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헌터 매니저는 때려치웁니다-50화 (50/68)

EP.49)불안한 마음

ㅡ무슨 짓을 해서든 니놈을 우리 수호단에 입단시킬 것이고, 마신 토벌 파티에 참여시킬 것이니 경거망동하지말아라.

놈이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엄포였다.

끝내 사과 한 마디 없이.

끝내 잘못에 대한 반성 한 마디 없이.

제 숙원을 위한 엄포만 남기고 가버린 철천지원수새끼.

저런 작자의 피가 내 몸 속에 흐른다는 것이 치욕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렇게 4년만의 재회는 예상대로 끝이났고.

난 덤덤히 이사장실을 빠져나왔다.

일말의 기대도 없었기에, 실망도 없었다.

그리고 협약방침상, 버퍼가 최초각성한 국가에 토벌우선권이 부여된다고하니, 아마 내년 마신 토벌에 대한민국이 선정될 확률이 높을 터다.

즉, 놈은 말 그대로 무슨 짓을 해서든 나를 수호단에 입단시키려할 터이고.

국가방위전력 누출을 막기 위해 헌터는 이민 또는 귀화가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었기에 아마 그것을 족쇄삼아 나를 옥죄여올 것이다.

뭐, 이미 대비하고 있는 터라 큰 걱정은 들지 않았었지만.

그리고 버퍼는 토너먼트에 참가할 자격이 없었다.

참가하지 않아도 토벌 파티 명단에 이름을 올릴 자격이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를 수호단에 입단시키려는 이유는 나를 제 뜻 대로 부리기 위해서였다.

수호단에 입단한다는 것은, 그의 명령에 절대복종해야 한다는 것이니까.

지금처럼 자율적인 의지를 상실케끔 만들어 절대적으로 마신 토벌 파티에 참가시키기 위함인 것이다.

그렇기에 난 절대 입단할 수 없는 것이고.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금 되새기며, 아카데미를 빠져나와 곧장 길드로 향했다.

아무래도 길드장인데, 훈련에 매진한답시고 자리를 오래 비우는 것은 또 아닌 듯해 길드로 향한 것이었는데.

누나들이 추려내어 건네준 길드 가입 지원서를 훑어보던 난, 한 지원서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응? 왜? 아는 사람이야?”

제법 잘 어울리는 세미정장차림으로 비서마냥 내 곁에 파일을 들고 서있던 서윤 누나의 물음에 난, 얼떨떨한 표정으로 지원서를 훑을 뿐이었다.

“얘가.. 어떻게..?”

먹물을 바른듯 짙은 흑색머리칼.

새하얀 피부에, 가는 목선, 그리고 엘프처럼 흑발을 비집고 나온 귀까지.

지원서에는 불과 어제 내게 정액을 갈구하던 그 미친년과 똑같이 생긴 여성의 사진이 붙어 있었다.

배지민.

B급 헌터.

아니, 얘 아카데미 생도가 아니라… 헌터 였다고?

배지민의 지원서를 빤히 쳐다보는게 신경쓰였는지, 서윤 누나가 내게 밀착하며 말했다.

살짝 시샘 섞인 목소리로.

“…예쁘지? 얘 뽑으면 우리 길드 홍보에 도움도 될 거 같아. 헌터 중에 이렇게 예쁜 애는 드무니까. 거기다 아버지가 서울 아카데미 이사장이더라고.”

“…알아.”

“응? 어떻게?”

“만났었으니까…”

어제의 일이, 마치 몇 년 전의 일인 것마냥 길다란 주마등으로 뇌리를 스쳐지나간다.

다짜고짜 정액을 달라던 희대의 미친년.

자기소개서에 적힌 [ 지원동기 ]가 새빨간 거짓말이고, 그 속에 숨긴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 것 같았기에.

난 지원서를 시원하게 부욱 찢어버렸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안나도 길드에 도움될 거 같다고 하던데.”

“하.. 아뇨, 얘는 절대 우리 길드에 도움될 애가 아니에요. 절대절대 받지 마세요. 알겠죠?”

“뭐… 우리 길드장님이 그렇다면 당연 탈락이겠지만, 혹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어휴, 사랑하는 우리 정실누님에게 어제 이 미친년에게 정액나눔 요청을 받았다는 얘기를 어떻게 하겠는가.

적당히 둘러대기로 했다.

“아카데미 재학시절 때 악명이 높았더라고요.”

“그렇구나… 알겠어.”

“나머지는 모두 합격시키도록 해요. 누나들이 충분히 잘 검토했겠죠 뭐.”

“알겠어. 글구 사무직원도 채용공고도 올렸어. 매니저 채용공고도. 미리 준비 안 해두면 나중에 감당하기 힘들 것 같더라구. 특히 우리 `미래계획`을 서두르려면.”

미래계획에 힘을 주는 서윤 누나에 싱긋 웃어주었다. 길드를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힘 써주는 그녀가 너무나도 고마웠다.

