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6)D2 산림 던전 레이드 (2)
…부러운 얼굴로 누나란 단어를 되새김질하지 말라고.
유안나의 나이가 서윤과 동갑이기는하지만, 3년간 미녀사총사 파티를 맡으며 결코 친근한 호칭을 써본 적이 없었다.
늘 헌터님, 헌터님.
그년들이 내게 호칭을 편하게 하라는 얘기가 없었긴하지만서도.
만약 그랬다하더라도 이를 깨물고 헌터님이라 불렀을 거다.
서윤이 보란듯이 어깨를 으쓱이며, 내 팔짱을 껴 상체를 기댔다.
아… 휴식시간이라 잠시 벗어둔 갑옷에, 그녀의 말랑하고 육중한 무언가가 팔꿈치 즈음에 닿았다.
오, 신이시여.
“왜? 강준이랑 나랑은 친한 사이니까 누나라 부를 수도 있지. 꼭 헌터랑 매니저는 딱딱해야해?”
“아니… 그럴 수도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어서. 많이 친한가보구나, 둘이.”
“그럼, 강준이랑 나는 데이트도 하는 사이라고~ 그치?”
어, 그렇긴한데.
누나도 그걸 진짜 데이트라 생각하고 있었던 건가?
에이, 아닐 거야.
그냥 유안나가 아니꼬워 자랑하고 싶으신 거겠지.
“봤어.. 사진. 둘이 잘 어울리더라.”
뭐야, 그런 서글픈 얼굴로 그런 얘기하지 말라고. 누가 보면 꼭 실연 당한 전여친이라도 되는 것 같잖아.
…아니, 이미 김배리와 최수창의 눈빛이 그런 사이로 보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럼~ 강준이랑 나랑은 찰떡궁합인걸. 그치? 강준아.”
“그, 그럼요, 하하.”
“…처음 보네. 웃는 얼굴.”
안나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처음 보겠지, 당연히.
네년들과 일할 때 웃을 일이라고는 박나영이 술 취해선 `야, 웃어!`라며 뒤통수를 후릴 때뿐이었으니까.
…흐음, 그나저나 나를 가운데 두고 미묘한 신경전을 하는 듯한 상황에 몸둘 바를 모르겠다. 그렇다고해서 그만하라며 중재하는 것 또한 모양새가 이상하지 않은가.
좌S 우A에 최수창의 시샘과 동경어린 눈빛이 내게 닿는다.
김배리는 여자의 촉으로 무슨 상황인지 파악 중인 것 같고.
어휴… 나도 모르겠다.
알아서들 생각해라.
그렇게 간단한 휴식시간을 마친 우린 곧장 A5 구역까지 토벌을 시작했다.
전방을 든든히 탱킹하는 유안나에 서윤과 김배리는 스킬을 난사했고, 최수창 역시 안나의 입에서 `힐!`이라는 재촉이 나올 새도 없이 적시에 힐과 리커버리를 시전했다.
검은 깃발이란 대형 길드에 김배리도 명문 길드라 불리는 하얀 늑대들 길드.
그런 실력자들이 모여서 그런지, 산림형 마물들은 보이는 족족 쓰러져댔다.
ㅡ끼잉!
ㅡ꾸엑!
“전방에 레드베어 출몰요! 머리 쪽에 점사해주세요!”
“네엡~!”
어우, 워울프 가죽 벗기다보면 투르카 뿔돼지가 픽픽 쓰러져대니 눈코 뜰 새가 없다.
거기다 뿔돼지쉑은 뿔을 자르느라 시간도 조금 걸리는데.
거 좀, 살살들 좀 잡지. 이러다 반나절도 안 되서 토벌 끝날 기세다.
ㅡ쿠웅!
나의 마음 속 외침을 알 리 없는 파티는 레드베어를 쓰러트림으로서 기어이 A4 구역까지 토벌에 성공했다.
던전에 진입한 지 고작, 3시간이 지났을 뿐이었다.
실력자들을 따라다니다보면 자연스레 캐스팅 실력이 오른다는 말이 괜히 있는게 아닌 듯싶다.
실력이 안 오르는 캐스터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까.
나 역시도 처음엔 마물 가죽 벗기기에 급급했었는데, 재능이 있는 건지, 장비빨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몇 번 벗기다보니 어느새 20년 경력의 횟집사장마냥 쑥쑥 가죽을 벗기고 있었다.
뿔돼지의 뿔은 뭐.. 오리하르콘으로 코팅된 전기톱이라도 가져와야할 듯싶고.
어쨌든, 어느새 마나포켓의 용량이 60퍼센트까지 차올랐다.
마물의 가죽과 부유물은 연금학 재료 및 방어구 제작재료로 사용되어 사용가치가 높았지만, 획득량이 많다보니 값어치가 높지는 않았었다.
