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4)유안나의 진심이 물이 되어 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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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짠!
청량함 가득한 탄산이 식도를 타고 내려간다. 꿀꺽꿀꺽, 좋은 사람들과 가지는 술자리는 역시 기분 좋은 법이지.
뭐, 한 사람이 꼽사리를 끼고 있긴하지만 적당히 대답만 하며 쭈구리고 있으니 크게 신경쓰이지는 않았다.
“오늘 다들 수고하셨어요. 다음에 B급 레이드 뛸 기회있으면 다같이 해요.”
유서윤의 말에 파티원들은 저마다 고개를 끄덕인다. 사실상 하드캐리해주겠다는 건데, 그 누가 거절하겠는가.
“저야 좋죠! 솔직히 이때까지 뛴 레이드 중에 가장 편했습니다, 하하! 탱킹할 필요가 없더라니까요?”
“호호, 저는 근딜 넣을 틈도 없던데요? 딜 좀 넣으려면 픽픽 쓰러지니까.”
“부끄럽게 다들 너무 그러지 마세요, A급이라서 그런 거에요.”
유서윤이 겸손히 칭찬을 사양하지만, 홍조가 깃든 어여쁜 얼굴엔 미소가 만연히 퍼져 있었다.
백옥 피부에 홍조가 깃드니 마치 겨울에 핀 눈꽃처럼 어여쁘다.
어색하게 웃으며 홀짝이고있는 이사벨라도 예쁜 얼굴이지만, 했던 짓이 있어서 그런지 유서윤과는 비교가 안되는 것만 같다.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는 우리들.
술이 약한 놈이 강나리를 도발하더니, 이내 혀가 꼬이기 시작하는 최도군.
그가 이번엔 이사벨라에게 눈길을 주었다.
“이사벨라씨는 아카데미 졸업하신지 얼마나 됐어요?”
“아... 저, 그... 5년 넘었어요...”
그녀의 고백에 일동 당혹감이 깃든다.
5년, 헌터로서 레이드만 꾸준히 돌다 죽지만 않는다면 B급은 당연하게 진급할 수 있는 시간.
B급인 최도군과 강나리가 2년도 안 되서 진급했었기에, 5년이란 긴 시간 동안 C급이라는 초라한 성적표는 창피한 수준이었다.
유서윤이 급히 잔을 들며 분위기를 전환시켜야했다.
“어떤 사람은 5년이 되도 D급인 경우도 있더라구요. 이제 곧 B급으로 진급하실 거에요. 실력도 나쁘시지 않던데요? 힐량도 많고.”
“가, 감사합니다... 사정이 있어서 이삼 년 동안 레이드를 못 뛰었었거든요..”
사정?
문득 궁금할 뻔했지만, 그녀에 대한 관심 만큼이나 가차없이 묵혀버렸다.
알 게 뭐람, 어디 교도소를 갔다오지 않거나 크게 아팠지 않고서는 사정이랄 게 뭐 있겠어?
하루이틀도 아니고.
“그래요? 그럼 이제 시작이겠네. 열심히하면 금방 오르실 거에요.”
“저도 응원합니닷!”
어째 이사벨라의 응원파티가 된 듯도 하지만, 레이드 시작 때부터 겉돌던 그녀가 이렇게나마 대화에 낄 수 있는 게 차라리 편했다.
연신 고개를 조아리며 공손히 잔을 받는 이사벨라.
C급임에도 힐러라는 이유로 B급 던전에 일명 꼽사리(?)를 낀 것이기었는데 한 소리를 들었었으니 면목이 없을 것이다.
ㅡ짠!
“위하여!”
그렇게 분위기는 무르익었고, 하나둘씩 취해가기 시작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모처럼의 회식이기도 했고, 그 주체가 나였으니 술을 뺄 수가 있겠는가.
타고난 체질 덕에 다행히 인사불성이 되지는 않았고, 이미 고주망태가 되버린 도군과 나리의 매니저에게 연락을 해 픽업을 부탁했다.
