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2)그날의 인연 (2)
한 소녀가 있었어요.
벌레 한 마리 못 잡을 만큼, 착한 심성과 고운 얼굴을 가진 소녀는.
동급생들에게 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었죠.
결국 시기와 질투는 도를 지나쳐 소녀의 심신에 패악을 끼치기 시작했지만.
소녀는 묵묵히 견뎌냈어요.
하지만 어느 날, 동급생들은 소녀를 끌고 가 옷을 벗기려했어요.
언제까지 버티나보자며.
벗은 사진을 찍어 유포하겠다고 한 거죠.
소녀는 저항했지만.
여러 동급생들의 힘을 당해내긴 힘들었어요.
그렇게 모든 것을 포기하고, 상의가 뜯어진 순간.
한 아이가 나타났어요.
자신보다 머리 하나는 작아보이는 꼬마아이.
남철 중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는 아이는 무작정 덤벼들었어요.
그래도 남자라는 걸까요.
아이는 제 머리보다 하나씩은 큰 누나들에게 덤벼들어 얻어맞으면서도 멈추지 않았어요.
얼굴에 피도 나고 멍도 들고 붓기까지 했지만.
아이는 일어섰고, 결국 누나들은 도망가고 말았죠.
소녀는 그런 아이가 고마웠지만.
자신 때문에 얼굴이 엉망이 된 아이를 차마 볼 수가 없었어요.
부끄럽기도 했고요.
그래서 도망치려던 그 순간, 아이가 소녀를 붙잡았고. 울지 말라며 손수건을 건네주었어요.
그것을 받은 소녀는 결국 자리에 주저앉아 크게 울 수밖에 없었어요.
그 뒤 경찰이 도착했고.
어수선한 사이, 소녀는 아이에게 손수건을 돌려줄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어요.
그리고 소녀는 전학을 가게 되었죠.
아이에게 받은 손수건을 고이 간직한 채, 겁에 질렸음에도 자신을 위해 나서준 아이에게 고맙다는 인사 한 마디 못한 게 마음에 너무 걸렸어요.
특히.
도망치려했던 자신의 모습은, 지금까지도 수치스럽고 창피한 기억으로 남아있었죠.
결국 소녀는 친구들이 아이돌 덕질을 할 때.
한 아이만 바라보기로 했어요.
그때 도망치려했던 과오를 속죄하기 위해 소녀는 아이를 다시 만났을 때.
이번엔 기필코 자신이 지켜주리라 다짐했어요.
그렇게 각성까지 마치게 된 소녀는 아카데미에 들어갔고, 졸업을 한 후부터 아이를 찾아다니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다시 찾은 아이는 절망적인 상황이었죠.
각성 실패에 따른 후유증, 어머니의 자살, 여동생의 영구 장기 손상까지.
곁에서 그를 다독이고 함께 고난을 헤쳐나가고 싶었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버린 탓일까요.
선뜻 나설 수가 없었어요.
아이가 두려워할 것 같았죠.
다행히 여동생은 아이의 전여자친구가 지극히 돌봐주었고, 아이도 곧 아버지에게 버림 받은 충격과 어머니의 그리움에서 일어나는 듯했어요.
그때부터 소녀는 다짐했어요.
그를 꼭 각성시키겠다고요.
자신과 동생을 버리고 어머니를 죽게 만든 아버지를 원망하고 복수를 꿈 꾸는 아이를 위해.
그를 최고의 헌터로 만들겠다고 다짐한 소녀는 죽어라 레이드를 뛰며 실력을 쌓고, 돈을 차곡차곡 모았어요.
그렇게 소녀는 아이의 꿈을 위해.
그날의 은혜를 위해.
열심히 했고.
결국 그 아이에게 드디어 은혜를 갚을 날이 왔어요.
하지만 아이는 아무래도 자신의 선의와 호의가 두려운가봐요.
이해는 해요.
많은 시간이 지났고, 이 이야기는 소녀 자신만 아는 것이었으니까요.
그저 그날의 은혜를 갚는 것인데.
두려워 안 했으면 좋겠는데.
어쩌면 아이의 두려움이 곧 자신의 두려움이었는지도 몰라요.
하지만 이제 소녀는 용기내어 아이에게 은혜를 갚으려고 해요.
**
10년 전의 일부터.