“고마워요. 누나를 곁에 둬서 얼마나 든든한지 몰라.”

“…쑤, 쑥스럽게 뭘. 그럼 가볼게.”

볼에 연한 홍조를 띈 서윤 누나가 서류들을 챙겨 대표실을 빠져나가려다말고는, 문 손잡이를 잡은 채 나를 돌아보았다.

“저.. 강준아.”

“응? 왜요?”

불러놓고는 잠시 머뭇대는 누나에 빤히 쳐다보고있자 특유의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젓는다.

“호호.. 아냐, 바쁠 텐데 일 봐. 필요한 거 있음 부르고.”

그리곤 문을 닫고 나가버리는 서윤 누나.

우리 사이에 말하기 힘든게 뭐가 있을까, 싶었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은 없었고.

새롭게 구상된 미래계획표를 조금 수정하기 위해, 인터넷을 켜 [ 서브게이션 협맹 ] 사이트에 접속했다.

**

대표실 밖으로 나온 서윤이 서류를 뒷짐진 채, 문 옆의 벽에 기댔다.

낮은 한숨이 가늘게 세어나왔다.

'바빠서 그렇겠지… 지금은 특히.'

강준이를 이해하려하지만, 왠지모르게 야속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자신에게 했었던 약속.

자신의 애틋한 마음을 꺼냈을 때, 강준은 `멋진 헌터가 되었을 때 고백하겠다`며 약속했었었다.

물론 그의 기준에서 멋진 헌터라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초월급 헌터에 어엿한 길드장이 된 강준이는 자신에게만큼은 그 누구보다 멋진 헌터가 되어있었었다.

그렇기에 왜인지 초조함마저 들었다.

정실정실, 장난삼아 얘기하다보니 어느새 가볍게 그 단어를 여기는 것은 아닌지.

혹여… 자신의 자리를 누군가에게 뺏기는 것은 아닌지.

그것도 아니면, 지금처럼 애매한 관계가 지속되다 굳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해서 재촉 같은 걸 할 수도 없었었다.

강준이 역시 지금 아카데미에 훈련에 길드장에 할 일이 태산처럼 많으니까.

혹여 자신의 이 불안함이 그에게 피해를 끼칠까 두려워…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언젠가.. 꼭 할 거야. 지금은 모두가 정신 없는 상태니까…'

잊지 않았을 거라 믿기로 했지만.

자신을 사랑하고 있을 거라 믿기로 했지만.

역시나 말로 듣지 않는 이상 믿음은 쉽사리 불안에 잠식될 것만 같았다.

아닐 거야.

우리 강준이는 그런 사람 아니니까.

“또 봐, 또 봐.”

그때.

안나가 서류를 들고 대표실로 다가왔고, 벽에 기대고 있던 서윤을 보곤 눈을 게슴츠레 떴다.

“뭐, 뭐가.”

“또또 무슨 사연 있는 여자처럼 그러고 있잖아.”

“…내, 내가 무슨 사연있다그래. 괜히 트집 잡지 마시고 일하셔요. 유안나 상무이사님.”

“풋, 상무이사는 무슨. 낯 간지럽게 그렇게 부르지마세요. 유서윤 전무이사님.”

안나의 너스레에 서윤이 픽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확실히 아직까진 임원직책명이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풋, 언제쯤 입에 붙으려나. 인쇄 좀 하러 가야겠다. 나중에 봐.”

“응.”

손인사를 하곤 멀어져가는 서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안나는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다소 측은한 눈빛으로.

**

ㅡ짜악!

대궐 같이 으리으리한 거실에 울려퍼지는 살과 살의 마찰음.

딱히 듣기 좋지 못한, 일방적으로 부딪히는 듯한 소리에 집주인의 방문에 일렬횡대로 서있던 가정부들의 어깨가 한번 들썩인다.

혹여 불똥이 튈까 노심초사하는 모습들.

하지만 집주인인 서울 아카데미 이사장은 가정부들의 입단속 따위는 개의치 않은 채, 제 딸의 뺨을 다시 한 번 거세게 후려쳤다.

ㅡ짜악!

기어이 다리가 풀리며 거실 대리석 바닥에 주저앉는 배지민.

얼얼한 뺨을 감싼 채, 제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흑색 동공에는, 통렬한 독기가 여전히 가득했다.

이사장이 손목시계를 풀며 눈을 부라렸다.

“하, 이게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네. 일어서.”

제 아비의 겁박에도 배지민은 입술을 앙다문 채, 호기롭게 자리에서 일어서 그를 쏘아보았다.

“눈 착하게 안 떠? 앙?!”

이사장이 검지로 지민의 이마를 밀치며 소리치지만, 오춘기에 접어든 건지.

지민은 더욱 눈에 힘을 주며 그를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그에 다시 올라온 손은 휘익! 얇은 파공음을 내며 재차 지민의 뺨을 가격한다.

어느새 새빨갛게 부풀어오른 뺨에 지민의 독기 서린 눈빛에 눈물이 차오른다.

