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유서윤과의 즐거운 파티
사고였다.
모든 일은 사고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하지만 모든 일은 결국 이강준에게 의존도가 너무 높았던 자신들의 방심과, 그의 탈주로 인해 일어난 일이었다.
포션만 제대로 챙겼더라면, 한쪽 숄더태커라도 챙겼더라면, 나영이 다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구급차에 실려가는 나영을 보며 안나는 극도의 좌절감을 느껴야했다.
어떻게, 어떻게 그의 부재 하나만으로 A급 던전 따위에서 중상자가 생긴다는 말인가.
이건 키메라가 강했다는 변명으로 덮을 일이 아니었다.
그의 부재로 인해, 그리고 그를 떠나게 만든 자신들의 과오에 대한 죗값과도 같은 것이었다.
물론 다음 레이드부터는 달라지기 시작할 것이다.
신경쓰지 못했던 부분을 하나씩 챙겨가다보면 언젠가, 그가 없는 것을 잊을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럴 생각도 그럴 의지도 생기지 않았다.
귀찮고, 복잡하며, 부지런해야하는 그것을 할 엄두가 생기지도, 그런 잡일을 하기도 싫었다. 그렇다고해서 왠지 다른 매니저가 온다해도 믿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가 떠나고보니, 그는 세계 최고의 매니지먼트 능력을 가진 사람이란 것을 깨닫게 됐으니까.
등신 같은 자신들을 케어해줄 사람은 오직, 이강준 뿐이라는 것을.
"하…"
망연자실한 유안나의 붉은 입술에서 회한에 찬 한숨이 세어나왔다.
오늘따라 레이드가 끝난 후 그가 대령하던 요구르트 한잔이 너무 그리웠다.
*
"흐흐흥~"
훈련시간이 3시간이라고 했었기에 하우스로 돌아와 청소를 했다. 전 매니저가 그다지 꼼꼼하진 않은 성격이었는지 군데군데 먼지가 쌓여 있었고, 꼬박 먼지만 닦는데에 2시간이 걸리고 말았다.
'청소는 기본인 것을, 쯧.'
가정부를 고용해도 되는 이런 잡일에 청소까지 도맡아하는게 헌터 매니저란 직업의 일이었는데, 아무래도 헌터는 국가전력으로도 이어지는 중요한 자원이기에 길드차원에서도 신뢰할 수 있는, 그리고 보안유지와 사명감을 가진 이들에게 헌터의 의식주에 관련된 전반적인 일을 맡기고 있었었다.
그리고 뭐, A급 헌터 한분을 모시니 비는 시간이 많기도 했고.
보통 헌터 매니저들은 이런 시간에 쉬거나 노는 등, 여가를 보내겠지만 그건 자신의 가치를 낮추는 행동일 뿐이었다.
가정이 화목해야 일이 잘 풀린다는 말처럼, 헌터 매니저가 어떻게 하냐에 따라 헌터의 성장에도 영향을 미치니까.
헌터의 성장은 곧, 자신의 성공과도 같았고.
그렇기에 유서윤의 방을 제외한 모든 청소를 마무리지은 난, 다시 차에 올랐고 훈련장 앞에 도착해 벤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었다.
스케줄표를 확인해보았다.
"음.. 모레에 B급 던전 토벌이 있네."
전 매니저가 잡아놓은 스케줄이었었다.
잘 된 일이다. 첫 캐스터 임무를 그나마 난이도가 쉬운 B급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행운일 테니까.
잠시 후, 유서윤이 짧은 트레이닝 복을 입은 채 스포츠 가방을 들고 차에 올랐다.
샤워를 하고 왔는지 머릿결이 뽀송한게, 향긋한 로즈메리향이 차 안을 가득 메운다.
언제 맡아도 기분 좋아지는, 그녀의 향기였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훈련이 좀 길어졌지 뭐야, 얼른 나오고 싶었는데."
"아니에요, 저도 방금 왔어요."
사실 40분 넘게 기다렸다.
하지만 티를 낼 수는 없지.
"그래? 다행이다, 히히. 오늘 스승님이 어찌나 열을 올리던지 귀에서 피나는줄 알았다니까?"
A급 헌터의 스승이면, S급 헌터이려나? 얄팍한 궁금증은 대충 넘기고 룸미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디로 모실까요?"
