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급 헌터 매니저는 때려치웁니다-45화 (45/68)

EP.44)아기씨앗 남는 거 있어?

“하.”

길드장의 수염이 한 차례 맥없이 떨렸다.

더 이상 화를 낼 기력도 없다는듯 가라앉는 주름진 눈꺼풀.

그 아래 뜨인 눈동자는 노발대발해대는 박나영을 한심스레 쳐다보고 있었다.

솔직히 이정도로 반사적인 반응을 하리라 생각지 못했기에, 조금은 놀란 듯도 보이는 길드장은 잠시 그렇게 낮고 긴 한숨을 내쉬다 입을 열었다.

“하... 얘기 들었는지 모르겠네만 신나희는 계약 만료 후 길드에서 추방하기로 했다. 이유는 왜인지 얘기하지 않아도 알겠지.”

“아니, 길드장님! 저 방금 퇴원했어요. 근데 다짜고짜 용서를 구하러 다니라뇨. 심하신 거 아니에요?!”

“너가 이강준 매니저에게 저지른 짓들은 심하지 않았더냐!”

“그 새끼는 우리 시다바리잖아요! 주인이 종놈 부리는 건 옛날부터 당연한 일이라고요!”

“...”

진짜다.

박나영의 저 옹골찬 정신머리는 자신의 예상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할 말을 잃은 듯,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는 길드장. 그나마 박나영은 제정신에 근접한 인간인 줄 알았건만, 이제와 보니 미친년들 사이에 숨어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을 깨달은 길드장이, 신기루를 바라보듯 황망히 중얼거렸다.

“...당연한 일이라니.”

“그럼요! 이강준을 저희에게 붙이신 것도 길드장님이시잖아요! 근데 이제와서 사과를 하라뇨. 저는 하등한 놈한테는 절대 못해요!”

헌데, 망연자실해있던 길드장이 별안간 호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풋, 푸하하..!!”

그런 길드장의 비웃음에 빽빽대던 박나영이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뭐가 웃기시죠?”

“허허허! 웃기지 않느냐. 너가 하등하다하는 이강준 매니저는 지금 초월급 버퍼로 각성했는데 말이다. 눈과 귀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는 게냐?”

“네...?”

박나영의 갈색 눈썹이 보기 좋게 일그러진다. 하지만 아직까진 눈동자에 불신이 팽배했다.

그에 길드장이 가소로운듯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켜 뉴스기사를 보여주었다.

곧, 박나영의 갈색 눈동자가 혼돈의 늪에 빠져 크게 흔들린다.

“거, 거짓말이죠? 말이 안 되잖아요..! 그 시다바리놈이 갑자기 초월급 헌터라뇨! 가짜뉴스 아니에요!?”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게 어째 추방당한 신나희와 아주 똑같구나. 긴 말할 필요없겠군. 한달간 이미지 쇄신을 위해 노력할 생각 없거든, 박나영 너도 길드에서 추방할 테니 그리 알거라.”

박나영의 포지션은 원거리딜러였고, 원딜은 S급 총 인원수에서도 절반을 차지할만큼 흔한 포지션이었다.

물론 S급 힐러에 원딜까지 잃는 것은 길드 차원에서 손실이 크겠지만.

당장의 이익에 안주해 눈을 감는다면, 미래의 손실을 키우는 꼴일 뿐.

아니, 무엇보다 이제 파티가 해체된 마당에 더 이상 이익이 되지도 않을 것 같았고 말이다.

그나마 원딜은 협동심과 지성이 조금 부족하더라도 레이드 파티를 만드는데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길드장은 이참에 그간 이강준 매니저에게 떠넘겼었던 문제들을 싹 갈아엎을 생각이었었다.

고일 대로 고여 썩어버린 문제를 이참에 깨끗이 치워버리는 것.

그렇기에 그의 노역한 눈빛은 단호했다.

박나영이 황당한듯 손부채질을 해댔다.

“추방요? 하참나 어이가 없어서 진짜.”

“동의하는 것이냐?”

“아니, 잠깐만요! 생각할 시간은 주셔야죠!”

