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7)나나 듀엣 결성 & 이강호와의 접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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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짧은 한숨이 터져나왔다.
이면보기가 아니었으면 저 연기에 깜빡 속아 용서를 해줬을 테고, 그럼 희희낙낙대며 가온 길드장에게 인정을 받았겠지?
등신처럼 속아버린 나를 매도하며?
진짜 역겹기 짝이 없는 년이다.
원초적인 본능에 투철한 년인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앞뒤가 다른 년일 줄이야.
뭐 어쨌든, 내게 들통나버리고 말았긴하지만 말이다.
조폭두목이라도 알현한듯, 도게자로 대가리를 박고 있는 박나영.
이제와 자세히 보니 주먹 쥔 두 손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하등종이라 여기던 내가 선사한 능멸에 울분을 삭히느라 그런 것일 터.
더 이상 귀한 시간을 할애해줄 필요는 없을 듯했다.
“일어서.”
“훌쩍.. 요, 용서해주는 거야?”
헌데 콧물까지 훌쩍이며 일어서는 박나영에 기가 막힐 수밖에 없었다.
이정도 열정이면 용서해주는 게 오히려 낫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대단한 연기력이다.
하지만 이면보기로 그녀의 진심을 봐버린 이상, 자비는 더 이상 사치였다.
“하.. 진짜 어이가 없네, 어이가.”
“왜, 왜.. 그러는데..?”
“됐고, 그냥 꺼져. 더 험한 꼴 보기 싫으면.”
“뭐, 뭐라고?”
그녀에게 나름대로 정중하게(?) 퇴장을 권유했는데, 역시나 그녀 입장에선 황당할 수밖에 없을 듯했다.
하라는 대로 하랬더니 꺼지라는데 황당한 게 당연하겠지. 하지만 구태여 퇴장 권유 사유에 대해서 언급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이면보기라는 특이특성을 오픈하는 건 장기적으로 봤을 때 분명 득보단 실이 많을 테니까.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박나영의 미간에 대문자 W가 새겨진다.
“...용서해준다며, 용서한다며! 그래서 도게자까지 했는데 뭐라고? 꺼지라고? 지금 장난해?”
역시, 인내심이 깊지는 않군.
바락바락 핏대를 세우는 박나영에 어깨만 으쓱해보였다.
“뭐, 그건 용서하는 사람 마음 아닌가? 용서도 너한테 허락 받아가며 해줘야해?”
“아니 그건 아닌데..! 용서해주기로 약속했잖아! 그래서 무릎도 꿇은 건데 이러면 어떡하냐고!”
“그말인즉슨 진심으로 사과하기보단, 그저 용서 받기 위해서 무릎 꿇었다는 거네?”
“..아,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한다는 거지! 사과했잖아! 용서하라고!!”
용서를 강요하는 모습에 콧방귀가 나올 수밖에 없었다.
3년간 내게 약속은 지키지 않아야 제 맛인 법! 이라며 가위바위보든, 보리쌀 게임이든 죄다 제멋대로 할 때는 언제고.
이제와 약속을 운운한다고?
점점 내면의 인내심이 아작나려한다.
“좆 같은 소리 계속 할 거면 그냥 꺼지라고. 아니면, 뒤돌아줄 테니까 뒷모가지부터 척추까지 그어볼래?”
호기롭게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채 고개를 꺾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당혹스러운듯 한걸음 물러서는 박나영.
제 생각을 관통하는 나의 말에 제법 놀란 듯했다.
“무, 무슨 소리야 그게. 그, 그럴 생각 없거든..?”
“왜? 그러고 싶은 거 아녔어? 눈을 좆같게 뜨길래 무릎 꿇은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었다! 라면서 칼질이라도할 줄 알았지.”
“그, 그딴 장난치지마! 용서도 안 해줄 거면서 여기로 왜 오라고 한 건데! 짜증나게!”
나의 조롱 섞인 너스레에 서서히 얼굴을 붉히며 본색을 드러내는 박나영에 조소를 흘렸다.
몸을 다시 돌려, 한걸음 다가갔다.
“용서도 안 해줄 거면서 왜 불렀냐라.. 이번 년에 들었던 얘기 중에 개씹소리 랭킹 탑에 들 얘기네. 그럼 넌 사과도 안 할 거면서 왜 온 건데?”
“아니 난 진심으로 사과했다고! 근데 니가 갑자기 지랄하는 거잖아!”