오늘 날의 일까지.
모두 들어버린 난, 묵묵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걱정이 무색하게, 왜인지 덤덤했다.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는달까?
대체 내가 뭐라고, 초미녀 여성이 뭐가 아쉬워서, 나 같은 놈을 10년이나 기다렸단 말인가.
꿈만 같은 이야기에, 당혹감이 든 것도 잠시.
그저 꿈처럼 느껴져왔다.
취기일 지, 부끄러움일 지 모를 홍조가 그녀의 얼굴에 어여쁜 꽃을 피우고 있었다.
피식, 웃는게 아무래도 취기인 모양이다.
술잔을 내려다보며 자조적으로 읊조리는 서윤 누나.
“풋... 동화 같지? 유치한 동화.”
그녀 말대로 동화나 영화 같은 얘기다.
자신을 구해준 남자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10년을 기다린 이야기는 확실히, 평범치는 않은 이야기이니까.
“...왜 진작 얘기해주시지 않았던 거에요? 어쩐지 뭔가 낯이 익더라니..”
“너가 날... 받아들일 수 있을까해서.. 두려웠어. 조금은 날... 무서워하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
현실성이 느껴지지 않는 탓일까?
딱히 두려움이나 반감은 들지 않았다.
아니, 별다른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그녀는 내게 은혜 갚기 위한 날을 기다렸을 뿐이다.
사생팬마냥 스토킹을 한 것도 아니고, 내 SNS를 매일 같이 염탐한 것도 아니고.
반감이나 거리낌이 들 이유는 없었다.
내가 자신에게 오게끔 계략을 꾸민 것도 아니고 말이다.
게다가 피폐적인 짝사랑도 아니었고.
그저 은혜를 갚기 위한 일들이었기에 반감은 생기지 않았지만, 그렇다고해서 기쁘지도 않은 묘한 상태였다.
큰 동요심도 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간의 의문들이 이제야 풀리는 것 같아 마음은 잔잔한 수면처럼 평안스러웠다.
“흐음, 유치한 동화 같긴 한데.. 누나 답네요. 순수하고 맑은 누나다운 이야기랄까.”
“...미안. 다 내 잘못이야. 차라리 진작 얘기했더라면...”
“아뇨, 진작 얘기해주셨어도 똑같았을 거에요. 그래도 그때의 일로 이렇게까지나 생각해주셔서 감사해요.”
나의 감상평에 사색빛이 들어 초조한 누나의 얼굴에 한 떨기 미소가 깃들었다.
“저, 정말...? 그렇게 생각해주는 거야? 내가 좀... 변태스럽다거나 이상해보이지는 않는 거야...?”
“조금 이상해보이긴한데, 변태스럽진 않아요.”
“끄응... 역시 그렇구나... 내가 봐도 이상해보여... 그래서 말 못 했다구우...”
피식 웃으며 상체를 앞으로 당겨 누나의 볼을 한 차례 꼬집었다.
말랑한 푸딩 같은, 기분 좋은 촉감이다.
볼을 꼬집힌 누나가 토끼 눈을 뜨고서는 얼굴을 발그레 물들였다.
“시무룩해마요. 누나가 뭐 잘못한 것도 아니고. 대신 시간은 조금 줘요. 누나가 10년간 가지고 있던 이야기인데 하루아침에 이해시키려는 건 아니죠?”
“그, 그럼! 이해를 바라는 것도, 대가를 바라는 것도 아냐. 다, 단지... 은혜를 갚고 싶다는 것 뿐...”
“은혜라... 그래도 너무 과해요. 20억이라뇨. 그거에 대한 값은 전리품 수익 반띵만으로도 충분하다구여. 무슨 생명의 은인도 아니고..”
헌데 나의 말에 서윤 누나가 가늘게 풀렸던 눈에 힘을 주며 말했다.
“아니..! 생명의 은인 맞아. 적어도 그때의 너가 없었더라면 지금의 유서윤도 없을 테니까. 그때의 너가 있었기에 나도 너한테 각성석을 사줄 수 있는 헌터가 된 거라구.”
그 단호한 말에, 무어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까지나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
사실 난... 그날의 기억도 흐릿한데 말이다.
어리기도 하고, 오래 됐기도 하고.
