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0)발광하는 브로치, 아버지의 근심
설렘과 분노가 공존했던 하루가 끝나고, 밤이 되었다. 씻고 나온 유서윤이 일기를 쓴다며 방에 들어갔다. 스물 여섯이란 나이에 아직 매일 일기를 쓰다니, 딱 그녀 답게 여성스럽고 소녀틱한 게 잘 어울리기는 했다.
나 역시 정리를 하곤 방에 들어왔다.
그리고 잠이 들기 전, 하루 루틴의 끝인 휴대폰질을 시작했다.
“역시... 시끌벅적하구만.”
예상대로 커뮤니티엔 오후에 있었던 유서윤과의 데이트(?) 사진과 길거리에 마주했던 소이현에 대한 글들이 있었고, 댓글은 각종 추측들로 갑론을박 열띤 토론이 펼쳐지고 있었다.
ㅡ둘이 사귀는 거 아님?
ㅡ설마 그냥 같이 다녀준 거겠지? 그런 헌터들 많자느.
ㅡ식당에선 손도 잡았다던데? 빼박임.
ㄴ헐 진짜?
ㄴㅇㅇ내친구가 봤다캄
ㄴ손잡은거는 노답인데?
ㄴ와 ㅅㅂ 개부럽다 진짜.
ㅡ글고 저 매니저 얼마 전에 미녀사총사 파티 나온 사람임.
ㄴ와.. 바로 유서윤으로 갈아탄 거? 능력 쩌나보네.
ㄴ가온에서도 연봉 장난아니었다던데?
...으흠, 역시 사귄다는 쪽으로 몰아가는 분위기인가. 근데 손 잡은 거는 아닌데. 아무래도 카더라 통신에 와전이 되고 있는 모양이다.
ㅡ밥먹었수산시장? 요즘 내가 미는 유행어임.
ㄴ오늘은 내가 민다!!(대충 절벽에서 휠체어 미는 짤)
ㅡ유서윤하고 데이트라니... 대박이다. 나도 헌터 매니저나 해볼까.
ㄴ아무나 안 시켜줌.
ㄴㅇㅇ넌 강육수 당첨.
ㄴㅈㄲ너나하셈.
...뭐, 그녀의 말대로 관심을 피할 수 없다면 즐겨야겠지. 그래도 생각보다 나에 대한 비하발언이 많이 보이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만약 그랬다면, 앞으론 진짜 다니기 힘들었을 텐데.
ㅡ근데 길에서 소이현이랑 마주쳤다던데 진짜임?
ㄴㅇㅇ내친구가 봤다캄
ㄴ니친구 무슨 이글아이임?
ㄴ길에서 마주쳤는데 무슨 얘기하더니 소이현이 바닥에 주저 앉았다더라 눈물도 흘렸다던데?
ㄴ헐 ㅅㅂ 설마 사겼던 거 아님?
ㄴ킹리적갓심 가능한 부분.
ㄴ소이현이랑 헤어져서 길탈했고 유서윤으로 갈아탄거임? 저ㅅㄲ 꼬삼 ㅅㅂ
ㄴ그럼대박인데 진짜 꼬삼이어라제발
...으음, 미안하게도 꼬삼은 아닌데.
근데 소이현이랑 사겼다가 헤어져서 길탈이라니.
그리고 유서윤으로 갈아탔다고?
시나리오는 좋다만, 내가 무슨 희대의 카사노바라도 되는줄 아는 건가.
뭔가 숨겨진 능력남 컨셉이 부담스럽기는 했지만.
어쨌든 썩 나쁘지는 않은 기분이다.
휴대폰을 끄고 천정을 보며 누웠다.
눈을 감았다.
식당에서 있었던 그녀의 농담이 떠올라 피식 실소가 나왔다.
이상형이 나라니...
그런 황당한 농담이 어딨단 말인가?
방금 커뮤니티글만 봐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댓글이 있을만큼 그녀와 나의 피사체 차이는 꽤 컸다.
예의상 내게 늘 잘생겼다, 해주는 유서윤이지만 객관적으로는 솔직히 나도 알고 있었다.
잘생기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흔한 얼굴이라고.
게다가 헌터이지도 못한 내가 그녀와 어울리는게 가당키나하겠는가.
