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헌터 매니저는 때려치웁니다-54화 (54/68)

EP.53)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인데?

**

ㅡ짠!

오랜만에 가지는 소중한 사람들과의 회식자리.

아니지, 길드 창설 이래 가지는 첫 회식자리에 서윤 누나와 안나 누나는 들뜬 표정으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물론 나 역시 간만에 누나들과의 음주 데이트에 설레었고.

ㅡ짠!

“어가이브를 위하여~!”

“강준이를 위하여~!”

“누나들을 위하여~!”

통일되지 못한, 저마다 건배사를 내뱉으며 모처럼의 휴식을 즐기는 우리.

이제 워낙 유명인사들이 되다보니, 사람들의 이목에서 자유로운 하우스에서 시작된 조촐한 회식은 그렇게 무르익으며.

서로의 얼굴은 붉어져갔다.

안나 누난 알콜 해독 능력이 뛰어난지, 오히려 얼굴이 더 하얘지는 것 같다.

분홍빛 머리칼과 대비된 뽀얀 피부가 한층 미모를 어여쁘게 만든다.

서윤 누난 늘 그랬던 대로 예쁜 물감을 칠한듯, 붉어져갔고.

이따금씩 퓌유, 퓌유라며 볼을 부풀리며 한숨을 내쉬는게 어찌나 귀여운지 모르겠다.

그런 모습에 요즘들어 흔한 밥 한끼하지 못했던 것이 실감되어왔다.

그래, 역시 아무리 바빠도 내 사람들은 챙겨야지. 잔을 들며 오늘의 영광을 누나들에게로 돌렸다.

“누나들 너무 고생 많았어요. 누나들 아니었으면 우리 어가이브가 이만큼 성장 못했을 거 같아. 모두 누나들 덕이야.”

“호호, 강준씨를 위해서라면 이정도는 일도 아냐. 그보다 이제 곧 졸업이네? 조 편성은 잘 된 것 같아?”

“뭐.. 아직은 인사 밖에 안 해서 잘 모르겠어. 내일 미팅 해보면 대충 알겠지.”

“근데 뭐~ 우리 길드장님께서 솔로캐리하실 건데 조원이 정신 나간 트롤짓만 안 하면 무난하게 클리어할 거야. 난 믿어.”

안나 누나가 복돋아주며 싱긋 윙크를 한다.

사실 걱정은 1도 안 하고 있었다.

알렉스에게 배운 스킬과 자버프만 있어도 E급 던전 쯤은 맨주먹으로도 클리어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고마워.”

그에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서윤 누나를 쳐다보았다.

술이 조금 들어간 후부터 뭔가 울적도 해보이는 그녀에, 넌지시 말을 건넸다.

“오늘 우리 서윤 누나가 조용하네~? 이렇게 조용할 사람이 아닌데~”

익살스레 놀리듯 말했는데, 멍하니 있던 누나가 나를 쳐다보며 웃었다.

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어색한 웃음이라는 것을.

“히히, 아냐. 그냥 조금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어.”

“생각? 뭔데? 우리 부길드장님께서 설마 길드를 나와서도 길드 생각 뿐이신감~?”

“핏, 아니거든?”

“그럼 뭐길래 술 마시다말고 그렇게 생각에 잠겨? 우리 사이에 말 못할 게 뭐 있다구. 어서 말해봐, 궁금하게.”

나의 재촉에 술잔 속 얼음을 돌리며 머뭇대던 서윤 누나가 결심한 듯 표정을 굳히며 고개를 들었다.

헌데 그녀의 입술 사이로 나온, 살짝은 회한에 찬 물음은 내 심장을 덜컥 멎게 만들었다.

“…우리 사이?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인데..?”

**

어…

으음…

우리 사이가 무슨 사이라, 깜빡이 없이 불현듯 나타난 질문에 두 눈을 끔뻑여야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사이를 무슨 사이라 명명해야되지? 썸? 연인? 부부? 일단 부부는 아닐 터다. 혼인신고도, 프로포즈도 하지 않았으니까.

연인사이도 공식적이지 못하고.

그렇다해서 썸이라고 하기엔 더 깊은 사이이고.