완곡한 길드장의 태도에, 결국 한발 물러서는 박나영. 현재 손절에 손절을 거듭한 코인으로 전재산의 60퍼센트를 날린 터라 가온 길드에서 받는 고정적인 월급은 그녀에게 꼭 필요했었었다.

초조한듯 입술을 곱씹으며 고민하던 박나영이 이내 결심한듯 입을 열었다.

“할게요! 사과 하면 되잖아요..!”

*

어가이브 길드는 출범한지 이틀만에 폭발적인 가입 문의를 받았고, 갓 입사한 사무직원은 불나게 울려대는 전화를 받느라 하루 종일을 책상에서 보내야 했었다.

대부분은 낮은 등급의 헌터들이었는데, 간혹 A급의 헌터들도 가입 문의가 와 어가이브 길드의 이슈성이 제법 실감이 나기도 했었다.

아직까진 4대 보험 외에는 복리후생이랄 것도 없는데 괜히 막중한 책임감도 느껴져왔고.

“후아, 피곤해에~..”

“나둥~ 전화만 몇 통 받았는지 모르게써~..”

노곤한 5교시 수업을 버티고 책상에 엎어지는 학생마냥 사무실 책상에 퍼지는 서윤 누나와 안나 누나.

그런 누나들과 직원을 위해 사온 커피를 나눠주며 말했다.

“저희 길드랑 맞는 지원자들은 있어요?”

안나 누나가 입술을 푸르르 털며 겹겹이 쌓인 가입 지원서 위를 팍팍 쳤다.

거르고 추려낸 거라는데 족히 스무 장은 되어보였다.

“..이정도? 이것도 진짜 깐깐하게 걸러낸 게 이정도야.”

“와.. 진짜 많기는하네요. 생각보다 저희 길드 파급력이 강한가본데요?”

서류를 둘러보며 내뱉은 말에 서윤 누나가 자랑스러운듯 흐뭇한 미소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럼~ 우리 강준이 지금 헌터들 사이에서, 아니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할 걸? 난리도 아냐. 전화 중에 30프로 정도는 너랑 인터뷰하고 싶다는 전화라궁.”

30프로라.

누나들의 권유로 지금 휴대폰을 꺼놓은 상태라 그정도일지는 몰랐는데.

하여튼 기자놈들 거머리 습성은 알아줘야한다니까.

아직 언론사와 단 한번도 인터뷰하지 않았었다. 앞으로도 없을 예정이고.

그 시간에 운동을 하는게 더 유익할 테니 말이다.

주섬주섬, 가방을 챙겼다.

딱히 든 것은 없지만, 그래도 꿈 꾸던 아카데미 라이프의 단기생활을 시작하는데 가방 하나는 들어줘야하지 않나 싶어 시장에서 만원 주고 산 가방이었었다.

안에는 태블릿 노트북과 필기구, 공책 한 권이 다였고. 그 가방을 매고, 어제 사무직원과 같이 뽑은 남직원 한 명의 어깨를 짚었다.

바짝 얼어있는 게 옛날의 나를 보는 듯한 녀석이었는데 서윤 누나와 안나 누나를 맡아줄 신입 매니저였다.

“오늘부터 아카데미 수업이라 자주 자리 비우니까 누나들 딱 잘 모셔야된다. 알겠지?”

“넵! 알겠습니다!”

하트만 상사 앞에 놓인 가련한 병사마냥 목청껏 소리치는 녀석.

힘이 잔뜩 들어가면 유연한 움직임이 어렵듯, 과한 긴장은 융통성을 잊게 만들기 마련인데.

뭐 어쩌겠는가.

그래도 개과천선한 안나 누나가 업무에 관해서만 콕콕 혼내는 걸로 위안 삼기를 바래야지.

“그럼, 갔다올게. 누나들 너무 무리하지말고.”

“핏, 너나 무리하지말고 열심히 배우고 와~!”

서윤 누나의 배웅인사에 잠깐 멈칫하곤 키득댔다.

그러자 의뭉스레 고개를 갸웃하는 누나.

“왜...?”

“무리하지말고 열심히 하라는 건 무슨 말이야?”

