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8)밝혀진 관계, 분열의 끝 (1)
**
마치 드라마 속 주인공 같기도 하네.
두 명의 미녀들을 옆과 앞에 두고, 바리게이트마냥 주변을 둘러싼 채 웅성대는 인파까지.
어우… 미치겠는데?
“용건만 간단히 해. 보는 눈이 많으니까.”
소이현이 한걸음 다가왔다.
공손하게 모은 앞손이 누가 봐도 잘못을 고하러 온 사람 같아보였다.
…인터넷이 떠들썩하겠는데.
“사과하려고.. 오빠한테 모질게 군 거 미안해.”
“이제와서 사과한다고? 사과하고 싶거든, 안나에게 물어봐. 어떻게 사과해야 반성을 하는 건지.”
말을 마치곤 몸을 돌렸다.
그리고 옆에서 상황파악을 하느라 넋을 놓고 있던 유서윤의 등을 가볍게 밀며 이곳을 벗어나려했는데.
소이현의 말에 걸음을 멈춰야했다.
“으응? 그, 그게 무슨. 아니, 오빠. 진짜, 진짜 안나 언니랑 사귀는 거야?”
…하, 아무래도 해명은 하고 가야되겠네.
우리 유서윤 헌터님께서도 많이 놀래신 듯하고.
그리고 어차피 `침몰하는 배` 계획 같은 것의 성공여부는 크게 중요치 않았다.
솔직히 그런 어설픈 장난에 속아 서로 물어뜯고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고 말이다.
돌이켜보면 진짜 빡대가리가 아니고서야 그거에 속을 리가 없었다.
그냥, 3년간의 지옥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한 일종의 던지기식 장난 같은 것.
그렇기에 몸을 돌려 다시 소이현을 노려보았다.
이제와 같잖은 사과를 하겠다는 심보는 언제 느껴도 역한 듯싶다.
늘 모욕질에 뒤통수를 때리거나 발로 차는 등의 폭력까지 써가며 내 머리 위에 군림해 있을 때는 언제고, 이젠 피해자 코스프레까지 하는 꼴이라니.
아무래도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 라는 희대의 명언을 소이현에게도 가르쳐줘야할 듯싶다.
“웃기지마, 설마 그런 헛소리를 진짜 믿은 거야?”
“뭐, 뭐라구…? 그, 그게 무슨 말이야…?”
…흠, 아무래도 믿었나보네?
하여튼... 물어보라고 던진 미끼를 의심 하나 없이 곧이곧대로 물어버리다니.
헌터로 각성 안 했으면 대체 어떻게 먹고 살았을까 몰라, 이런 허접스런 헛소리를 진짜 믿어버리다니 말이다.
“…유안나는 내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반성을 인정받았을 뿐이야. 너희들을 떠날지 말지는 스스로가 알아서하겠지.”
“아, 아니.. 그게 무슨 말이냐구…? 언니랑 사귀는게 아니라고…? 근데.. 근데 왜 우릴 떠난 건데…?”
누가보면 비련의 여주인공인지 착각할 정도로 소이현의 작은 얼굴은 슬픔으로 가득했다.
구역감이 치솟을 정도로, 역한 표정이었다.
“그걸 몰라서 물어? 근데 사과는 왜 하는 건데? 사과하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그냥 닥치고 돌아와주길 바라는 거 아니냐? 다시 호구처럼 떠받들어주길?”
“아..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언니가 오빠집 드나들던게… 잘못을 빌러 갔던 거라고…?”
“귀찮게 하지 말고, 안나처럼 제대로 사과 안 할 거면 다신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마라.”
그리곤 걸음을 돌렸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렇다고 소이현을 끌고 어딘가로 가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고.
유서윤의 오해만 풀 수 있는 선에서 마무리를 짓고, 그녀의 등을 가볍게 밀며 서둘러 현장을 빠져나왔다.
등 뒤에서 풀썩, 하는 소리를 듣자하니.
다리라도 풀린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돌아볼 이유는 없었다.
“가, 강준아?”