헌데 누나의 기억 속엔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남자와 여자는 생각의 초점이 다르긴 하니까.. 특히나 그당시의 그녀는 피해자였었고.
아마 내가 아니었다면 그녀의 사진이 유포됐을 것이고, 어쩌면 그 뒤탈들로 그녀의 인생은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어째 이거, 받지 않으면 받을 때까지 조를 기세인데....
“...으음, 그래도 안 돼요.”
결국 무지성 우기기로 밀어붙여보기로 했지만, 서윤 누나의 공세가 만만치않았다.
“생명의 은인에게 은혜를 갚고 싶어서 10년을 기다렸는데... 안 들어준다는 거야?”
“아니 그래도... 각성석은 너무 과해요. 진짜 목숨을 구해준 것도 아닌데.”
“만약 그때 너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난 어떻게 됐을지 몰라. 사진이 유포됐다면 아마... 극단적인 선택도 했었겠지. 너가 없었다면 나도 없는 거야... 그러니까 강준아...”
두 눈동자에 눈물을 채우는 서윤 누나.
그 여리한 모습에 마음이 약해지려한다.
분명 알고 저러는 걸 거다.
누나도 은근한 여우였으니까.
좀 귀여운 여우기는 하다만.
“그리구 누나 돈 잘 벌어. 20억? 그거 몇 번만 레이드 뛰어도 벌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제발 사양하지 말아줘... 넌 내 은인이라구...”
“하... 알았어요.”
기어이 눈물을 훔치는 서윤 누나에... 결국 한발 물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공짜로 받는 건 결단코 무리였다.
“하.. 그럼 차라리 빌려준다고 하세요. 아니면 무슨 대가라도 바라시던지. 대기업 회장도 아니고 20억을 기부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세상에.”
서윤 누나가 눈물을 훔치며 물었다.
“대가를 바라면... 은혜를 갚을 수 있게 도와준다는 거야?”
그녀의 눈물 속에서 살짝 기대감이 비친다.
그래, 그녀가 이렇게나 간곡하다면... 차라리 무슨 대가라도 원해야 받던지 하지 않겠는가.
빌려준다던지, 아니면 평생 매니저일을 해달라던지, 그것도 아니면 헌터가 되더라도 캐스터 일을 계속 해달라던지 등등 말이다.
어쨌든 나도 최강의 헌터가 되고픈 마음은 간절했었었으니까.
이사벨라든, 아버지란 작자에게든 보란듯이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차라리 그렇게라도 해주세요. 아무리 은인이라해도 20억을 덜컥 받을 수는 없다구요.”
헌데, 서윤 누나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이었다.
갑자기 사무적으로 돌변해서는 자동응답기마냥 조건을 읊는 그녀는 베테랑 은행원 같았다.
“그럼 50년 납 만기로 연 24퍼센트의 이자율에 월 원금과 이자 동시상환으로...”
오, 오십 년 만기라고?
거기다 3금융권을 뛰어넘는 연 24프로의 이자율?
그것도 모자라 원금 이자 동시상환이라고?
이거 완전, 노예 계약보다 더 심하지 않은가...!
역시 누나는 노후대비로 대부업을...!
“푸훗, 농담이야 농담. 진짜 놀란 거 아니지?”
...나도 오버 좀 해봤습니다.
서윤 누나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누나의 농담에 장단을 맞춰준 것 뿐.
예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곱게 웃는 누나를 따라 웃고는 다시 진중한 분위기로 돌렸다.
“호호호, 강준이 놀리는 거 재밌다니깐.”
“어휴... 그러니까 진짜 바라는 게 뭐에요.”
“흐음~ 바라는 거라...”
서윤 누나가 틴트를 바른듯 윤광이 감도는 분홍빛 입술에 검지를 갖다대며 고민에 빠졌다.
그래, 차라리 각성석을 사줄 테니 뭐라도 내게 부탁을 해줘야 나도 받지 않겠는가.
그렇다해도 20억은 과하기는 하다만.
잠시 고민하던 누나가 수줍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꼭 내가 대가를 원해야만 받겠다면... 그, 그럼, 누나랑 사귀어줄래...?”
...예?
20억짜리... 프로포즈입니까?
더 난감해져 가는 것 같은데....
**
라온제나 길드의 대표실.
ㅡ똑똑, 누군가 노크를 했고, 작은 안경을 낀 채 결재서류들을 둘러보던 강백이 들어오라 일렀다.