나의 물음에 살짝 우중충해진 하늘을 훑어본 유서윤이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흐응… 오늘은 유독 운동가기 귀찮네. 패스할까? 히힛."
천진난만하게 미소짓는 유서윤. 흡사 학원을 땡땡이치는 여학생의 풋풋한 미소와 같은 싱그러운 그 미소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간다.
"저야 헌터님 의견에 따르겠습니다."
"히, 정말?"
유서윤의 갈색빛 눈망울이 초롱하게 빛난다.
헌터의 일과는 매니저가 밀착관리한다.
혹시 무슨 급한 스케줄이 있을지 모르기에 어디로 모실까요? 라는 질문은 형식상 해본 것일 뿐.
그렇기에 별다른 언급이 없으면 그녀는 오후 일과인 체력단련장으로 향해야 했었다.
그리고 매니저는 하루일과를 리포트 형식으로 정리해 일일보고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길드에서 나름대로 헌터들이 나태해지지 않게 관리하는 것이다.
뭐, 그 미친년들은 해당사항이 아니었었지만. 생각해보니 그래서 S급 헌터 중에서 전투력으로는 제일 하위권들이었던 듯싶다.
그것도 사이좋게 16, 17, 18, 19위였었나. 하여튼 어디 하나 칭찬할 구석이 없는 년들이라니까.
여하튼, 일일보고가 있기에 패널티를 받지 않기 위해선 정해진 스케줄대로 따르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사람 사는 곳이 그렇지 않은가.
원리원칙대로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
일일보고에 증거자료제출을 요구하지는 않았기에 사실상 유명무실한 관리이긴 했다.
커다란 울타리만 쳐놓고 헌터와 매니저의 재량을 믿고 방목하는 관리법, 그렇기에 허점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아니, 허점이라기보단 길드에서 묵인해주는 일종의 숨구멍이지.
"흐응… 어떡할까~"
오후 땡땡이에 언뜻 신나보이기도 하는 그녀는 잠시 고민하다 내게 또 다른 제안을 꺼내들었다.
"그럼 오늘 우리 그거할까? 그거?"
"…그거요?"
대답을 기다리고있자, 유서윤은 검지와 엄지로 작은 잔을 잡는 시늉을 하곤 손목을 꺾으며 말했다.
"히, 오늘 우리 강준이 첫업무를 개시한 거니까 그거해야지, 회식!"
회식이라, 그거 좋지.
*
결국 오후 일과를 땡땡이치고 하우스로 돌아온 우리는 해가 떨어지지 않았음에도 축하 파티 준비를 시작했다.
음식준비를 하려는 내게, 나를 축하하기 위한 파티인데 주인공이 나서면 어쩌냐며 만류했고, 소매를 걷어부친 유서윤은 잘 못하지만 잔재주라도 부려보겠다며 주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어색했다.
매니저를 위해 음식을 차리는 헌터라니. 마치 부장님 집에 와 음식을 대접 받는 신입사원마냥 불편했지만, 이상하게도 기분은 좋았다.
어언 3년이란 시간동안 그년들은 나를 푸대접만 했었으니까.
그녀가 과연 내가 3년간 그 지옥구덩이에서 버틴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마도 따스히 위로를 해주겠지?
하지만 알리고 싶지 않았다.
S급이란 허울 좋은 껍데기로 둘러싼 미친년들에게 당한 구박과 핍박은… 왜인지 그녀는 몰랐으면 했다.
'뭐.. 내가 입만 닫으면 알 리 없겠지.. 그나저나 뭐라도 해야 안 되려나..'
하우스에서 쉰다는 개념이 익숙치 않은 내게, 가만히 있는 것은 되레 고역과도 같았다.
그만큼 난 그 미친년들에게 사육 당했던 것이다.
주방에서 맛있는 냄새가 난다.
매니저로서 그녀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좋은데 남자친구라면 진짜 행복하겠지?
행복할 거다, 무조건.
하지만 그렇게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우린 비지니스 관계, 간혹 매니저와 헌터의 금단시 되는 사랑을 성공한 케이스가 있긴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의 이야기.
그렇기에 난 절대 이 사무적인 태도를 바꾸지 않을 예정이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나 같은 하찮은 놈이 그녀에게 가당키나 한가.