돈이 되는 건 고블린 형의 지능이 있는 이족보행 마물이 수집하고 있는 희귀 전리품이나 희귀 광석과 약초들.
산림 던전은 특히나 만병통치약이라 불리는 만드라가 간혹 채집되었었는데.
만 번 레이드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녀석이라 기대는 안 하는 편이 좋았었다.
ㅡ쿠오오오!
그때, 전방에서 우렁찬 포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산새들이 푸드득 날갯짓을 하며 날아갔다. 일순간 고요해지는 주변.
산짐승 몇몇이 도망가는 것이 보였고, 이내 나무와 수풀 너머에서 전해져오는 스산한 기척이 우리의 감각을 찌른다.
아무래도 A4 구역에 서식하는 중간 보스, 웨어울프인 모양이다.
사족보행인 워울프와 달리, 이족보행하는 울프로 어느 정도의 지능과 발달된 다리로 뿜는 속도, 리치가 긴 공격 탓에 꽤나 상대하기 어려운 중간 보스몹이었었다.
ㅡ서벅서벅.
“웨어울프에요. 모두 마나 채워주시고, 힐러님은 어그로 끄는 순간 배리어 부탁해요.”
“넵.”
낮게 속삭이는 전략.
이미 파밍을 마친 난, 그들의 숨 막히는 전운을 후방에서 오롯이 느끼며.
침을 삼켜야했다.
ㅡ쿠오오!
ㅡ쿵쿵쿵!
근접했다, 느꼈을 무렵 일순간 수풀을 가르고 쇄도하는 웨어울프.
…너튜브로 봤을 때보다 두 배는 큰 것 같은 몸집이다. 거기다 광기 어린 붉은 눈동자는, 그야말로 오금을 지리게 만들었고.
확실히 B급 던전의 보스보다 더 압도적인 위용을 내뿜는 A급 중간 보스였다.
“아이언 월!(iron wall)”
ㅡ휘잇!
웨어울프의 거대하고 긴 손톱이 닿기 전, 안나가 방패 끝을 지면에 박으며 스킬을 시전했고, 그녀의 앞에 거대한 반투명한 장벽이 생겨났다.
ㅡ까앙!
그 장벽에 부딪힌 웨어울프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손톱을 휘둘렀고, 저릿한 파열음이 고막을 찢을듯 울려퍼진다.
하지만 안나는 별 일 아니라는듯, 한 손으로 스킬을 유지하며 후방에 공격을 지시했다.
“지금이에요! 곡사공격으로 퍼부으세요!”
“넵! 레인지 퍼폼(Range pupom)!”
“그정도는 알아서 한다고! 애로우 커즈(arrow curge)!”
그 리더의 공격명령에.
시위를 팽팽하게 당겨둔 궁을 하늘로 들고는 저마다의 스킬명을 외치며 스킬을 시전하는 서윤과 김배리.
이내, 하늘로 쏘아진 화살이 태양빛에 삼켜졌다가 강한 빛줄기와 함께 하강해 웨어울프의 위로 매다꽂힌다.
ㅡ슈우욱! 푸욱!
ㅡ쿠에엑!
어깻죽지와 등에 커다란 화살이 꽂혔고, 치명상을 입은 웨어울프가 고개를 젖히며 비명을 내질렀다.
헌데 딜량이 상당했기에 어그로가 풀려버렸고, 주둥이로 피를 흘리면서도 서윤과 배리를 노려보는 웨어울프.
장막의 옆으로 돌아가려는 지능적인 움직임에 급히 안나가 새 스킬을 시전했다.
“포커스 아이!(focus eye)”
탱커의 주스킬인, 강제로 어그로를 끄는 스킬이었다. 안나의 눈동자가 모두 흑색으로 바뀌었고, 딜러 쪽으로 눈을 돌렸던 웨어울프가 홀린듯 제자리로 돌아온다.
그리고 다시금 장막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ㅡ까앙!
ㅡ파악!
유지시간이 있기에 어그로를 끈 동안 폭딜이 필수였었다. 그에 합이라도 맞춘듯, 서윤과 배리는 곧장 곡사공격을 퍼부었다.
“애로우 레인!(arrow rain)”
“블리자드 보우!(blizzard bow)”
서윤의 금색빛 화살비와 배리의 얼음빛 거대한 화살이 다시 한 번 태양을 뚫을듯 하늘로 솟구쳤고 철장막을 공격하던 웨어울프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질긴 가죽과 근섬유를 꿰뚫는 섬짓한 소리와 함께 피분수가 솟구친다.
ㅡ크아아악!
동시에 크게 휘청이는 웨어울프.