그에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유안나.
그녀를 본 강백이 결재서류를 덮고는 쇼파에 앉았다.
“그래, 어땠는가? 서윤이와의 레이드는.”
그의 물음에 안나의 눈빛에, 강준을 바라보던 서윤의 눈빛이 오버랩되었다.
그건 진심으로 그를 사랑하는 듯한 눈빛이었었다.
그렇기에 자신의 진심도 어필하기 위해.
그를 바라봤지만, 그의 눈빛은 애석하게도 냉랭했었었다.
그저, 남을 바라보는 눈빛.
슬프지는 않았다.
자신이 저지른 과오는 사과 몇 번으로 끝날 것이 아니란 걸 이제는 아니까.
다만 그가 유서윤이란 좋은 사람의 곁에서 웃는 걸 볼 때면, 착잡함과 기쁨이 섞인 애매한 감정은 조금 들었었다.
후회되기도 했고.
있을 때 잘할 걸.
하지만 후회만 하기엔 이제 너무 많은 강을 건너버렸고,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녀가 씁쓸히 미소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좋았습니다. 호흡도 잘 맞았구요.”
“허허, 다행이군. 자네 같은 탱커가 전방을 맡아준다니 든든하구만그래. 그래서... 혹시 저번에 얘기한 것은 어찌되었는가? 진전의 기미가 보이는가?”
강백이 기대감을 비치며 물었다.
그녀의 계약 조건이었던, [ 이강준을 매니저로 붙여주는 것 ]에 대한 물음이었는데.
안나는 단호히 고개를 가로 저어버렸다.
“아뇨.”
“어허, 아직 시간은 많으니 차근히 노력해보게. 뭐... 서둘러주면 좋긴하네만.”
그녀가 제시한 조건은 강백에게도 이득인 조건이었었다.
서윤과 이강준을 떨어뜨려놓을 수 있을 테니까.
아니, 사실상 그에겐 완벽한 조건이었었다.
자신은 그저 `유안나의 계약조건이었고, 어쩔 수 없다`며 제 딸의 비난을 안나에게로 돌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안나가 강제로라도 그를 데려가줬으면 했지만.
그녀가 재차 조건을 걸었던, [ 자신이 원할 때까진 강제로 하지 않는다 ]는 것 때문에 조바심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안나는 그의 당부를 거절하듯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노력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이번 레이드에서 많은 것을 느꼈거든요. 서윤이는 강준 씨를 많이 사랑하고 있어요.”
“아, 아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노력할 필요가 없다니...?”
“제가 둘 사이에 끼어들 일이 아니라는 거에요.”
“허어...!”
안나의 말에 강백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쇼파에 몸을 기댔다.
원목으로 된 쇼파 팔걸이를 두드리는 그의 손가락이 불안감을 표출한다.
“이런이런... 큰일이구만. 서윤과 녀석을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는 말일세. 더 사이가 깊어지기 전에.”
“대신.”
안나의 짧은 말에 초조히 원목 팔걸이를 두들기던 강백의 검지가 멈춰선다.
대안을 제시하려는 그 말에, 강백이 다시 상체를 일으키며 화색빛을 띄었다.
“말해보게, 어서. 좋은 수가 있는 겐가?”
“서윤이가 좋아할 만한 남자를... 제가 데려 오겠습니다. 그녀라면 꼭 좋아할 거에요.”
“어허! 그런가? 헌데... 녀석이 내가 주선하는 만남은 계속 피하고 있다는 말이지.”
“그건 걱정마세요. 서윤이라면 거절할 수 없는 남자이니까요.”
안나의 핑크빛 입술이 고운 곡선을 그렸고, 강백의 백색수염 역시 그 끝을 올린다.
“좋구만그래! 자네 아주 복덩이야, 복덩이 허허. 근데 어떤 사람인가?”
안나가 그 남자를 떠올리며 미소지었다.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 책임감과 사명감, 인내심이 높고 실력과 인성도 최고인 남자에요.”
유안나란 한국 최강의 헌터가 칭찬하는 그 남자가 당연히 헌터일 거라 생각한 강백은, `옳거니!`라며 원목 팔걸이를 탁! 쳤다.
그리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안나는 그런 그를 보며 씁쓸히 미소지어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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