진심?
지금 그녀의 머리 위에 떠있는 상태창의 하단 줄에는 이러한 문구가 적혀 있었다.
.
.
[ 이 씨발새끼가 진짜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초월급만 아니었으면 배빵 놨다진짜!! 어디 감히 나한테 이래라저래라야!! ]
이러니 내가 어찌 웃지 않고 배길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미안하지만 초월급 아니었다면 너랑 마나 필드에서 마주쳤을 일도 없을 텐데?
하여튼 저지능성격지랄충의 짧은 생각은 알아줘야한다니까.
같은 급도 아닌데 미쳤다고 S급 헌터의 성질머리를 마나 필드에서 돋우겠는가.
성큼, 한걸음 다가가자 박나영은 급히 한걸음 물러난다.
하지만 자존심이라도 세우고픈지 기세를 수그리지는 않았다.
“역겨우니까 꺼지라고, 말귀도 못 알아듣냐? 아니면 몸이 근질근질해? 대련이라도 해줘?”
현재 그녀의 공격력은 110에 방어력은 70.
현재 나의 공격력은 330에 방어력은 260.
대충 수치계산만 해봐도 3배에 달했는데, 이마저도 노버프상태일 때의 수치였다.
그리고 박나영이 진짜 붕어급 빡대가리가 아닌 이상, 내 상태창을 확인했을 터다.
그러니 야비하게 뻑치기나 해볼 생각을 했겠지.
느낌 상, 그녀의 맨손 공격 정도는 초딩을 제압하는 것마냥 손 쉽게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기에 주먹을 쥐며 뚜드득, 관절소리를 내주며 다가갔다.
“사과할 생각 없으면 꺼져.”
어느새 마나 필드 외곽까지 밀려난 박나영.
그녀 입장에서는 오히려 마나가 없는 일반공간에서 나를 습격하는게 더 효과적일 터였다.
뭐, 필요 없다는 말에도 기어이 붙여놓은 국방경호팀에서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물론 경호팀이 없어도 걱정되지는 않지만.
기어이 마나 필드 바깥으로 밀려난 박나영이 어이없다는듯 한손으로 옆구리를 짚곤 머리를 쓸어넘겼다.
“하, 진짜 어이가 없어서..!”
그녀 입장에선 내가 미친놈일 것이다.
갑자기 급발진해서는 초월급 능력을 앞세워 지랄해대는 미친놈말이다.
근데 뭐, 내가 어떤 놈으로 보이든 상관없었다.
분을 삭히지 못해 옆구리에 손을 얹은 채, 입술을 잘근 씹는 박나영.
하지만 더 이상의 패악질은 부리지 않았다.
제 아무리 빡대가리라도, S급 헌터인 자신이 초월급 헌터인 내게 밉보였다간 앞으로 힘들어질 것을 아는 눈치다.
“하...”
결국 나를 쏘아보던 박나영은 말 없이 한숨 한번 내쉬고는 걸음을 돌려 훈련장을 빠져나가버린다.
이면보기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자신의 연기에 속아넘어갔다며 키득대고 있었겠지.
이면보기, 참으로 기특한 능력인 듯싶다.
특히나 앞으로 이강호라는 개새끼의 참회를 이끌어내기 위함에서도.
물론 마나가 흐르는 공간에서만 사용가능하다는 제약이 있기는하다만, 어쨌든 유용한 특성임은 자명했다.
그렇게 박나영과의 짧은 만남을 끝내고 다시 훈련에 돌입한 난, 밤이 깊어질 때까지 마나 운용에 대해 수백 번이고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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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립 마나 훈련장을 빠져나온 나영이 훈련장 공터 한쪽에 있는 쓰레기장으로 향하더니, 앙칼진 비명 비슷한 괴성을 내지르며 쓰레기봉투를 마구잡이로 발로 차고 던지기 시작했다.
“아아아악ㅡ!! 이 씨바아알!! 개 좆 같아!! 다 뒤져!! 씨발 좆 같은 새끼야아악ㅡ!!”
상스러운 온갖 욕을 퍼부으며 울분을 토해내는 나영. 삽시간에 쓰레기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옆구리 터진 김밥마냥 터져버린 쓰레기 봉투에선 쓰레기가 삐져나와 흩날린다.
“끼야아아아ㅡ!!”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질식당하듯 얼굴이 새빨개질 정도로 괴성을 내지르는 나영은 완전히 광기에 젖어 있었다.