이사장이 그녀의 관자놀이를 연거푸 밀치며 말했다.

“야이 멍청한 년아. 이제껏 먹여주고 키워줬으면 돈값은 해야될 거 아냐. 근데 이강준 환심 사라는, 그거 하나 제대로 못해서 뭐? 다짜고짜 정자를 나눠달랬다고? 그것도 강의실에서? 너 진짜 미쳤어?! 앙!?”

지민의 눈빛에 서린 독기가 기어이 참지 못하고 벌처럼 그를 쏜다.

“하라는 대로 했잖아요!! 이강준 아이를 임신하라면서요!! 하라는 대로 했는데 왜 지랄이신데요!! 걔가 하기 싫다는 걸 저보고 어떡하라고요!!”

유리컵을 깨부술듯, 날카롭게 뻗치는 지민의 악에 받진 외침.

이사장이 기가 막힌듯 헛숨을 내쉬었다.

일부러 저러는 것을 알기에, 제게 반항하기 위해. 그리고 제 얼굴에 먹칠을 하기 위해 정자나눔이란 광행을 저지른 딸에 이사장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물론 이전부터 지민의 반항기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었다.

하지만 이정도로 반항하리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후…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개망신 당했는지 알기나 해?!”

뺨 한쪽이 시뻘겋게 부풀어오른 채로, 지민이 비릿하게 웃었다.

목적을 달성했는데 어찌 웃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사회적으론 인자하고 공명정대한 이사장이란 놈이 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딸을 정액받이로 쓰려는데 어찌 순순히 가랑이를 벌리겠는가.

그렇기에 지민은 고의적으로 그랬던 것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듯, 그의 얼굴에 먹칠하기 위해.

“풋, 그럼 쫓아내시던지요. 저 같은 자식새끼 내치는게 속 편하지 않겠어요?”

“내가 많은 걸 바랬어? 그 얼굴에 그 몸매를 만든 것은 나다. 그러니 초월급 헌터 손주 정도는 내 손에 안겨줄 수 있잖아!”

물론 초월급 헌터의 정자로 태어난 아기가 초월급 헌터가 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이사장은 제 가문을 명문헌터집안으로 만들기 위해 제 딸을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자신도 하지 못한 일을 자식에게 기대하고 집착하는, 못난 부모의 전형적인 표상이 그인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지민은 더욱 바락바락 핏대를 세웠다.

“아 그래서 하라는 대로 했잖아요!! 근데 뭘 더 어쩌라고요!!”

“하라는 대로 해? 누가 다짜고짜 정자 달라고 억지부려 경찰서까지 갔다오라 했더냐!? 생각이 있어 없어! 대체 누굴 닮아 이리도 바보 같냐는 말이야!!”

“그쪽 닮아서 이럽니다! 왜! 꺄악!”

결국 화를 이기지 못한 이사장이 왼손으로 지민의 흑발을 우악스레 움켜잡고 흔들었다.

머리털이 뽑히는 고통에 지민이 급히 손으로 그의 손을 떼어내려하지만, 그의 오른손은 무자비하게 지민의 뺨을 후려친다.

ㅡ찰싹! 짜악!

“이게 진짜 오늘 너 죽고 나 죽고 해보자는 거야!? 앙!? 오냐, 오늘 누가 이기나해보자고!”

ㅡ찰싹! 찰싹!

“꺄악! 이, 이거 놔아!”

거실에 울려퍼지는 부녀의 처절한 싸움.

싸움이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폭행이었지만, 그 싸움을 지켜보는 가정부들은 눈을 질끈 감아야했다.

계약서상 집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선 무슨 일이 있어도 함구해야했었다.

비루한 월급쟁이인 그들이 계약을 어기고 막대한 위약금을 감당할 수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들은 그저 이 참담한 광경이 끝나길 빌어볼 뿐이었다.

“후우, 후우, 후우. 어디서 눈깔을 불경하게 떠. 이봐, 지금 딱 좋잖아. 응? 딸이 아버지를 볼 때는 이렇게 착한 눈을 떠야되는 거야, 알겠어?”

부풀어오른 뺨에서 핏물이 베어나오고나서야 손찌검을 멈춘 이사장이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바닥에 반쯤 쓰러진 지민을 내려다보았다.

평소 지민을 아끼는 가정부 몇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며 핏물을 닦아주었다.

이사장이 가정부들을 아우르며 명했다.

“이 년 어디 못가게하고, 방에 딱 가둬놔. 붓기 가라앉게하고.”

““네..””

지민이 반쯤 풀린 눈으로 이사장을 올려다보았다.

이사장이 가정부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니년 애미 봐봐, 응? 어떻게든 내 아기씨를 훔쳐가서 널 낳기라도 하니까, 죽을 병에 걸려도 살아있는 거 아냐, 안 그래? 그러니까 니년 애미 살리고 싶거든. 너도 아기씨 훔쳐와, 알겠어?”

지민의 흐릿한 눈가에 얇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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