이미 전세는 기울었지만, 송곳니를 드러내는 웨어울프는 마지막 발악이라도 하듯 크게 포효했다.
공기가 파동하는 듯한, 세찬 바람이 우리를 덮친다.
역시, 쉽게 죽지는 않는다는 건가.
ㅡ쿠오오!
하지만 그 포효하는 틈을 타 안나가 서윤을 쳐다본 후, 장막을 걷었고.
미리 준비하고 있던 굵은 화살이 보랏빛 마력에 휘감긴 채, 엄청난 파공음을 내며 날아가 웨어울프의 벌어진 주둥이에 박힌다.
그때도 느꼈지만, 화살이 발사되는 것보단 무슨 포탄이 날아가는 듯한 엄청난 파공음이었다.
ㅡ후우웅!
ㅡ콰직!
두개골이 박살나는, 끔찍한 소리.
그리고 사후경직되듯 굳어버리는 웨어울프.
ㅡ해치웠나? 라는 못배워먹은 생각이 들기 전에 기어이 웨어울프는 사나운 주둥이를 벌린 채 뒤로 고꾸라진다.
ㅡ쿠웅!
육중한 몸집답게 쓰러지는 소리도 대단하다.
한바탕 땅이 떨린 후, 부산스레 흩날리는 흙먼지와 나뭇잎들이 가라앉길 기다리면서도 전투태세를 놓치 않는 파티.
그 모습에 등어리에 묘한 소름이 돋는다.
거대한 A급 중간 보스 마물의 레이드를 생생하게 목도한 탓일까, 영상으로는 느낄 수 없는 전율 같은 것이 온 몸을 강타했다.
마치 내가 직접 레이드를 뛴 것도 같은 떨림.
저 신비롭고 아찔한 스릴을 함께 체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괴수를 상대하는 영광스럽고도 숭고한 결투에 나도 기여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환상적인 스킬이 난무하며 촌각을 다투는 그 박진감 넘치는 결투를 나도 해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텐데.
아쉽지만 이렇게나마 대리만족하는 걸로 끝내야겠지.
난 캐스터일 뿐이니까.
멋진 검이나 활, 지팡이 대신.
가죽 벗기는 구르카를 들고 웨어울프에게로 다가갔다.
눈을 까뒤집은 웨어울프는 긴 설육을 벌어진 주둥이 바깥으로 내민 채 절명해있었었다.
“휴,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방패를 등에 매며 말하는 안나에 파티원들은 저마다 결투소감을 내뱉는다.
“하하, 역시 S급이시라 그런지 배리어 넣어드리는 거 말고는 뭐한 게 없습니다.”
“어그로 제대로시던데요? 스킬 사용하고도 어그로 실패하는 경우도 있던데.”
“호호, 아녜요. 기본적인 스킬인걸요.”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배리씨 궁 솜씨 장난 아닌데요? 블리자드 보우는 진짜 최고였어요.”
마치 멋진 게임 한 판을 끝낸듯 대수롭지 않게 서로의 용맹함을 칭찬하는 그들은 소설 속 전장을 누비는 전사들처럼 멋져보였다.
…나도 각성할 수 있을까?
안 되지.
각성석이 얼마짜린데.
돈이 있다한들 일반인들은 입찰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치열한 대기업과 정부기관의 경쟁에 어떻게 사겠는가.
그래.
이렇게라도 대리만족이나 해야지, 뭐.
**
“강준아, 웨어울프 뭐 없었어? 뭐 불그스름한 거라던지?”
어느새 A5 구역까지 토벌한 우린 휴식 겸 식사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샌드위치를 베어문 서윤이 다시 한 번 내게 물었고, 난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웨어울프의 배를 갈라보았지만, 아쉽게도 기대에 찰만한 전리품은 보이지 않았었다.
물론 돈이 될만한 부산물들은 있었다.
`기대에 찰만한` 전리품이 없을 뿐.
“별 거 없더라구요.”
“그래..? 아쉽네..”
실망하는 그녀에게 우유를 건넸다.
찾으시는 전리품이라도 있는 건가.
“이것도 드세요.”
“고마워, 너도 어서 먹어.”
레이드는 사람을 빠르게 지치게 만든다.
정신적 육체적 소모가 상당하다는 것이다. 아마 각성육체가 아니고선 A1 구역부터 허덕대고 있었을 터다.
그렇기에 허겁지겁 배를 채우는 김배리와 최수창은 식사에 열중이었고, 안나는 우리가 건네준 삼각김밥을 먹고 있었다.
ㅡ탁탁.
식사를 마친 서윤이 손바닥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안나의 옆을 지나치며 조용히 그녀를 호출했다.
“안나, 잠깐 나 좀 봐.”
…이거, 나는 따라오지 말라는 뜻이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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