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2)A급 헌터 유서윤 (1)
"여긴가.."
그날 강석과 노래방까지 달리며 거하게 과음한 터라, 하루를 내리 뻗어 있었고 이틀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린 난, 지금 강석의 길드 건물 앞에 도착해있었다. 5층 건물이었는데, 지은지 얼마되지 않았는지 삐까번쩍했다.
[ 라온제나 ]
길드 이름만 적힌 심플하면서도 세련된 간판. 내가 있던 길드가 기업으로 치자면 삼송그룹 정도여서 그렇지, A급 헌터를 보유한 라온제나 길드 역시 중견 이상의 그룹은 되는 길드였다.
A급은 무슨, B급 헌터도 없는 중소길드가 허다했으니까.
심호흡 한번으로 긴장감을 털어내고, 길드 사무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늘 강석이 휴가여서 그에게 들었던 대로 안내 데스크에 갔다.
"저.."
"무슨 일이신가요?"
"매니저 면접 보러 왔습니다. 유서윤 헌터님 매니저로."
미리 언질을 받았던지 안내원이 밝게 웃으며 내게 출입증 하나를 건네주었다.
"아~ 그분이시군요. 여기 출입증 목에 거시고, 3층 대표실로 가시면 됩니다."
친절히 엘리베이터가 있는 곳을 손짓까지 해주는 안내원에 까딱, 목례를 한 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나저나 면접을 무슨 대표실에서 보는 거람, 부담스럽게.
보통 임원 면접을 합격해야 대표, 헌터의 최종면접을 보는데, 그간의 경력을 인정해주는 건지 다이렉트로 최종면접인 모양이다.
뭐, 화끈해서 좋긴하네.
3층에 내려 주변을 둘러보자 [ 대표실 ] 이라 적힌 큰 문이 보였다.
그 앞엔 책상 하나와 컴퓨터를 보고 있는 여성직원이 있었고.
"저, 면접 보러 왔습니다. 유서윤 헌터님 매니저로요."
모니터를 보고 있는 여직원에게 컨트롤 C 컨트롤 V해서 말했다. 심드렁히 모니터를 쳐다보고 있던 여직원이 나를 쳐다보았다.
"아, 잠시만요."
인터폰을 눌러 무어라 말한 여직원이 이내 자리에서 일어서 대표실로 다가갔고, 그녀를 따라 나도 대표실 문 앞에 섰다.
"들어가시면 됩니다."
문을 친히 열어주는 여직원에 경직된 미소로 인사하며 대표실 안으로 들어섰다. 후광이라도 비추듯 햇살이 가득 쬐는 사무실엔 커다란 회장님 의자에 앉아 결재서류들을 훑고 있던 한 남성이 있었다.
회백색의 올백머리와 슈트차림이 제법 잘 어울리는 중년남성이었다.
"아, 어서오세요. 최강석 군이 말한 그 매니저시군요."
"넵, 반갑습니다."
"이리로."
허리를 숙여 공손히 악수를 받고, 그의 안내에 따라 쇼파에 앉았다.
잠시 후, 여직원이 마실 것을 타왔다. 홀짝, 음 역시 남이 타주는 믹스커피는 꿀맛이다.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S급 헌터를 무려 4명이나 맡으셨다고."
"아.. 하다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역량이 뛰어나시겠군요. 4명을 3년간이나 맡으셨다니, 혹시 퇴사사유에 대해 물어도 될까요?"
퇴사사유 쯤은 미리 준비해온 터다.
지랄 맞은 년들이라 더 이상 못 버티고 나왔다는 호방한 답변은 내 마음 속에 저장하는게 이로울 테니까.
"아무래도 네 분을 한번에 케어하다보니 놓치는 부분도 생기고, 무엇보다 한 분께 집중케어를 해드리기가 힘들더라고요. 어중간하다고 할까요, 그래서 한 분께 제 모든 역량을 집중해 최고의 보필을 해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오게 됐습니다."
자신을 겸허히 낮추고, 앞으로의 포부까지 밝히는 기가 막힌 만점짜리 답변.
다행히 마음에 들었는지 대표는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흡족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렇군요. 그럼 아주 잘 오셨습니다. 다만.. 가온 길드는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였던만큼, 저희 보수는 만족스럽지는 않으실 겁니다."
"괜찮습니다. 돈보다 제 능력을 더욱 발휘해보고 싶어서 오게 된 거니까요."
"좋습니다, 그럼.. 이제 올 때가 됐을 텐데."
