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헌터 매니저는 때려치웁니다-46화 (46/68)

EP.45)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야

**

“…뭐?”

세상사 진짜 말세네.

유명세 타면 별 희안한 종자들이 꼬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초면에 정자를 나눠달라는 부탁을 받으리라곤 정말 상상치도 못했었다.

대체 어떤 세상을 살아온 건지.

거리낌 없이 그 말을 내뱉고는 진지하게 나를 쳐다보는 배지민.

먹을 칠한듯 짙은 흑발과 백옥피부, 그리고 커다란 흑색 눈망울과 작은 입술에 갸름한 턱이 잘 어울리는, 거기다 곧게 내린 흑발을 가르며 새치름히 제 존재를 뽐내는 새하얀 귀는.

확실히 엘프나 귀족영애처럼 고귀한 아름다움이 있는데다 정상인(?)처럼 보였었다.

헌데.

저 수려한 마스크를 쓰고, 초면에 정자를 요구하는 이 무뢰한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더 기가 막힌 것은 이 무례한 정자요구를 교실 내에 다 들리도록 얘기했다는 것이다.

마치 짐승이 제 먹잇감을 건들지 못하게 엄포하는 것마냥.

배지민은 이 구역에서만큼은 내 정자는 자신의 것이라고 엄포한 것이다.

“뭐, 뭐? 쟤 방금 뭐란 거야? 정자 나눔해달라고?”

“미친년 아냐? 나눌 게 없어서 정자를? 근데 쟤 누구야? 오늘 첨 보는 애인 거 같은데?”

“나, 나도 첨 봐.”

예쁘다고해서 만사 능한 것은 아니다.

불쾌감을 드러내며 가방을 맸다.

“뭐라는 거야. 시답잖은 인사할 거면 꺼져.”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는 희대의 격언이 있지 않은가.

초면부터 성희롱을 하는 미친년에게 나갈 말은 욕이 당연한 법.

하지만 배지민은 보통 미친년이 아닌 듯했다.

책걸상 사이로 빠져나가려는 나를 막아섰으니까.

“너, 유전자 갖고 싶어. 방법은 어떤 식이든 좋아. 시험관해도 되고, 뭐… 원한다면 벌려줄 수도 있어.”

뭐, 뭐?

뭘 벌려?

아니, 발기 멈춰.

여기는 아냐. 아무 거나 먹으면 배탈 난다고 어머니가 그랬잖아.

짜증스레 그녀의 어깨를 손으로 밀치며 길을 텄다.

이 구역의 미친년은 나야, 의 현실판 버전인가. 하다못해 사람 없는 곳에서 은밀히라도 제안하던가, 수치스러움에 어깨를 미는 손에 힘이 실렸다.

“비켜. 미친년아. 성희롱으로 신고해버리기 전에.”

“아, 아니. 잠깐만!”

“꺼지라고. 너 같은 무뇌충한테 나눠줄 정자 없으니까 귀찮게하지말고 꺼져.”

“아, 아닛! 나 정도면 괜찮잖아..!? 그, 그리고 초월급 헌터 아기씨앗 받으려고 자궁도 아껴뒀다고!”

무슨 정자 재테크라도 하는 건가.

개소리에 헛소리까지 얹어진, 정신 나간 소리에 재차 내 앞을 막아선 배지민을 옆으로 강하게 밀쳤다.

꺄앗! 하고 옆으로 넘어지는 그녀.

신경 쓸 바 아니기에, 경멸스레 한번 그녀를 흘긴 후.

다음 수업을 듣기 위해 곧장 교실을 빠져나왔다.

어휴, 초장부터 제대로 미친년한테 걸렸네.

아무래도 마물 정보 교육은 안나와 서윤 누나한테 들어야할 듯싶다.

필수 이수 교육도 아니었으니까.

**

아니, 씨발.

잠깐만요.

“자~ 다들 노트북 켜시고 아카데미 사이트에서 마물 공격 패턴 분석표 다운 받아주세요~”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교수님.

왜 저 미친년이 여기까지 쫓아와서 저를 쳐다보며 음흉히 웃고 있는 건데요?

수업 시간에 아무나 막 이렇게 들어와도 되는 겁니까?

나의 소리 없는 이 외침들은 당연하게도 묻혔고, 하급 마물부터 상급 마물들의 공격 패턴이 담긴 홀로그램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일단 모르겠다.

이 수업은 필수 이수 교육인데다, 일주일 간의 이론 교육 이수 후에 모의 훈련도 있었기에 집중해야했다.

그렇게 두 시간의 수업이 끝이 났고.

당연하다는듯, 배지민이 가방을 싸고 있는 내게 다가왔다.

풍기는 체취는 군침이 돌 만큼 달콤하건만, 정신머리는 이제껏 겪은 그 어떤 여자들보다 괴이하기 짝이 없는 미친년.