물론 이사벨라는 챙기지 않았다.
그정도 사리분별을 못할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으니까.
유서윤과 대리를 해서 집으로 갈 생각으로 그녀를 부축해 일으켰다.
“헌터님? 정신 차리세요, 정신.”
“흥냐... 흥...”
하지만 대시보드 위 흔들인형마냥 고개가 픽픽 넘어가는 유서윤은 좀체 정신을 차릴 줄을 몰랐다.
어휴, 술도 약하신 분이 기분 좋다며 쭉쭉 흡입할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끄응.”
그녀의 겨드랑이에 손을 넣고 들어보려했지만, 술 취한 사람의 몸무게는 곱절이 된다는 말만 실감할 뿐이었다.
뭐지? 하우스에서 안았을 때는 가벼웠던 거 같은데.
그새 중량이라도 치신 건가.
“끄응.”
“저, 그... 도, 도와줄까?”
그때 문득 치고 들어오는 이사벨라의 목소리.
안 갔었나 싶어 고개를 들어보니 붉게 물든 얼굴이면서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가뿐히 무시하기엔 내겐 너무 무거운 그녀였다.
“옆에서 부축 좀 해주세요.”
“....”
말 없이 유서윤의 옆을 부축해주는 이사벨라. 그 덕에 카운터에 도착한 난, 직원에게 카드를 건네며 말했다.
“계산해주세요.”
하지만 직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내게 카드를 돌려주었다.
“아까 여성분께서 계산하셨습니다.”
“네? 누가요?”
설마 이사벨라 이것이 말 한번 붙여볼 요량으로 계산했나싶어 깜짝 놀라 되묻자, 푹 숙이고 있는 유서윤의 얼굴을 확인한 직원이 웃었다.
“여기, 이 분께서요. 몰래 계산한다고 말하지 말라고 하시던데요? 여자친구 분이신가봐요?”
아, 유서윤 헌터님이었구나.
그나저나 여자친구라니.
이집 장사할 줄 아네.
기분 좋게 웃으며 인사를 하고는 밖으로 나왔다.
미리 불러놓았던 대리기사가 와있었고, 우선 그녀를 뒷좌석에 태웠다.
“후.”
그래도 고맙다는 인사 정도는 해야겠지.
어쨌든 철천지 원수는 아니니까.
“고맙습니다, 헌터님. 그럼.”
고개 숙여 딱딱히 인사를 한 후, 카시트에 기대어 잠이 든 유서윤의 옆자리에 오르려던 난 이사벨라의 목소리에 멈칫해야했다.
“아, 자, 잠시만..!”
“왜 그러시죠?”
막상 불러놓고는 머뭇대는 이사벨라.
썩 달가운 얘기는 아닐 듯했지만, 잠시 기다리고 있자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 호, 혹시 술 한잔 더 안... 할래? ...요?”
그래, 부탁하는 사람이 말이 짧으면 안 되지. 취기 탓일까, 왠지 이사벨라가 얘기했던 그 `사정`이란 게 무엇일지 궁금해져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어쨌든 유서윤은 하우스에 고이 모셔야했다.
인사불성인 상태로 봐서는, 절대 방까지 혼자 못 걸어갈 듯했고.
그렇다해서 일면식도 없는 대리기사에게 소중한 그녀를 부탁할 수도 없었다.
고로 내가 모셔야한다는 건데, 하지만 이사벨라를 유서윤의 허락 없이 하우스로 들일 수도 없었고 그러기도 싫었다.
왠지 하우스는 유서윤과 나만의 비밀공간 같은 느낌이랄까.
게다가 내게 이사벨라는 불청객일 뿐이니까.
그저 그 `사정`이란 것이 혹여 이별통보에 관여된 일은 아닌지 듣고 싶을 뿐이다.