다시 한 번 흡족스레 미소지은 대표가 손목시계를 쳐다본 후 사무실문을 쳐다보았다.
아마도 내가 맡게될, A급 헌터 유서윤을 기다리는 것일 터다.
매니저로 최종채용되기 위해선 헌터의 승낙이 떨어져야만 했으니까.
"아, 왔군."
그렇게 몇 분여를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고 있자 드디어 문이 열렸고, 한 여성이 대표실로 들어왔다.
캐주얼하면서도 편안한 오피스룩을 입은 채 들어오는 여성, 언뜻 보아도 `나 착한 사람이야`를 알리는 듯한 반듯하고 선명하며 아름다운 인상을 가진 그녀는 바로 유서윤이었다.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차가 막혀서 조금 늦었네요. 반가워요, 유서윤이라고 해요."
기립한 내게 악수를 청하는 그녀.
맞잡은 어여쁜 손이 말랑한 감촉과 찌릿한 느낌을 선사해준다.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강준이라고 합니다."
"후훗, 이미 알고 있어요."
거기다 살살 녹는 선한 미소까지.
유서윤은 강석의 말대로 `겁나` 예쁜 여성이었다.
미쳤다.
**
"…진짜 그만둔 거라고요?"
저녁댓바람부터 길드 사무소의 대표실에 들이닥친 안나는 제 귀에 들려온 강준의 사직서 소식에 눈동자를 떨어야했다.
진짜였다.
고약한 장난이나, 토라진 반항이 아닌, 이강준 매니저는 진짜 그만둬버린 것이다.
"하아.. 뭐 이런 경우가…"
노크도 없이 무례하게 쳐들어온 안나가 불쾌하리만도 하건만, 대표는 연신 안나의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만큼 S급 헌터라는 위치는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자리였다.
"그, 그러니까… 있을 때 좀 잘해주지 그랬어."
이강준 매니저의 퇴사는 길드 차원에서도 막대한 손해였다. 그만한 인재는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누구나 추앙하는 S급이란 이유로 콧대는 한껏 높아져 하늘을 찌를 듯한 저것들을 케어해줄 사람이 어딨겠는가.
자신이 거느린 헌터지만, 객관적으로 진짜 최악들이었다. 막 깨진 소금결정마냥 모난 것들이었으니까. 억단위 연봉을 제시해도 전담할 헌터가 미녀사총사 파티라는 말을 들으면, 베테랑 매니저도 거절하는 마당에 이강준의 존재는 길드에서도 굉장히 중요했었기에 살짝 질책하듯 말했지만, 돌아오는 건 역시 볼멘소리 뿐이었다.
"하, 저희는 잘해줬거든요? S급 헌터들 중에 저희만큼 잘해주는 사람있음 나와보라해보세요."
"아.. 그래그래."
그렇게 오늘도 대화를 포기하는 대표였다. 팔짱을 낀 채 한숨을 쉰 안나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미리 아셨으면 저한테라도 언질은 주셨어야죠. 완전 뒤통수 맞았잖아요."
되레 따지고 드는 안나에 대표는 항변하느라 진땀을 빼야했다.
자신이 바지사장만 아니었다면, 당장 저것들을 쫓아보내버렸을 거라 다짐하며.
"아니.. 강준이가 꼭 비밀로 해달라고…"
"아니! 그자식이 중요해요? 저희가 중요해요?!"
"아니, 다, 당연히 너희가 중요하지."
아니시에이팅 화법으로 대표의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간다. 그만큼 S급 헌터의 목소리는 전지전능할 정도로 힘이 강했다.
대한민국에 고작 20명도 안 되는 S급 헌터기에 길드 차원에서 그들은 너무나도 이득이 되는 존재였으니까.
"하… 짜증나."
팔짱을 푼 안나가 크게 한숨을 내쉬며 노기를 가라앉혔다.
화만 낸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안은요? 이강준 그자식 다시 데려오던지, 아니면 세상에서 가장 똘똘한 놈으로 데려오던지, 무슨 대책이 있을 거 아녜요."
"강준이 의지가 워낙 강해서… 데려오진 못할 거 같아. 지금 면접들 보고 있으니까 똘똘한 놈으로 최대한 빨리 뽑아볼게."
대표의 말에 일말의 기대감이 무너졌지만, 안나는 티를 내진 않았다. 혹여 이강준이 어떤 조건을 걸어서라도 복귀의지가 있지는 않을까, 기대했던 그녀였으니까.
결국 새 매니저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긴 한숨이 나왔다.