“아... 내, 내가 그랬어? 호호.. 나도 참.. 정신 없긴 없나봐.”

머쓱한듯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서윤 누나에 옆에 앉아 있던 안나 누나도 입술을 가리며 익살스레 키득거렸다.

놀림거리 하나 잡은 말괄량이 소녀 같은 웃음이었다.

“큭큭큭, 야 상민아 들었어? 너도 무리하지말고 열심히 해야 돼, 알겠어?”

“네? ..네, 넵! 무리하지말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괜히 가만히 얼어있는 신입 매니저 상민이에게 얘기하고는 서윤 누나의 팔뚝을 치며 기분 좋게 웃는 안나 누나.

상민이도 보기 보다는 융통성이란 게 있는지 입만 웃어 보였고, 서윤 누나는 뾰루퉁히 볼을 부풀리고는 안나 누나에게 볼멘소리를 토해낸다.

“아, 아니..! 실수할 수도 있지..! 꼬투리 잡으니까 좋냐..!? 하여튼 유치해서는..!”

“아~ 눈물나. 자~ 다들 오후도 힘내서 열심히 일합시닷! 물론 무리하지는 말구요~?”

“야앗! 너 진짜 계속 놀릴래!?”

“누나들 그만 좀 투닥거려요. 애들도 아니고. 이제는 한 길드의 임원들이신 분이.”

꼭 이렇게 중재를 하지 않으면 투닥대는 걸 멈추지 않는 누나들이다.

그렇게 한바탕 소란스러워진 사무실을 정리하고, 모셔다드리겠다는 상민이에 누나들이나 잘 모시라며 장난스레 핀잔을 주고는 아카데미로 향했다.

버퍼 교육을 해줄 미국의 S급 버퍼를 초빙을 했는데 비자 문제로 며칠 걸린다하여 우선은 이론 위주의 교육 시간표를 받아둔 터였다.

하여튼 우리나라 사람들의 빨리빨리 근성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단 하루 만에 세계에서 몇 없다는 희귀 직군 버퍼를 강사로 초빙하다니.

그리고 아카데미 학장님께서 나를 위한 별도의 교육 시설과 시간을 만들겠다 했었지만, 그런 편의와 호의에 익숙해지기 시작하면 오만하고 경거망동해진다는 것을 잘 아는 난, 한사코 기존 교육 시간에 맞추겠다 했었다.

그렇기에 오후에는 [ S급 던전 마물 정보 교육 ] 을 듣기 위해 서둘러 아카데미에 도착한 난 여느 학우들과 다름없이 교실로 들어서 자리에 앉았다.

대학 시스템과 비슷했기에, 자리는 자유착석이었었는데 관심을 그나마 덜 끌기 위해 뒷문으로 들어와 조용히 뒷좌석에 앉았지만.

예상대로 부질없는 짓이었던 듯싶다.

“야야, 저, 저 사람 버퍼아냐?”

“헐..! 이 씨ㅂ..! 아, 아니. 버퍼 맞는 거 같은데? 인터넷에서 봤어..!”

“대박! 저 분이랑 같이 이론 수업 듣는 거야..? 아 심장 떨려..♡!”

“얼굴도 완전 훈훈하쟈나..! 꺄♡ 완전 내 스타일♡”

여기까진 여학우들의 수근거림.

“와 씨발 이거 기 죽어서 수업 듣겠냐.”

“개쩐다.. 초월급이라잖아. 근데 생긴 것도 그렇고 평범해보이는데.”

“어유 등신아. 일반 상태에선 다 똑같잖아. 마나 필드나 훈련장 가보면 바로 티나겠지.”

“씨바 뭐 손오공처럼 몸에서 그런 거 나오는 거 아니냐?”

“자퇴 마렵네.”

여기까진 남학우들의 수근거림.

...각 성별 성향에 맞는 수근거림이 귓가를 간질여 강제적으로 이어폰을 껴야했다.

서윤 누나와 안나 누나가 적응해야될 거라며 충고를 했었지만.

하루아침에 초월급이 되버린 마당에 이런 시기와 관심을 하루아침에 적응하기는 힘들었다.

이어폰을 끼고 책을 폈다.