호의는 호의로 받는 것이 당연한 것.
우리의 사무관계는 변함없을 것이다.
"짠~ 다 됐지롱~"
하지만 저 순수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볼 적이면 이 다짐들이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ㅡ짠.
두 개의 유리컵이 부딪히며 축하 파티의 시작을 알린다. 생각외로 그녀의 음식솜씨는 수준급이었다. 특히 해산물 요리가 진리였는데, 입 안 가득 퍼지는 풍미를 즐기며 우린 신나게 짠을 해댔다.
"근데 헌터님은 술 즐기시지 않는 거 아니였어요?"
"맞아, 평상시엔 거의 안 먹으니까. 근데 오늘은 축하파티잖아? 파티에는 술이 빠질 수 없찌!"
"하하, 맞긴 한데.. 저란 놈을 이렇게나 환영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피, 강준이가 어때서. 잘생겼지, 성격 좋지, 일 잘하지, 뭐 하나 빠지는게 없는걸?"
…내가 잘생겼다고?
3년간 그 미친년들은 `쯧쯧, 그 얼굴로 살려면 일이라도 잘해야지`라는 핀잔만 해댔었는데.
인사치레로 하는 칭찬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기기로 했다. 분명한 건 이 세상엔 나보다 잘생긴 사람들이 수두룩하니까.
"그래도.. 감사해요, 이렇게나 환대해주실 줄은 몰랐거든요."
"S급 헌터 그 악랄하다는 미녀사총사 파티를 도맡으신 분을 모셔왔는데, 당연히 축하해야지! 그리고 이건 나를 위한 축하 파티기도 하다구."
가식 없는 진심으로 느껴지는 유서윤의 행복한 미소를 따라 나도 미소 지으며 그렇게 우린 기분 좋은 술상을 이어나갔다.
"아 그리구 헌터님께서 제안해주신 거 감사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응? 아, 캐스터!? 진짜, 진짜 해줄 거야?"
볼에 홍조를 물들이고는 함박미소를 지으며 좋아하는 유서윤.
아니, 좋아해야하는 건 내가 아닌가? 전리품 수입이 메인 수입인 헌터가 그 절반을 준다는데 누가 거절을 하냐고.
문득 그 연유에 대해 궁금해졌다.
"근데… 그 제안은 왜 하신 거에요? 감사한데, 너무 파격조건이라 궁금해서요."
"히~ 일단 짠해!"
평소 그녀답지 않게 헤벌쭉 웃으며 술잔을 내미는 그녀에 나 역시 헤벌쭉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가면이라도 있는 건지 어쩔 땐 단아하고 청초하면서도 어쩔 땐 발랄하고 귀여운 모습이 남심을 홀리는 것만도 같았다.
ㅡ짠!
"푸하…! 오늘따라 술맛이 디게 좋넹~!"
"하하, 그러세요? 다행이네요. 저도 좋아요, 헌터님하고 한잔하는 거."
"히.. 고마워. 아, 캐스터 제안한 이유가 궁금하다구?"
"넵, 아무래도 그런 파격적인 조건은 처음 들어봤으니까요."
술잔의 얼음을 굴리며 잠시 사색에 잠기는 유서윤. 방금의 깨발랄하던 그녀의 가면이 벗겨진 듯했다.
"그냥, 가온 길드에 있었을 때 월급 엄청 쎘을 거 아냐? 근데 나 같은 애 맡는다고 월급도 엄청 깎였을 텐데, 이렇게라도 챙겨주고 싶어서."
…와, 그런 이유로 피 한방울 안 섞인 남에게 돈을 퍼준다고?
유서윤, 그녀는 정녕 여신인 겁니까?
두 손 공손히 모아 술병을 들고는 두 무릎 꿇고 앉아 대장군을 따르는 병사마냥 고개를 각지게 숙였다.
"헌터님 평생 잘 모실게요!"
"피힛, 뭐야 갑자기. 그래! 잘 모셔라!"
기분 좋게 웃은 유서윤이 술잔을 받고는 기깔나게 고개를 꺾으며 원샷을 털어 넣었다.
ㅡ탁!
"히야앗~ 술 맛 조오쿠나!"
이때까지는 몰랐었다.
돈이란 이유에 가린, 진짜 이유를.