"하아…. 개자식… 이렇게 내버려두고 갑자기 떠나면 우린 어떡하라고…"
대표가 들리지 않게 작게 읊조린 안나는 결국 지난 날을 돌이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비뚤어진 자신의 성질을 받아줄 놈은 이강준, 그 뿐이라는 것을.
고고하고 까칠한 멤버들의 성질머리를 받아줄 사람은 그 뿐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런 자신과 멤버들을 물심양면 보필해줄 능력자는 그 뿐이라는 것을.
"나쁜 새끼…."
긴 한숨이 세어나왔다.
**
"후훗, 역시 기대했던 대로네요. 강준씨는."
10여분을 쇼파에 앉아 내게 질문을 한 유서윤이 곱게 웃으며 나에 대한 감평을 건넸다. 다행이다. 그녀에게 잘 보인 것 같다.
유서윤 같은 여성헌터의 매니저라면, 분명 행복하겠지.
일순간 썅데레들 4명의 얼굴이 스쳐갔는데, 고이 스쳐보내버렸다. 어딜 주제 모르고 감히 떠오르고 난리야.
결심한듯 입술을 앙 다물었다 뗀 유서윤이 대표를 쳐다보았다.
"대표님, 그럼 계약하시죠. 저도 괜찮은 것 같네요. 특히 미녀사총사 파티는 성격 안 좋기로 소문난 곳인데 거기서 3년을 버티신 분이라면 뭐든 잘 해내실 것 같아요."
"허허, 역시. 너도 마음에 들 줄 알았다."
음, 왠지 두 사람이 닮은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잠시 후, 비서가 근로계약서라 적힌 종이를 내게 건넸고 대표가 말하는대로 쓱쓱 적어내려갔다.
근무형태, 기타 조건들은 이전 길드와 동일했다. 헌터 직속 관리 매니저로, 24시간 그들의 옆에서 보필하는 강도 높은 업무 형태.
어쩔 수 없다.
싫으면 다른 일을 해야겠지.
월급은 당연히 많이 줄기는 했다. 월 900만원에 인센티브는 별도.
900만원도 큰 돈이긴 했지만 확실히 3,000만원에 비하니 턱없이 부족해보이긴했다. 아니, 소꿉장난하는 것도 같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뭐, 내 발로 나온 건데 이정도면 감사합니다 해야지. 그리고 강석의 말대로 길드 내 매니저 평균 월급이 500이라고 했으니 900이면 후하게 쳐준 것일 터다.
특히 난, A급 헌터를 한 분만 케어하면 되는 굉장히 쾌적한 근무환경을 가지게 된 매니저니까.
무엇보다 인성씹창 4명을 돌보며 3천만원 받느니, 인성군자 1명을 돌보며 900만원 받는게 쌉이득이었다.
얼마 전엔 스트레스성 원형탈모로 옆통수에 500원짜리 빵꾸도 났었으니 말이다.
아마 그년들하고 1년만 더 있었으면 대머리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다 됐나요?"
"네, 저한테 주시면 됩니다."
사인까지 모두 마친 종이를 비서에게 건네자 곧, 한 부를 복사해 내게 돌려주었다. 이로써 난 라온제나 길드의 A급 헌터 유서윤의 관리 매니저로 인생 2페이즈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감회가 묘하다.
기분 좋은 묘함이랄까.
왠지 설레는 것 같기도 하고.
만연한 미소를 띄고 있는 유서윤을 바라보았다. 잠시 마주쳤는데도 깊이 있는 갈색빛 눈동자에 빠져들 것만 같았다.
'남친은 당연히 있겠지?'
간혹 그런 케이스가 있었다.
매니저로 시작해, 일류헌터와 결혼에 성공하는 인생 성공 로맨스.
웹소설판에서도 굉장히 인기 있는 소재였는데, 아름답고 선한 유서윤을 보고 있자니 나도 그 소설 속 주인공이 되고픈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남친이 있겠지, 뭐.'
저런 미모에 저런 성격을 가진 여성헌터가 남자친구가 없을 리 없겠지.
삽시간에 빠른 망상의 나래를 펼치고 접은 난, 내게 악수를 건네는 유서윤의 손을 다시금 잡았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요, 강준씨."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미소가 답가처럼 나오는, 서윤의 미소였다.
고진감래, 역시 옛조상님 말씀 중에 틀린 말 하나 없다니까.
고생 끝에 드디어 낙이 올 것 같은 기분 좋은 느낌이 온 몸을 감싼다.
"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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