똥이 무서워서 피하지 않듯, 그녀가 막아선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헌데 말 없이 내 뒤를 졸졸 쫓는 배지민에 난, 한적한 골목에 일부러 들어와 걸음을 멈췄다.

“하, 진짜 열 받게 하네. 대체 뭐하자는 건데.”

“유전자만 달라고! 책임지란 얘기도, 그걸로 다른 궁리를 할 것도 아니니까!”

“아카데미가 아니라 정신병원에 입원해야될 거 같은데. 진짜 미친년 아냐.”

모욕에는 모욕으로 응수한다.

…하지만 도트 데미지도 들어가지 않는 듯했다.

다소 음흉한 눈빛으로 여차하면 덮쳐버리기라도 할듯 내게 다가오는 배지민에 난 뒷걸음을 쳐야했다.

“나 진짜 다른 의도는 없다구! 초월급 헌터의 자식을 낳고 싶은 것 뿐이야! 결혼해달라고도, 연애해달라고도 매달리지 않을게, 맹세해!”

“아니, 그럼 외국 가서 구하시라고요. 나는 주기 싫다니까? 내가 무슨 정자 양성소냐? 진짜 여기서 더 지랄하면 경찰에 신고해버릴 줄 알아.”

휴대폰에 112를 누른 후, 수화기 모양에 손가락을 올리자 배지민은 그제야 멈췄다.

그리고는 황당하다는듯 팔을 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하, 나 같이 예쁜 여자가 정자 하나 달라는데 그것 하나 못 줘? 어렵지 않잖아. 싫으면 자위한 거라도 달라구! 귀찮게 하지 않을 테니까!”

“차라리 정상적으로 접근이라도 하던가. 다짜고짜 정자 달라는 미친년한테 누가 주겠냐? 생각 좀 하고 살아.”

“하.. 알겠어. 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정자 줄 건데? 너가 하라는 대로 다 할게. 부탁해.”

아니, 정자를 못 받는다는 건 아예 염두에 두고도 있지 않다는 건가?

보통 미친년이 아닌데.

팔짱을 낀 채, 내 대답을 기다리는 배지민에 난 잠시 고민에 빠져야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발기가 될 정도로 색기가 넘치는 몸매와 미모는 확실히 보기드문 여자였다. 아카데미 교복 셔츠를 터뜨릴듯 돌격하는 젖가슴과 잘록한 허리에 짧은 양말과 치마로 드러난 매끈하고 길쭉한 각선미는 가히 환상적이었다.

뭐, 거기다 본인피셜로는 자궁도 깨끗하게 아껴뒀다했으니 성병 문제도 없을 것 같았기에 솔직히 혈기왕성한 내게 상당히 꼴리는 제안이기는 했다.

아니, 연예인보다 예쁜 여자가 자신이 처녀라며 가랑이를 벌려줄 테니 정자 주입만 해달라는데 솔직히 뒷탈만 없다면 그 누가 거절하겠는가?

다들 뒷탈이 생길까봐 주저하는 것이겠지.

그렇기에 배지민 저 미친년은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었다.

“근데 너 몇살이냐?”

“나? 스물 한 살인데?”

“근데 왜 반말이냐?”

“아, 오빠였어? 너무 잘생겼길래, 나랑 동갑인 줄 알았지.”

…입에 침이나 바르고 그딴 소리를.

아니, 동갑이라면 초면에 반말하는 게 당연하다는 건가?

이거, 정신 못차린 사총사년들 뺨치는 무뇌아인 모양이다.

절레절레, 한심한듯 고개를 저었다.

“어휴… 너 같은 년 지독하게도 겪어봤거든? 성희롱으로 신고해버리기 전에 꺼져. 너도 알지? 헌터가 교육기간 중에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면 중징계 받는다는 거.”

“중징계? 그게 뭔데? 아, 얘기 안 했구나. 사실 서울 아카데미 이사장이 우리 아빠야.”

…교장도 아니고 이사장이 아빠라고?

아니, 씨발.

그런 가문의 따님께서 성스런 교정에서 이 무슨 해괴망측한 망발이란 말인가?

이사장이란 그분도 참, 자식 복은 없는 양반인 듯했다. 지금쯤 제 딸이 공개적으로 정자나눔을 요구한 사실이 아카데미에 쫙 퍼졌을 텐데 말이다.

땅이 꺼져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개꼴리는 제안이긴하다만, 아무래도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가 아닌.

어떻게든 피하라 전법으로 가야할 듯싶다.

휴대폰을 귓가에 가져갔다.

“네, 거기 경찰서죠. 여기 서울 아카데미 이사장 딸이라는 여자가 제게 정액을 달라며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빨리 와주세요.”

“야, 야아! 무슨 짓이야!”

무슨 짓이긴 미친년아.

신고하는 거지.