이때는 정말 눈곱만큼도 눈치챌 수가 없었었다.
*
"그, 그만 드셔야하는 거 아니에요?"
어느새 붉게 달아오른 유서윤의 얼굴. 또렷하던 눈빛도 흐려지고 올곧던 자세도 흐트러져 있었다. 혀는 진작부터 꼬여 있었고.
"헤… 아냐! 나 멀쩡하고등?"
…전혀 안 멀쩡해보이는데.
다행히 내일은 훈련 대신 교육이 있는 날이긴 했지만, 이미 주량을 넘어버려 그녀를 말려야했다.
"취하셨어요."
"흥, 아냐아냐, 나 멀쩡해. 오늘은 그냥 신경 쓰지 말고 먹고 마시자궁~"
알코올에 약하신 분이 허세는.
결국 유서윤은 몇 잔을 더 마셨고, 취기에 거의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전 매니저의 자료에 술은 싫어한다고 되어있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많이 마시는지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뭐.. 기분이 좋으셨겠지.'
오늘은 자신을 축하한다고도 했으니, 원 없이 마시고 싶었던 모양이다.
"푸… 히잉… 나.. 잔다앙…"
결국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옆으로 쓰러져버리는 유서윤. 아무래도 내일 오전교육도 쉬어야할 듯싶다.
"술도 잘 못드시는 분이 참…"
헌데 늘 올곧고 바르던 그녀가 취기에 못 이겨 망가진 모습이 묘한 음심을 자극한다.
배덕적인 자극이랄까, 순수하고 선한 그녀가 내 앞에서 인사불성이 되어 쓰러진 모습은 퇴폐스럽기까지 했다.
헝클어진 머리와 홍조가 깃든 얼굴, 거기다 돌핀팬츠 차림에 곧게 뻗은 새하얀 각선미, 그리고 옆으로 쓰러진 탓에 티셔츠 넥 위로 모여든 풍만한 가슴골은 아찔한 유선형을 이루고 있었다.
취기가 오르지는 않았지만, 그 뇌쇄적인 모습은 남자인 내게 너무나도 아찔하게 다가온다. 아래가 묵직해지는 것이 느껴져왔다.
'…정신차려라, 이강준.'
ㅡ찰싹!
뺨따귀 한번으로 음심을 털어낸 난, 유서윤에게 다가갔다.
정리에 앞서 그녀부터 침대에 눕혀야할 듯했다. 일명 공주님 안기, 자세로 그녀를 안아들었다.
가볍다.
이런 가녀린 체구로 그런 거대 괴수들과 싸운다니, 마나의 힘이란 것이 새삼 대단스레 느껴져왔다.
헌데, 공주님 자세로 안자마자 그녀가 무어라 웅얼거리며 내 목덜미를 확 끌어안았다.
"흐응… 퓌… 기다렸쟈나… 엄청…"
응? 기다렸다고? 누굴? 전 남친?
혹시 깨어난 건가 싶어 그녀를 쳐다봤지만, 지그시 감긴 눈에 연하게 그르렁대는 코는 그녀가 깊은 단잠에 빠진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풋, 꿈이라도 꾸시는 모양이네."
약간은 어리광도 같은 모습에 피식, 미소를 짓고는 그녀의 방으로 향했다.
처음 들어와보는 그녀의 방. 핑크핑크하지는 않지만 여성스러움이 물씬 묻어나오는 방에 멜랑꼴리함이 더해진다.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
새근새근, 잘도 자네. 예쁜 사람은 자는 모습마저 예쁠 수 있다는걸 오늘 처음 알았다.
그 미친년들도 모두 한 미모했지만, 자는 모습은 드럽게 역겹기만 하던데.
"흠냐.. 흠냥… 나쁜 년…"
이번엔 나쁜 년이랑 싸우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피식, 또 한번 미소를 짓고는 방을 빠져나왔다. 우린 비지니스 사이, 사적인 개인방에 오래 머무를 수 없는 사이니까.
딸각, 방문을 닫고 나온 난 서둘러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모처럼 기분 좋게 한잔한 터라 나도 얼른 눕고 싶었다, 내일은 또 어떤 즐거운 일이 있을까, 기대하며.
"…흠냥.. 이 못된 년… 유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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