
왜?
내가 손을 좀 써놨었거든.
일전에 얘기했듯, 안나 누나의 아버지는 야당 대표였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그는 딸바보였었고.
권력계 거물급 인사에 딸바보. 그 카테고리를 적절히 활용하기로 한 우린, 메이저급 언론사에 소소한 요청을 해두었었다.
물론 특혜를 누리지 않겠다는 나의 신념과는 다소 상이한 처사기는 했지만.
괴물을 잡기 위해선 괴물이 되어야하듯, 놈을 상대하는 것에 대해선 그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당연히 그 과정에서 선의의 피해자는 절대 나와서는 안 되었기에 만전에 만전을 기하고 있었고.
여하튼 그런 대비 덕에 이강호가 꺼내든, 거짓으로 짜여진 구구절절한 각본은 되레 민중의 분노를 부추기기만 했고, 결국 그의 발등은 지금 불에 타고 있는 것이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했다.
괜스레 잔대가리를 굴리려다 역풍을 맞은 놈이 나를 불렀고.
친히 걸음을 멈추어주었다.
"왜 부르시죠?"
비아냥대는 듯한 물음에 놈의 표정은 더욱 험상궂게 굳는다.
"…어리석은 짓 하지 말거라. 다음 차수 재시험 전에 마신이 강림하기라도 한다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입술을 삐죽 내밀며 남일이라는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서요? 그게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넌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이고, 국가의 발전을 위해 이바지할 의무가 있다."
피식, 조소를 터뜨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웃기는 소리 잘도 지껄이시네. 전공이 개그 쪽이셨습니까? 그러는 당신은 자식의 발전을 위해 이바지할 아버지의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셨습니까?"
타점이 정확한, 날카롭고 치명적인 맹공에 놈이 주춤한다.
할 말 없겠지.
이행은 고사하고 내팽개쳤었으니까.
그런 자신이 이젠 타인에게 의무를 강요하고 있으니, 그 모순적인 꼴이 이제야 조금 실감나는 표정이다.
그것을 반증하듯, 노기가 살짝 사그라든다.
"…후.. 과거에 그렇게 미련을 둬서 어찌 앞을 보겠느냐. 그만 잊거라. 그때는 미안했다."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군.
저리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사과를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미안하다라.. 진심입니까?"
"그래. 그때는 내가 어리석었다. 변명하지 않으마. 사과할 터이니, 이제 그만 신경전을 끝내자꾸나. 우리 대헌터군단엔 꼭 니가 필요하다."
"아~ 진심이셨어요? 진심이 안 느껴져서 몰랐네."
제 입장에선 99번 양보해 사과를 한 것일 테지만, 이따위 말장난식 사과나 듣자고 이러는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비아냥으로 일관하자, 이내 놈이 한숨을 내쉰다.
"후… 대체 어떡하란 거냐. 진짜 이 아비가 자식 앞에서 무릎 꿇기라도 바라는 것이냐?"
"네."
씨바, 당근빳따지.
무릎 꿇을 때도 할복하는 사무라이마냥 무릎이 으개질 정도로 털썩 주저앉으라며 추가사항까지 달고 싶은 마당인데.
나의 단호한 대답에 놈이 또 다시 한숨을 내쉰다.
그래.
이제는 니까짓게 할 수 있는 거라곤 한숨 뿐이겠지.
다소 누그러진 놈이 나를 타이르듯 말한다.
"후… 사나이는 대범해야하며 큰 그릇을 가져야 큰 뜻을 담을 수가 있다. 고작 이 아비를 무릎 꿇게 만드는 걸로 만족하겠다는 것이냐."
"그건 제가 정합니다. 어떻게 하시냐에 따라 달렸죠. 하시는 거 봐서 하얀 깃발 수호단에 입단할지 말지 결정하겠습니다."
물론 개풀 뜯어먹는 소리다.
내가 그딴 곳에 들어갈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내게도 강력한 팀원들이 있는데.
따지고 보면 공교롭게도 각 포지션이 갖춰져 있었다.
원딜 유서윤.
근딜 배지민.
탱커 유안나.
힐러 이사벨라.
거기에 버퍼 이강준.
물론 지민이와 벨라의 전투력은 아직 많이 부족한 상태이지만, 길드 차원에서 투자를 쏟아 특급 케어를 통해 폭등업시키면 되는 일이었다.
금전이 조금 들어갈 뿐.
수련의 영약 1개가 2천만원인가 그랬지.
B등급에서 A등급까지 대략 필요한 갯수가 100개인가 그랬으니, 으음…
아니 뭐, 당장 마신 토벌 여정에 오르는 것도 아니니까, 그전에만 지민이와 벨라를 폭등시킨다면 대한민국 최초로 마신 토벌에 성공한 멤버가 전원 `어가이브`길드원이 될 수도 있지 않은가.
게다가 하얀 깃발 수호단에서도 최정예멤버들 중 상당수가 이강호의 피를 받은 것들이었다.
즉, 나와 같은 혈육이라는 것.
다른 것은 그들은 자연 각성에 성공했다는 것이고.
그들이 내게 해악을 끼친 것은 없지만, 그렇다해서 서로 살갑게 살을 부대끼며 하하호호 레이드를 뛸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그들의 성공은 곧, 이강호의 성공이 되는 꼴이니까.
고로 마신 토벌전에 참여한다해도 내가 만든 파티로 참여한다는 것이지, 절대 하얀 깃발 수호단의 어깨에 힘을 실어줄 생각은 없었다.
"…."
답이 없는 제안이지만, 그걸 알 리 없는 이강호가 묵묵히 나를 쳐다본다.
심적 고뇌가 두 파벌로 나뉘어 마음 속에서 싸우고 있는 모양이다.
《 까짓 꺼 무릎 한번 꿇고 원하는 걸 얻자고. 》
《 그래도 군단장의 위신이 있지. 굽혀서는 안 된다. 》
쯤 정도겠지.
뭐가 됐든 결과는 마찬가지일 텐데, 어쩌나.
잠시 그 고뇌의 흔적들을 즐기며 기다리고 있자,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긴 놈의 상체가...
이내.
시선 아래로 쑥 내려간다.
ㅡ쿵!
어…
진짜 꿇는다고…?
그것도 아카데미 복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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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