“가서 얘기드릴게요. 어떤 일이 있었는지.”
“으, 으응.”
유서윤에게만은 호구 같았던, 등신 같았던 나의 3년을 숨기고 싶었건만.
아무래도 저 거머리들은 그마저도 내게 허락치 않는 것 같다.
하여튼 이기적인 것들.
**
ㅡ풀썩.
기어이 다리가 풀리고만 소이현은 주변 시선을 의식할 정신도 없었다.
헤집어놓은 실타래마냥 일순간 뒤엉키며 풀 수도 없게끔 꼬여버린 생각에 사고회로는 끊어질 지경이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이 여기서 무릎을 꿇고 주저앉아야하는 이유도, 자신이 저지른 잘못도, 모두.
‘…그럼, 그럼 언니는 우리를 위해서..?’
어젯밤, 이강준의 옷으로 보이는 걸 입고 들어오는 안나에 솔직히 화가 났었다.
이건 자신들을 무시하는 처사라고.
어떻게 뻔뻔하게 그의 옷을 입고 하우스에 올 수 있냐고.
신나희의 분노에 동조할 뻔했었었다.
하지만 아직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지 않았던 데다, 안나의 입에서 듣지 않았기에 최대한 이성을 조절했었다.
나희가 이강준에게서 직접 듣고 왔다지만, 어쨌든 자신이 직접 들었던 것은 아니니까.
단지, 의심스런 정황이 한 두개가 아니었었기에 의심은 굳히고 있었다.
헌데.
그 미련한 의심과 불신이 한순간에 깨지고 말았다.
자신의 리더, 미녀사총사 파티의 리더인 안나는 파티를 위해 이강준에게 잘못을 빌러 갔던 것이었고.
자신과 나희는 그런 리더를 의심하고만 것이다.
‘아아.. 안 돼..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후회스럽다못해 절망적인 상황.
이강준이란 매니저를 떠나보낸 것도 모자라, 이젠 파티의 리더마저 잃을 수도 있게 되버렸다.
이현의 백옥피부엔 창백한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안 돼.. 안 돼.. 그래서 언니가…’
그리고 이제야 이해되는 퍼즐들.
러브레터라며, 이미 불신이 가득한 눈으로 봐버린 반성문을 러브레터라 믿고는 나희에게 떠벌렸고.
강준의 냄새가 난다며 살을 섞은 것은 아닌지 질투하고, 그의 집을 들락거린다하여 의심을 굳혔었다.
그리고 어제는.
나희와 함께 안나를 몰아세웠었고.
배신자 취급에.
변절자 취급에.
쓰레기 취급으로.
결국 안나를 화나게 만들었으며, 오늘 강준을 만나기 전까지도 적반하장이라며 씩씩댔던 자신이었다.
헌데… 이제는 180도 달라져버렸다.
쓰레기는 자신이었고.
한 사람을 괴롭혔던 것도 모자라, 이젠 생사를 나눈 동료를 배신자로 내몰았다.
나희의 말만 철썩 같이 믿고는 제대로 확인을 안 한 자신의 잘못이다.
‘그래서… 그래서 무릎도 꿇었고 우리랑 다르다고 했었던 거구나…’
후회스럽고, 자신이 원망스럽기까지했다.
대체 왜 그랬던 걸까.
몰아세우기 전에, 한번이라도.
단 한번이라도 안나에게 직접 물어봤다면, 지금 이 거리에 앉아 후회하고 있지는 않겠지.
늘 매니저에게 바보, 멍청이, 찌질이라며 놀렸었는데.
이제와 보니 결국 그 모욕들은 자신이었던 것이다.
‘아.. 언니.. 안 돼… 우리 버리면 안 돼에…!’
급히 휴대폰을 꺼내든 소이현.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안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젯밤, 자신을 환멸스럽고 한심스런 눈으로 내려다보던 안나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건 분명히, 자신들이 3년간 이강준을 쳐다보던 `그 눈빛`이었었다.
그 눈빛이 이젠 자신들에게 향하고 있었고, 자신들은 어느새 놀림감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의미였구나.