머리에 쓰레기와 먼지를 뒤집어 썼음에도 개의치않고 계속 봉투를 쥐어뜯고 던지고는, 바닥에 널브러진 쓰레기도 죄다 사커킥으로 차며 난동을 부리는 박나영.
그 광경을 목도한 청소부는, 말릴 엄두도 내지 못한 채 쓰레기봉투를 가지러 창고로 향해야했다.
그리고 훈련장 내부와 외측에 배치된 경호원들도 그 광경을 보며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하아..! 하아..!”
한바탕 난동을 피우고서야 분이 삭혀지는지, 쓰레기먼지가 비오듯 내리는 한가운데서 날숨을 토해내던 나영이 휴대폰을 꺼냈다.
초월급이라 더 이상 마나가 있는 곳에선 그를 건들 수가 없었다. 대충 수치상으로도 그 차이는 3배. 아마 자신의 공격 쯤은 가볍게 튕겨내버릴 터다.
하지만 방금 당한 모멸스런 능욕은, 도저히 풀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팍이 너울댈 정도로 크게 숨을 몰아쉬며 휴대폰을 귓가에 대는 나영.
잠시 후,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ㅡ언니? 전화할 줄 알았어.
“나희야, 지금 어디야.”
이 들끓는 울분을 공감해줄, 신나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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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쾌적한 수업 환경이다.
힐긋대는 눈과 수근대는 소리는 여전히 많았지만, 어제의 그 찐광기를 겪었던 탓인지.
이상하게도 크게 신경쓰이지 않았다.
역시 인간이란 큰 자극을 받으면 작은 자극에는 무뎌지는 법인 듯싶다.
어째, 정자재테크년이 자극의 둔화에 도움이 된 것이다.
좋은 경험이든 싫은 경험이든 무엇이든 인생에 있어 도움이 되지 않는 경험은 없다더니.
딱 지금 상황에 적합한 격언이었다.
'그나저나 유치장에 갇혔나. 어쩐 일로 안 보이지.'
어제 경찰에 붙잡혀가는 것까지는 확인했었지만 어떤 처분을 받았는지는 모른다.
설마 그걸로 유치장까지 가지는 않았을 텐데, 끽해봐야 훈방조치나 됐겠지.
아직까지 우리네 사회는 성범죄에 관해서는 여성에게 관대한 법이니까.
아마도 어제 아카데미 공식 걸레를 선언했었으니 그 여파로 이사장에게 혼나고 집에 구금된 것일 터다.
어쨌든.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못하겠지.
잠깐, 근데...
내가 왜 신성한 교정에서 그 미친년 생각을 하고 있는 거지?
뇌리에 너무 깊게 각인이라도 된 건가. 어제 하루 보았을 뿐인데, 그리고 고작 하루 보이지 않았을 뿐인데 되레 생각나는 건 그 미친년의 정자나눔 작전이 성공해버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젠장, 인생 진짜 하드코어 모드네.
미친년들 지나가니 더 미친년이 귀찮게 굴 줄이야. 잡념을 지워버리고 여차하면 이사장에게 직접 `당신 딸 때문에 아카데미 옮기겠다`는 선포로 배지민을 쳐낼 계획을 다짐한 난, 모든 수업을 마치고 가방을 챙겨 강의실 바깥으로 나왔다.
저녁에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훈련장에 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은 보기 좋게 틀리고 말았다.
...군단장 보좌관을 만나기 전까지만해도.
아주 초월급 버퍼가 아카데미에 다닌다는 걸 홍보라도하듯, 새까만 정장차림에 선글라스까지 낀 경호원 둘을 대동하고 나타난 보좌관에 난,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다들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거야?
“또 뵙네요. 이강준 헌터님.”
그래도 종전보다는 공손해진 보좌관에 노기는 거둬들였다.
어느새 몰려든 아카데미생도들이 웅성대기 시작했고, 보좌관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왔을지는 대강 짐작되고 있었다.
“용건만 간단히 합시다. 보는 눈도 많으니.”
“하하, 귀하신 시간 뺏을 생각 없습니다.”
미친놈, 끝나고 나면 타임머신으로 시간을 되돌려주기라도 할 셈인가.
“이강호 군단장님께서 이사장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군.
난 별다른 내색 없이, 그를 따라 곧장 이사장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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