만약...
만약...
각성석으로 헌터가 되어 A급이라도 된다면 모를까.
“말도 안 되는 소리... 각성석이 뜰 리가...”
그리고 뜬다해도 경매낙찰가가 수십억을 호가하는데, 입찰할 돈도 없었다.
동생 이식수술비는 충분하지만, 수십 억을 모으려면 이미 헌터로서 퇴직 정년기에 오르고 말 터다. 아니, 불가능했다.
각성석을 획득한 파티원이나 캐스터가 구입하면 조금 싸기는하지만... 어쨌든 내게는 없는 돈이었었다.
쓴 생각에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둠 속에서도 푸른 빛을 띄는 희귀 브라카스 브로치가 한번 영롱히 발광(發光)하며 어둠을 몰아낸다.
유성이 떨어지듯, 스쳐 지나가는 푸른 빛무리.
마치 어둠 속에 몰아치는 파도와도 같은 빛무리가 한차례 아름다운 푸른 방울을 뿌리며 지나갔다.
눈을 감은 터라.
보지는 못했지만.
**
“흐음...”
라온제나 길드 건물의 3층, 대표실이란 명패가 붙은 사무실에 낮은 침음이 흘렀다.
올백머리와 슈트차림이 잘 어울리는 미중년이자, 라온제나 길드의 최고수장.
유강백은 집무실 의자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긴박하고 짜릿한 스릴이 가득했던, 던전에서의 레이드에 비하면 따분하기 그지없는 길드장이란 자리.
그탓에 커뮤니티에서 재밌는 게시글이나 짤들을 보는 걸로 시간을 떼우고는 했는데, 오늘은 하나의 게시글에 꽂혀 있었다.
제 길드의 헌터인 유서윤과 매니저가 찍힌 사진이었다.
“흐음... 곤란하게 됐군.”
헌터와 매니저가 살갑게 지내는 것은 당연히 축복해야할 일이다.
24시간을 함께하는 둘이기에 서로 끈끈한 파트너쉽을 맺는다는 건 좋은 일이고, 그래야만 레이드나 성장에 좋은 영향을 미치기에 한숨을 쉴 만한 일이 아닌 것이다.
다만, 그 사이가 너무 가까워지기 시작하면 위험했다. 사내커플의 말로(Finish)는 늘 좋지 못하니까.
게다가 길드 내 최고의 헌터이자, 제 사랑하는 아내와의 결실인 `딸` 유서윤이기에 더욱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휴대폰을 끄고 의자에 기대었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감았다.
어릴 적부터 입버릇처럼 얘기했던 말들이 떠올랐다.
ㅡ우리 딸의 베필은 최고의 헌터여야만 한다.
사랑하는 자식이자, 금지옥엽 키운 딸.
게다가 사별해버린 아내에게 했던 약속을 위해서라도 그녀만큼은 최고의 남편을 만나게 해주고 싶었었다.
헌데.
주선하는 만남은 죄다 거부했었다.
딸이 던전에 들어갔을 때마다 레이드가 끝날 때까지 마음을 졸여야했다.
사망률이 현저히 낮기는하나, 어쨌든 괴수와 싸우는 일은 위험했으니까.
그렇기에 S급 혹은 실력 있는 A급 헌터들 중, 힐러나 탱커 계열의 남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했었었다.
그녀를 위해, 목숨도 바칠 수 있고.
위험에서 자신의 딸을 지킬 수 있는 능력자들을.
하지만 거부하기 일수인데다 힘겹게 사정해 만남을 성사시켜도 늘 무미건조한 반응들 뿐이었었다.
ㅡ별로야.
ㅡ내 스타일 아냐.
ㅡ겉멋만 든 사람이야.
혹시나싶어 외국인 헌터까지 섭외했었지만, 늘 실패였었다.
속에 천불이나고 답답해 한번은 물어봤었다.
대체 어떤 남자를 만나고 싶은 거냐고.
ㅡ훌륭한 인성에 일에 대한 책임감, 상대를 배려하는 헌신적인 사람이 좋아.
아니, 그런 사람을 찾으려면 길게 만나봐야되지 않겠냐며 다그치기도 해봤지만.
늘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하는 딸이었었다.