서로 사랑하지만, 그 마음을 표현하지 않은 채 동거를 하고 있는 사이를 뭐라고 부르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는다. 연애젬병인 내겐 너무 어려운 질문이었다.

으음, 아무래도 요즘 바빴던 터라 신경을 써주지 못했던 게 화근이 된 모양이겠지.

누나의 물음이 어떤 의중을 내포하고 있는지 알 것 같기에, 뭐라 답장을 내놓으려던 찰나.

누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미안. 취했나봐… 괜한 소리를. 나 바람 좀 쐬고 올게…”

그리곤 휙 바깥으로 나가버리는 서윤 누나에 안나 누나와 난 눈빛을 마주쳐야했다.

둘 다 잘 알고 있었다.

서윤 누난 전혀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헌데 어안벙벙한 나와는 달리, 안나 누난 올 것이 왔다는 눈치였다.

“누나.. 무슨 일 있었어?”

“뭐… 더 이상 숨기진 않을게. 그간 맘고생 좀 했을 거야.”

“서윤 누나가..?”

“그럼, 강준 씨가 멋진 헌터가 되면 정식으로 고백하기로 했다면서?”

잊지 않고 있었다.

그 약속을 어찌 잊겠는가.

하지만 우리의 미래계획을 위해 그 고백은 잠시 미뤄두기로한 것이었다.

이강호를 당면한 이상, 그를 처리하기 전에는 관계에 대해 조심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조금은 신경을 쓰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약속은 잊지 않았어. 단지 지금은 위험한 시기이기도 하고, 이강호가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르기도 해서..”

“알아. 강준 씨 마음. 우릴 위해서 그간 선을 지키고 있었다는 거. 나는 그 마음 이해하는데, 아무래도 서윤이는 그게 힘들었나봐.”

“아… 그렇구나. 전혀 눈치 못 채고 있었어. 누나라도 좀 귀띔해주지.”

원망하듯 볼멘소리로 읊어봤지만.

안나 누난 과거로 돌아가도 절대 귀띔하지 않겠다는듯, 단호하게도 거절했다.

“나도 강준씨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았어. 그래서.. 나름대로 마음을 풀어주려 노력해봤는데, 알잖아. 강준씨도. 서윤이가 오래 전부터 짝사랑해왔던 거.”

복잡하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한다는 거지?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당장 누나에게 고백을 하고 공식적인 사이를 공헌했겠지만, 그 고백이 행여나 누나를 위험하게 만들까봐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이강호라면 주변사람을 건들 가능성이 농후한 쓰레기니까.

그렇다해서 서윤 누나를 절대 책망하지는 않는다. 누나에게 많은 사랑을 받은 만큼, 되돌려주지 못한 것 같아 마음이 착잡할 뿐.

아, 그러고보니 안나 누나라면 작금의 세태를 타개할 방법을 알지 않을까?

“누나.”

술을 들이킨 안나 누나가 장난스레 말을 받았다.

“왜 부르시나용, 길드장님.”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누나든, 서윤 누나든 그 누구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훗.”

그 물음에, 가여운 동생을 보듯 미소를 지은 채 눈끝을 내리며 나를 쳐다보는 안나 누나.

그리곤 현관 쪽으로 고개를 까딱하며 말했다.

“뭐해, 어서 안 따라가구. 마음 가는대로 해줘.”

“…아.”

안나 누나의 말에 뭔가에 맞은 듯한 충격이 느껴졌고, 나는 서둘러 서윤 누나를 쫓아 나가야했다.

현관을 나서자 저 멀리 걷고 있는 서윤 누나가 보인다. 왜인지 처량해보이는 누나의 걸음에 급히 쫓아갔다.

“누나!”

“으, 응? 가, 강준아?”

내가 쫓아올지 몰랐던 건지, 부름에 어깨를 움찔 떨며 놀란 누나가 돌아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반사되어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 그리고 나를 보고는 애써 지어보이는 슬픈 미소.

누나의 모든 모습이 왜인지 애처로워보였다.

안나 누나가 그랬지.

마음 가는대로 하라고.

망설이지 않고, 서윤 누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꺗! 가, 강준아..?”

품에 쏙 들어오는 누나를 힘껏 끌어안고 누나의 머리에 얼굴을 포갰다.

