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5)인정 받은 그녀, 이별을 고하다..?
결국 이사벨라는 집으로 돌려보내야했다.
그녀에게서 사정이란 게 무엇인지 듣지 못해 찝찝하긴 했지만, 이 정신 나간 년을 처리하는 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혹여 빌라주민이 볼까, 우선 집 안에다 밀어넣고 급히 걸레들을 들고 나와 소변을 닦아야했다.
“하… 많이도 쌌다, 야밤에 시발 이게 무슨 짓이야.”
다시 생각해봐도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온다. 대체 왜 오줌보가 터질 때까지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거야, 짜증나게.
살다살다 다 큰 여자, 거기다 경멸하는 유안나의 소변을 닦는 날이 올 줄이야.
세상사 참, 한 치 앞을 모른다는 말을 하루에도 몇번이고 깨닫는 듯싶다.
고무장갑을 낀 채, 찰박대는 걸레들을 모두 쓰레기봉투에 넣고 현관문에 놓았다.
“하, 대체 뭐하는 짓이냐, 이게…?”
헌데 집으로 들어오자 유안나가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잘못을 저지르고 혼쭐이나는 소녀마냥, 눈물마저 찔끔 흘리는 그녀.
그 모습이 우스워 또 한번 헛웃음을 터뜨려야했다.
“대체 무슨 짓이냐고. 이 야밤에 집 앞에서 뭐하고 있던 거야, 이 미친 년아.”
“훌쩍… 흐윽… 아, 아니… 혹시나 소변보러 갔다가 강준씨가 들어가버리면 어쩌나 싶구… 또 어디에 화장실 있는지도 모르겠구….”
바닥에 놓인 수북한 A4용지들.
설마 내가 올 때까지 반성문을 들고 기다린 건가?
“그러니까 오줌이 마려워도 참고 기다렸다가, 그만 실수했다 이거냐? 아니, 그리 마려우면 일단 집에 갔다가 다음에 오던가.”
“반성문 쓴 거… 얼른 인정 받고 싶었어…”
“뭐?”
그녀에게 내린 숙제는 반성문 50장.
사실 말도 안 되는, 그저 패악질 삼아 내뱉어본 50장인데.
그걸 단 이틀 만에 다 적어왔다니. 역시 근성 하나는 대단하구나 싶었다.
성큼 다가가자 바짝 쫄아서는 소라마냥 움츠러드는 유안나.
늘 내 머리 위에 군림했던 그녀가 이젠 내 발 아래 깔려 겁에 질린 모습을 보고 있자니, 측은해보이기까지 한다.
얼마나 자신을 내려놓은 걸까.
반성문을 쓰며 진짜 반성이라도 한 걸까?
근데 사람은 고쳐쓰는 게 아니라고 하던데.
아직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그래도 뭐, 내게 인정 받고 싶어 전화도 하지 않고 무작정 몇 시간을 기다린 것은 칭찬할만한 일이기는 했다.
끝이 찜찜하기는 했지만.
“흐음….”
반성문을 하나하나 읽어보았다.
손수, 그리고 최대한 예쁘게 글씨를 쓰려는 흔적과 중간중간 눈물자국으로 보이는 얼룩들도 있었다.
유안나는 연신 내 눈치를 보기 바빴다.
“손 똑바로 들어.”
“흐읏..! 미, 미안!”
반성문을 읽어내려가던 나의 눈동자에도 연한 습기가 서리기 시작한다.
3년간 내가 당해왔던 모든 일들이 적힌, 그 고해성사들이 마음을 후벼판달까.
아니면 어루만져 준달까.
바닥을 뚫고 심연의 나락까지 추락했던 자존감이 유서윤을 만나 다시 지면으로 올라오고, 이 반성문을 통해 다시금 싹을 틔우는 것 같은 기분.
왠지모를 벅차오름마저 느껴졌다.
반성문을 바닥에 놓고 유안나를 쳐다보았다.
숙제검사에 잔뜩 겁을 먹은 모습.
늘, 내가 지었던 그 불쌍한 눈동자가 이젠 나를 마주한다.
“잘 썼네.”
짧은 칭찬 한 마디에 유안나의 눈동자에 진한 물기가 일렁이더니, 이내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참회의 진실된 눈물.
오줌보가 터질 때까지 참아 얻어낸 값진 그 인정에 그녀가 서럽게도 울기 시작했다.