속은 타들어갔다.
S급으로 진급하기 전에, 어서 S급이나 A급의 실력자를 베필로 붙여 딸이 위험하지 않게 만들고 싶건만.
아비의 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윤은 태평이었었다.
근데.
“설마 저녀석이었던 게냐....”
어릴 적부터 좋아하는 남자가 있다고는 했었지.
하지만 어릴 때였고, 성인이 된 후로는 얘기하지 않았었기에 잊고 있었었다.
숱한 남자매니저, 잘생긴 매니저도 있었지만 그들과 바깥 나들이를 하는 경우는 일절 없었었다.
착한 딸이었기에 그들에게도 친절했지만, 딱 거기까지.
선을 그어놓은 듯한 친절은 사무적인 태도들이었었다.
하지만 사진 속 서윤의 미소는 더 이상 사무적인 친절이 아니었었다.
진심어린 미소, 자신에게도 자주 비치지 않는 환한 미소는 확실히 달랐다.
아비의 마음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토록 S급 헌터를 만나라며 발 벗고 뛰어다닌 노력도 무시하는 것이다.
“잠깐.. 그러고보니..?”
돌이켜보니 가온 길드에서 이강준 매니저의 사표수리가 되기도 전인데.
자신을 찾아와 공석이 된 매니저 자리에 데려올 사람이 있다고 했었다.
...설마, 설마?
“아닐 거야... 우연의 일치일 뿐이겠지.”
고개를 저었다.
설마 코맹맹이 어린 시절부터 얘기했던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진짜는 아니겠지.
아닐 거다.
말이 안 되는 일이니까.
“흐음... 골치 아프게 됐군.”
신음을 삼키며, 상체를 일으킨 유강백이 인터폰을 눌렀다.
ㅡ네.
“...그를 불러주게.”
ㅡ네.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음에도 비서는 신속히 답했다.
인터폰 버튼을 끄고,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대며 한숨을 쉬는 유강백.
아무래도 둘 사이를 유의 깊게 지켜봐야할 듯싶었다.
혹여 그녀의 마음 속에 든 내정자가 이강준이라면... 가만히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을 테니까.
헌터도 아닌, 일반인에게 자신의 딸을 절대 맡길 수는 없었다.
지끈대는 머리에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감았다.
그렇게 잠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구상하고 있자 인터폰이 울린다.
ㅡ삐.
뭐지? 싶어 실눈을 떴다.
헌데 뒤이어 들려오는 비서의 목소리에.
뉘었던 상체를 일으켜야했다.
“뭐? ...누, 누구?”
ㅡ유안나 헌터가 대표님을 뵙고자합니다.
“뭐? 아니, 왜?”
ㅡ...그건 저도 잘.. 어떻게 할까요?
유안나 헌터.
자신의 딸과 같은 아카데미를 다녔었고, 미녀사총사라는 S급 헌터 파티의 리더이기에 잘 아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가온 길드에 입단한 이후로 왕래가 일절 없었었는데.
무슨 연유로 기별도 없이 이렇게 불쑥 찾아왔다는 말인가?
더욱이 S급 헌터 정도 되면 극빈대우라 매니저나, 길드측에서 연락을 해올 터인데 말이다. 정부에서 토벌 기간 금지령이 내려졌기에 매니저는 공석일 테지만, 길드 측을 통하지 않고 찾아온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의도를 종잡을 수 없는 방문에 잠시 혼란에 빠져있던 그가 입을 떼었다.
“들어오라하게.”
곧이어 대표실로 들어서는 유안나.
진짜 그녀였다.
대한민국에서 스무 명도 안 되는 S급 헌터라는 최강의 헌터 중 한명이자, 핑크빛 머리칼이 트레이드마크인 그 유안나가 진짜 자신을 찾아온 것이다.
당찬 걸음으로 들어와 제게 고개를 숙이는 유안나에 그는 한번 더 놀래야했다.
정부에서 마련한 자리.
공적인 자리.
헌터 회의 자리.
그 어떤 곳에서도 자신에게 저리도 고개를 깊숙히 숙이는 적이 없었던 그녀였고, 제 부모가 아닌 이상,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않을 사람이란 걸 잘 알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라온제나 길드장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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