이런 의미였구나…
강준마저 떠난 마당에, 안나마저 떠나버리면 남은 파티원들은 진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될 지도 몰랐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길드 내, 헌터 간에서 자신들의 이미지가 어떠한지.
어쩌면 그탓에 가온 길드에서도 전담 매니저를 붙이고 끼리끼리 어울려다니며 주변에 피해를 끼치지 않게 미녀사총사란 타이틀로 묶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아니, 이제와 생각해보니 맞았다.
‘제발.. 제발 언니…’
하지만 곧이어 들려오는 메세지에 소이현은 더욱 깊은 절망의 늪에 빠져야했다.
강준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들려왔던, 그 메세지였다.
오늘로서, 두 명에게 차단을 당해버린 것이다.
[ 고객님이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잠시 후에 다시 걸어주시길 바랍니다. ]
소이현의 절망감은 주변에서 들려오는 쑥덕대는 소리마저도 차단시켜버릴만큼, 심연의 나락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결국, 매니저와 리더에게서 버림받아버린 것이다.
“....”
절망에 허우적대던 소이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허망함에 눈빛은 초점을 잃고, 공허하게 떨린다.
휴대폰을 내려다본 그녀가 다시 전화를 돌렸다.
신나희였다.
ㅡ여보세요.
태평하게도 전화를 받는 신나희에 왜인지 화가 났다. 결국 안나를 떠나게 만든 모든 책임은 그녀에게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싶었다.
어쨌든, 그녀의 의심에서 비롯된 일이니까.
ㅡ여보세요? 말을 하세요.
잠시 굳어있던 이현의 입술이 움직였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길드회장에게 헛소리를 떠벌렸을 것이고.
이제... 파티는 끝날 것이다.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미친년아, 너 때문에 우린 이제 좆됐어.”
ㅡ네? 갑자기 무슨 그런 저급한 단어를 쓰세요.
저급한 건 우린데.
전화를 끊어버린 이현이 길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곤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차에 도착한 우리.
부산스런 주변공기가 진정될 때까지, 우린 어색한 침묵 속에서 기다려야했다.
잠시 후, 유서윤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아까 걔... 소이현 맞지?”
“네. 제가 맡았던 헌터였죠.”
“대체.. 무슨 일이야? 유안나는 무슨 말이고?”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다 끝난 일이니까요.”
“어떻게 신경을 안 써... 짐작은 하고 있었어. 걔네들이 너한테 얼마나 못되게 굴었을지는. 근데... 오늘 보니까 보통 일이 아니었구나 싶어서.”
보통 일은 아니지.
그녀들이 내게 행했던 일들은, 내가 묵인하지 않았다면 형사처벌감도 있었으니까.
두 명은 폭력에 두 명은 은근한 갈취까지.
하지만 박차고 나오지도, 3년간 버틴 것도 모두 나의 `선택`이었고, 동생의 이식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했다고 하더라도 나의 `선택`이었다.
그렇기에 최소한의 책임을 통감하고.
그냥 조용히 떠나온 것이다.
인수인계? 그딴 걸 고려할 정도로 그당시의 나는 여유롭지 못했었다.
오히려 고소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들에겐 다행인 일이지.
길드장님께서도 그들의 잘못을 눈 감아 달라며, 인수인계 없이 바로 퇴사하는 것을 허락해주신 거고.
그렇기에 조용히 떠난 나를.
구태여 찾아와 부스럼을 만들어대는 그들에 사실 화가 나기도 했다.
없던 복수심이란 것도 생길 만큼.
하지만 이젠 그저 장애물일 뿐, 한낱 장애물 따위에 화를 내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유안나도, 그랬지?”
응? 그녀의 입에서 유안나의 이름이 나온 것도 모자라.
그녀를 잘 아는 듯한 말을?
“유안나 아세요?”
룸미러로 그녀를 보자, 서윤은 사색에 잠기듯 차창으로 시선을 두었다.
“모를 수가 없지... 아카데미 동급생이었으니까.”
뭐?
아카데미 동급생이었다고...?
설마 그럼 친구인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