특수교육에 사람이 얼마 없을 줄 알았는데, 교실에는 빈 자리가 몇 없을 정도로 북적였다.

특수교육을 받는 헌터들은 대부분 각성부터 D등급 이상이 되었거나 혹은 헌터가 되었지만서도 능력 개화가 안 됐거나 후유증을 가진 이들인데.

D등급 이상의 헌터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빠른 실무 투입을 위해 특수교육에 자원한 것이고, 후자의 경우엔 강제적으로 특수교육으로 온 것이었다.

능력 개화가 안 된 헌터나 후유증을 가져 레이드가 불가한 헌터들은 일반 헌터들이 던전을 토벌하고 난 후 뒷청소를 담당하거나, 토벌 후 탐사대 진입 시 안내 가이드 역할 정도를 담당하기에 실무보다는 이론 교육이 중점인 탓이었다.

전자의 헌터들은 당연히 특수교육 후, D등급 헌터라도 F등급 던전부터 무재해 클리어를 해야만 제 등급부터 시작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근데 막상 와보니, 생각보다 D등급 이상의 헌터들이 많은 듯보였다.

따분하게 아카데미 생활을 하는 것보다, 빠른 교육과 훈련 후 실전에서 활약하고 싶은 욕심 탓이겠지.

그리고 이미 필수교육이 아닌, 사교육을 통해 개인 마나 필드에서 훈련까지 마친 녀석들도 많을 테고.

그런 생각들이 드니 왜인지 씁쓸한 생각도 들긴 했다.

하지만 굳이 깊게 여기지는 않았다.

잠시 후, 교수님이 들어왔다.

“자, 그럼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현업이 바빠 대학교를 가지는 못 했었지만, 아카데미 시스템이 대학교 80프로에 고등학교 20프로 섞인 것이다, 라는 말은 들었었다.

그래서 그런가, 자기소개 하나 없이 곧장 진행되는 수업에 묘하게 낯설면서도 안도감이 들었다.

그렇잖아도 힐금힐금 쳐다보는 여학우들 탓에 3D 홀로그램으로 진행되는 수업 내용에 집중이 안 돼 미치겠는데.

자기소개라도 했다간 으으.

끔찍했을 터다.

“자ㅡ 수업 마치겠습니다. 나머지 시간표에 따라, 각 클래스에 맞게 움직이시면 됩니다. 그럼 이만.”

정말이지 사무적이고 딱딱한 이론 수업이 끝이 났고, 교수는 인사 한 번 받지 않고 쌩하고 나가버리고 말았다.

천만다행히도 초월급 버퍼니 뭐니 크게 관심이 없는, 아니 수업하는 걸 보아하니 그냥 돈 벌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교수님이라 내게 눈길 한번 주시지 않는게 어찌나 감사했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오후 뒷수업이 아직 남아있던 난, 가방에 테블릿 노트북을 넣고.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했는데....

한 여학생이 내게 다가왔다.

헌데.

그 여학생의 미소에 왜인지, 올 게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수업 시간 내내 나를 흘깃 쳐다보며 뜻 모를 미소를 지었었으니까.

“안녕. 난 배지민이라고 해.”

베지밀?

근데 왜 반말?

초면에 반말이 왔으면 반말이 가는게 당연한 이치 아니겠는가.

서로 나이차이도 얼마 안 나 보이는데.

“아, 반가워.”

“나도 정말 반가워. 근데 초면에 이런 말해서 미안한데.”

...다짜고짜? 뭔가 불안한데..

“아기씨앗 좀 나눠줄래?”

“...뭐?”

아기씨앗...?

설마 정자를 나눠달라는 거야...?

상상을 뛰어넘는 황당함에, 입을 벌리고 그녀를 쳐다보았고,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듯.

나를 태연자약하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껏 많은 광기를 만나봤지만... 이건 찐이다.

자궁에 자리 있냐는 질문은 봤어도 아기씨 남는 거 있냐는 질문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근데 더 웃긴 건 이게 아카데미에 들어와서 나눈 나의 첫 대화였다는 것이다.

...뭐 이런 정중한 미친년이 다 있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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