익숙하고 기분 좋은, 그리고 마음이 포근해지는 누나의 체취와 샴푸내음이 코끝을 간질인다.

…아, 그래.

생각해보니 이 향기도 정말 오랜만이구나.

그간 너무 신경쓰지 못했던 것이 이 향기들로 인해 뼈저리게 느껴져왔다.

매일 같이 맡았던 누나의 향기였는데.

마치 나를 원망하듯 더욱 향긋하게 퍼지는 향기에, 울컥 미안함이 몰려왔다.

“미안했어, 누나.”

잠시 후, 서윤 누나도 내 허리를 지그시 감싸안았다.

그리고 내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

[ 로열티 길드 사무소 ]

그간 수입이 짭짤했었는지, 현관문을 바꾼 로열티 길드의 사무실엔 새 것으로 보이는 가구들과 진열장들이 들어차있었다.

“이야, 결국 계약 만료일이 왔구나 왔어?”

쇼파도 큼지막한 걸로 바꾼 로열티 길드장, 허창이 큭큭 웃어대며 이사벨라에게 종이 한 장을 밀어주었다.

좌측 쇼파에 앉아있던 그녀가 종이를 집어들었다.

[ 서약서 ]

이미 알고 있었기에 이사벨라의 얼굴은 동요심 없이 평온했다.

계약 만료 후, 외부에 로열티 길드의 기술과 영업방침을 누설하지 않는다는 서약서였었는데.

당연하게도 로열티의 악랄한 만행이 만천하에 드러나지 못하게끔 막는 장치였었다.

또 당연하게도, 계약서에는 서약서에 사인해야만 계약이 종료된다는 조항이 있었고.

마침표를 찍는 순간까지 치가 떨리는 행태였지만, 망설임 없이 사인을 한 벨라가 다시 종이를 밀었다. 어차피 누설할 생각도 없었다.

이 지옥 구덩이에서 드디어 탈출한다는 생각 뿐.

헌데 뭐가 그리 좋은지 허창이 큭큭대며 종이를 접어 자켓 주머니에 넣었다.

“이제 아쉬워서 어쩌냐~ 우리 길드 간판께서 떠나버리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마음 같아선 신랄한 육두문자를 놈의 면상판에다 쏟아버리고 싶지만.

어서 이곳을 뜨고 싶은 벨라는 마음에도 없는 인사를 전했다.

“큭큭큭.”

아쉽다는 말과는 달리, 여전히 누렁니를 뽐내며 웃어대는 허창에 벨라는 뭔가 께름칙했지만.

계약도 끝난 마당에 구태여 책 잡힐 것이 없기에 매몰차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긋지긋한 이곳도 이제 안녕이다.

허창이 앉은 채로 악수를 건넸다.

“가는 길에 악수나 한번하고 가.”

“…수고하세요.”

당연하게도 저 역겹고 더러운 손을 잡을 수 없었던 벨라는 다시금 인사를 하고는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이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거다.

로열티 같은 쓰레기 노역소가 아닌, 헌터다운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길드에서 헌터다운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곧 아버지의 출소일이 다가오기도 했기에, 늘 케케묵게 느껴지던 건물의 공기를 상쾌하게도 들이키며 거리로 나온 벨라가 무의식 중에 고개를 돌려 로열티 길드 사무소 창가를 쳐다보았다.

헌데.

창가 너머에는 허창이 헤실헤실 웃으며 손인사를 해대고 있었다.

언제 봐도 적응하기 힘든 역겨운 미소였다.

“…좆 같은 새끼.”

ㅡ퉷!

놈과 시선이 마주치자 시궁창에 빠진듯 구역감이 차오른 벨라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욕과 함께 침을 뱉고는 걸음을 돌렸다.

이제 끝이다.

놈에게 휘둘리던 것도 끝이고, 계약조항 탓에 진급시험을 보지 못해 C급 힐러로 레이드판을 전전하던 것도 이제 모두 끝이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허창의 마수는 생각보다 더 악랄하다는 것을.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굳은 표정으로 쳐다보던 허창이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귓가에 가져가며 비릿한 미소를 짓는다.

“어~ 김 기자? 그때 부탁한 거 뿌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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