“흐으아앙..! 미안해..! 쓰다보니 알게 됐어, 내가 잘못했다는 걸..! 흐아앙! 미안해 미안해, 이걸로 3년간 내가 저지른 잘못들을 없앨 수는 없겠지만 부디 받아줘, 진심으로 뉘우치고 있어 진짜로… 흐아아앙…!”
오늘로서 두번 째 눈물인가.
거짓이 없는 투명한 눈물에 입가에 미소가 퍼진다.
아아, 이거지.
비록 3년의 핍박과 모욕에 대한 보상으론 부족한데다 다른 3명은 아직 반성을 하고 있지 않지만, 이정도면…
이정도면 단단하게 굳은 마음 속 응어리를 살짝은 풀어 줄 수 있으리라.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유안나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 따스한 손길에 안나가 훌쩍이며 눈물을 닦는다.
“이, 이제… 용서해주는 거야?”
“응. 용서할게. 이정도면 너도 충분히 반성한 거 같고, 오줌까지 싸지를 정도로 진심이라는데 받아줘야겠지.”
계단에서의 방뇨를 언급하자, 금세 빨개지는 안나의 얼굴.
늘 표독스럽고 간악하기만 하던 얼굴이 수줍음과 수치심이 깃들자 제법 볼만하다.
안나의 입가에 연한 미소가 번진다.
“다행이다… 다행이야… 너가 인정 안 해주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그렇다고해서 돌아간다는 건 아니란 것 정도는 이제 알겠지?”
복귀 가능성을 일축하는 나의 말에 안나의 고개가 힘없이 숙여진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들고는 웃는 그녀.
“그럼. 그걸 바라고 온 건 아냐… 적어도 오늘은.”
사람은 고쳐 쓸 수 없다더니, 옛말에도 예외가 있기는 한 듯싶다.
후회를 넘어 반성을 통해 새사람이 된 듯도 보이는 그녀는 한마디, 한마디 진심이 묻어나왔으니까.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볼 일은 끝이다.
3년간 당한 모욕에 3년간 내게 사과하라는 건 말이 안 되지 않은가.
오히려 사과 받는 것도 고역일 터다.
그렇기에 이쯤하기로 했다.
“그래, 그럼 가봐. 이제 볼 일은 없겠네.”
헌데 내 바짓자락을 잡는 유안나.
무릎 꿇은 채 바짓자락을 잡는 모습이 의아하기도 하고, 처량해보이기도 해 잠시 기다리고 있자, 안나가 입을 열었다.
“그… 미안한데… 씻고 가면.. 안 될까? 이대로 갈 수는 없잖아.. 미안해..”
아, 그렇지.
지금 그녀의 스타킹과 팬티가 젖은데다, 무릎 꿇고 앉아있던 터라 젖은 팬티에서 번진 소변에 치마와 블라우스 밑단마저 젖어있었다.
마지막인데, 아무래도 깔끔하게 끝내는게 좋겠지. 방으로 들어가 보일러를 켠 다음, 갈아입을 옷을 들고 나왔다.
ㅡ툭.
그리고 그녀의 앞에 던져주었다.
내가 입던 옷과 바지였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침몰하는 배`에 기름을 들이붓고 불을 지르게끔 만드는 것이다.
어쨌든 그녀를 용서했지만, 나머지 3인방에 대한 처분이 남았고, 무엇보다 이제 새사람이 된 그녀가 3인방에게 돌아간다면 다시 물들지 않겠는가.
새사람이 되었으니, 새출발할 수 있게 도와주는 거라고 생각하기로 한 난 내가 입던 옷들을 준 것이다.
그리고 유안나가 그년들보다 실력이 좋았기에 새로 파티를 구하는 건 크게 어렵지는 않을 터다.
포지션도 흔한 딜러가 아닌, 힐러 다음으로 귀한 탱커니까.
“따뜻한 물 틀어놨어. 씻고 그걸로 갈아입고 가.”
“아… 응, 고, 고마워..”
옷을 집어들고는 부리나케 욕실로 들어가는 유안나. 뭐, 다 큰 성인이 성인의 앞에서 소변을 지렸으니 부끄러울 터다.
ㅡ쏴아아, 물 트는 소리가 들려왔고.
쇼파에 앉아 그녀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음…”
내 집에서 누가 씻는 적은 처음인 것 같은데.
그것도 미모의 여성이?