**

다행히 경찰들의 도움으로 상황은 일단락되었고, 똥을 치워버린 난 한결 가벼운 걸음으로 시에서 운영하는 공용 마나 훈련장에 들어섰다.

우리 어가이브 길드가 급속도로 성장할 것은 기정사실이었지만.

아직까지는 길드 전용 훈련장을 만들기엔 재정상황이 열약해 당장은 이곳에서 훈련할 수밖에 없었다.

아카데미 수업도 수업이지만.

모의 실전 훈련이 들어가기 전에, 그리고 값 비싼 몸값으로 바다를 건너 올 미국버퍼형님께 기술 전수를 받기전에 기초적인 개념 훈련 정도는 해두는게 좋을 터였다.

서윤 누나와 안나 누나에게 받으면 좋기는 하겠지만, 길드 기반을 다지느라 고생하고 있을 것이기에.

너튜브 강의를 보며 혼자 연습해보기로 한 것이다. 누나들이 길드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길드장인 내가 어찌 쉴 수 있겠는가.

“흠… 스킬 이름이 중요하댔지.”

훈련복으로 환복한 후, 마나 필드에 들어가기 전에 우선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들었다.

앞전 레이드 때 보았듯, 헌터들은 스킬명을 외치며 스킬을 쓴다.

다소 유치할 수도 있는 그 외침이 오글거리기도 했지만, 스킬명은 스킬발현에 가장 중요한 시발점이었었다.

스킬 이름을 외침으로써, 몸 속 마나흐름이 구체화되며 정확한 기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선 공격력과 방어력을 상승시키는 스킬에 이름을 붙여보기로 했다.

하지만, 새로 개통해둔 휴대폰에 전화가 오는 바람에 스킬명 선정은 잠시 미뤄야했다.

누나들과의 연락을 위해 새 번호로 개통한 휴대폰이었다.

전화의 주인은 안나 누나였다.

“여보세요?”

ㅡ아, 강준아. 나영이가 너한테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고 길드로 찾아왔는데… 어떡할까?

뭐?

박나영이?

아, 그러고보니 퇴원했었겠네.

신나희가 길드에서 추방 당한 이유를 듣고는 내게 사과하러 온 것 같은데, 우선 진심인지 아닌지 들어볼 필요는 있겠지.

이제 남은 거라곤 박나영 뿐이니까.

게다가 참회의 장소로 마나 필드가 적격이기도 하고 말이다.

“시립 마나 훈련장으로 오라고 해주세요, 지금 당장.”

ㅡ정말? 괜찮겠어? 내가 데리고 같이 갈까?

“괜찮아요. 누나 저 이제 초월급입니다?”

ㅡ아.. 호호, 맞다. 걱정할 필요 없겠네. 알겠어, 그렇게 얘기해놓을게.

박나영, 미친년사총사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그녀가 과연 어떤 진심을 비칠지 기대된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스킬 이름들을 적어가기 시작했다.

**

창가에 햇볕이 내려쬐는데도 어딘가 모르게 어두침침한 군단장실에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책상에 다리를 올리고 시가를 꼬나물고 있는 이강호.

“후…”

한숨일지 모를, 희뿌연 담배연기를 내뱉는 그의 손에 종이 한 장이 들려있었다.

보좌관이 건넨 종이였는데, 한 헌터의 인적사항이 기록되어 있었다.

“버퍼가… 진짜 이강준이란 말이더냐.”

“네. 맞습니다.”

“흐음…”

스쳐지나가는 과거의 편린에 이강호가 눈을 감으며 의자 목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종이에 있는 인적사항은 사진과 가족관계, 약력 정도였는데.

그 깨끗이 지워진 가족관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는 보좌관은 이강호의 혼잣말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다. 그래서, 놈이 직접 오라 했다고.”

“네, 넵. 군단장님의 명을 거스르면 처분이 내려질 거라 했음에도 이상하게도 뜻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둘 사이의 일을 모르는 보좌관에겐 이상한 일이지만, 이강준이 그런 저항을 보인 이유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강호는 천정을 향해 긴 담배연기를 내뿜어댔다.

“그리고 알아보니까 현재 길드를 만든데다 서울 아카데미의 특수교육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들었다. 어가이브라고 했던가. 백년에 한번 피는 꽃 용설란을 번역했다고.”

“넵.”

“후ㅡ 일단 서울 아카데미 교장에게 일러놓아라. 내일 방문하겠노라고.”

“지, 직접 가시겠다는 겁니까?”

마음 같아선 중징계를 내려서라도 자신의 아래에 묶어두고 싶지만.

세계적인 파급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강준을 함부로 대했다가는 그 후폭풍이 거셀 것을 알기에.

이강호는 어쩔 수 없이 제 버린 자식의 말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각성에 실패해 버렸던 자식이 초월급 헌터, 그것도 버퍼가 되서 나타났다니.

과거의 기억 조각들이 그의 뇌리 속에서 비명을 질러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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