만약 관여됐다고해도 일절 그날의 감정을 되돌려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렇다고해서 다시 여기까지 올 수도 없는 노릇.'
고민에 대한 답은 결국 한 가지 밖에 없을 듯했다.
품에서 수첩을 꺼내 한 장을 찢은 다음, 빌라 주소를 적어 건넸다.
“여기 앞에서 기다려. 모셔놓고 갈 테니까.”
“아, 으응!”
밝게 웃는 이사벨라를 무시하며 차에 올랐다.
고작 집주소 알려준 걸로 웃기는.
그저 궁금할 뿐이고, 궁금증이 풀리고 나면 가차없이 쫓겨날 제 신세도 모르고 웃는 그녀의 모습이 가소로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
유서윤을 침대 위에 고이 눕혀두고 곧장 하우스를 빠져나왔다.
대리기사에게 추가 요금 지불할 테니, 그녀의 부축을 도와달라했었고, 다시 차에 오른 난 빌라로 향했다.
차창 너머로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
저 속도 만큼이나, 우리의 시간은 참 빠르게도 흘러 갔었지.
뭐, 사실 이별 후 1년이 지났을 때부터는 생각도 안났었다.
그만큼 후회하고, 좌절하고, 원망했기에 미련도 슬픔도 남지 않은 것이다.
그렇기에 3년차 부터는 거의 잊고 지냈었다.
그 미친년4인조에 시달리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긴하지만.
다음 콜이 많은지 한달음에 빌라 주차장에 도착한 대리기사는 꾸벅 인사를 하곤 멀어져갔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빌라 앞으로 갔다.
어둑한 불빛 아래, 그리고 빌라 출입구 앞에 서있는 이사벨라가 보였다.
뒷짐을 진 손에 비닐봉지가 들려있는 것으로보아 술을 사온 모양이다.
쯧, 우리가 살갑게 마주앉아 술이나 먹을 사이라 생각하는 건가.
역시나 이기적인 생각은 여전한 듯싶다.
나를 보고는 반색하는 그녀에 싸늘히 표정을 굳히고는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혹여나 이 광경을 신나희나 소이현이 본다면 깔아둔 밑밥을 의심할 수 있기에 모르는 척 들어왔다.
잠시 후, 이사벨라가 따라 들어왔고.
ㅡ터벅터벅.
그녀의 앞에 서서 계단을 올랐다.
어색한 침묵 속, 묵직한 발소리만이 고요한 밤을 울린다.
2층으로 오르자 3층으로 가는 센서등이 켜진다.
“아...”
이때까지만해도 눈곱만큼도 생각지 못했었다.
위에서 느껴지는 스산한 기척이... 유안나일 것이라고는.
이사벨라를 이곳에 데리고 온 것이 실수였다는 것을.
곧, 다급한 표정으로 사타구니를 붙인 채 다가오는 유안나에, 진땀을 빼야할 것이라고는.
“가, 강준씨..! 아윽.. 나, 나 얼르은...!”
3층 센서등이 켜지자마자 계단 앞으로 다가온 유안나는 잔뜩 식은 땀을 흘리며 무언갈 말했고, 무슨 말인지 인지할 새도 없이...
그녀는 소변을 지리고 말았다.
맑은 액체가 영롱한 소리를 내며, 치마 아래 곧게 뻗은 각선미를 타고 흘러 계단 아래로 흐른다.
절망적인 표정으로 눈물까지 보이는 유안나, 그리고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이사벨라의 놀란 목소리.
“이, 이게 무슨....”
전 남친을 따라온 빌라 계단에서, 전 남친을 기다린 듯한 여성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소변을 지리는 광경을 내가 어떻게 설명을 해야할까?
나도 이해되지 않는데, 그녀가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그리고 이 년은 대체 여기서 뭘하고 있었길래... 사람 좋아하는 시골집 똥개마냥 나를 보고는 소변을 지리는 거냐고?
...오, 씨발.
이게 왜 이렇게 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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