취기가 오른 탓에 유안나의 씻는 모습이 자꾸만 상상된다.
얼마 전만 해도 같은 하우스에 있었고, 그곳에서 가벼운 차림으로 젖은 채 나오는 걸 볼 때는 욕지기만 처올랐었는데.
사람 마음이란 게 참으로 간사한 듯싶다.
용서했다고, 바로 유안나의 나신에 흐르는 물방울들이 상상되다니.
“어이가 없네, 어이가.”
그런 내 모습이 한심해, 자조적으로 내뱉곤 쇼파에 기대 그녀가 나오길 기다렸다.
잠시 후, 물을 끄는 소리가 들려왔고.
옷을 입는 사부작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다, 다 씻었어…”
몸만 씻었는지, 머리는 뽀송하게 나오는 그녀.
…내가 입었던 바지를 노팬티로 입은 모습에 살짝 꼴릿할 뻔했다.
괴념을 털어내고, 현관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그럼 이제 가봐.”
미운 정이라도 든 걸까.
머뭇대는 그녀의 모습에 왠지모를 묘한 감정이 들었지만, 문을 닫지는 않았다.
질긴 악연, 이렇게 끝내는게 맞겠지.
“슬리퍼… 신어도 돼?”
그녀의 조심스런 물음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워… 그럼…”
내가 입던 옷과, 신던 슬리퍼를 착용한 안나가 현관에 섰다.
이제 지긋지긋한 악연을 끊을 때가 왔다. 그리고 3인방들과의 악연도, 안나와 함께 끊는 것이다.
난 그저 미녀사총사라는 배가 빙산에 꼴아박고는 침몰하는 것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면 될 뿐.
“그럼, 이제 그만 가 봐. 다시는 찾아오지 말고. 나도 진심으로 널 용서했으니까.”
안나의 눈빛에 아쉬움이 묻어나온다.
못내 아쉽기는 하겠지, 나를 데려가기 위해 모욕과 치욕을 감내하며 반성했는데.
“그.. 혹시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
“뭔데.”
“아까… 뒤에 있던 여자는… 혹시.. 여자친구야?”
어라, 아쉬움이 그쪽이 아니었던가?
“여자친구는 무슨. 알아서 뭐하게.”
“아냐? 아, 알았어. 그럼…”
몸을 돌리는 유안나.
그에 문을 닫으려 했는데, 다시 몸을 돌려 360도 돌아버리는 그녀에 멈칫해야했다.
아직도 할 말이 남은 건가.
“또, 뭐.”
“아… 마지막이니까. 하나만 대답해줘..”
“뭔데.”
“이제.. 다시 예전으로는 못 돌아가는 거지?”
예전이라, 그 좆 같았던 3년 전을 얘기하는 건가?
당연히 못 돌아가지, 혹여 유서윤 헌터님의 매니저가 되지 않았다하더라도.
그리고 그년들 모두가 울고 불며 매달려도 돌아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응. 너희들 모두가 매달려도, 안 돌아가. 그리고 어차피 이젠 돌아갈 수도 없어.”
“응? 무슨 말이야..?”
“나, 라온제나 길드에 취직했거든. 그러니 귀찮게 굴지 말고 이제 새 매니저랑 잘 해봐.”
유안나의 커다란 눈망울 속 동공이 확장된다.
놀람을 느끼고 있다는 것.
자기들을 버리고 새 둥지를 틀었다는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아니면 아직 정신 못 차리고 배알이라도 꼴리다는 건가?
“왜? 난 이직하면 안 되냐?”
“아, 아냐. 그런 거… 혹시… 같이 일하는 헌터가… 유… 아, 아니다. 미안.”
“뭐야, 왜 말을 하다 말아. 찝찝하게 굴지 말고 시원하게 얘기해. 어차피 마지막인데.”
하지만 안나는 뒷말을 쉬이 내뱉지 않고는, 내게 인사를 했다.
“아냐.. 알겠어. 그럼 가볼게. 그간 미안했구… 다시 만났… 아, 아니. 가볼게..! 잘 있어!”
또 다시 말을 하다 얼버무리는 그녀에 살짝 짜증이나 다그치려 했지만, 안나는 잘 있으란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도망치듯 계단을 내려갔다.
참나, 마지막인 마당에 못할 말이 뭐가 있다고….
어음, 설마 마지막이 아닌 건… 아니겠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