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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급 힐러는 네크로맨서-226화 (226/226)

226화

끝없는 무저갱 안에서 시간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하아……. 하아…….”

은석의 거친 숨이 컴컴한 공간을 흘러 다녔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깃털처럼 가벼웠던 적룡검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은석은 주머니에 넣어 둔 사슬을 꺼내 검을 잡은 오른손에 칭칭 감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처음에는 허공에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었다.

계속되는 전투 덕분에 이제는 지옥귀왕만큼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으아악!”

끝나지 않는 싸움에 지친 것은 지옥귀왕도 마찬가지였다.

“왜! 왜 죽지 않는 것이냐!”

놈의 검은 도에 은석의 팔과 다리가 베이길 수십 번이었지만 곧 상처가 아물어 다시 공격했다.

하지만 전투가 길어지면서 은석의 재생 능력도 점점 느려지고 있었다.

조금 전 지옥귀왕의 검은 도에 베인 허벅지에서 흐르는 피가 멈추지 않았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내가 불리해진다.’

주변을 둘러보니 무저갱 악귀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후우…….”

은석이 숨을 길게 내쉬며 적룡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어금니에 힘을 주며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지옥귀왕의 눈을 노려봤다.

‘저놈도 먼저 공격을 하지 않고 있다. 나만큼이나 지친 거겠지. 한 번이다. 딱 한 번에 끝내야 한다.’

윤혁과 김도운을 닮은 얼굴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옥귀왕은 처음 무저갱에서 나왔을 때처럼 검붉고 긴 영체 덩어리일 뿐이었다.

은석을 바라보는 지옥귀왕의 붉은 안광이 번뜩였다.

‘이번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걸 놈도 알아차렸군.’

지옥귀왕의 붉은 눈과 마주한 은석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압!”

외마디 고함을 내지르며 단숨에 놈을 향해 질주했다.

적룡검의 아래로 지옥귀왕의 거대한 도가 파고들어 왔다.

순식간에 합을 주고받은 은석과 지옥귀왕은 조금 전과 서로 반대의 위치에 서 있었다.

“허억……!”

은석이 가쁜 숨을 내뱉으며 한쪽 무릎을 굽혔다.

땅이 있다면 적룡검을 박아 몸을 지탱했겠지만 아래로 급하게 내린 검은 그대로 밑으로 쑥 내려갔다.

은석의 거친 숨소리에 팀 고스트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대장!”

지옥귀왕의 도에 은석의 오른쪽 옆구리가 깊게 베여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왔다.

“으윽!”

엄청난 고통에 은석은 신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몸이, 너무 무거워졌어. 일어날 수가 없을 것 같은데…….’

은석은 안간힘을 쓰며 겨우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다. 미동도 없이 서 있는 지옥귀왕의 영체가 보였다.

‘내가 진 건가…….’

그 순간.

[흉악귀를 소멸하였습니다.]

지옥귀왕을 죽였다는 메시지가 나타남과 동시에 반으로 잘린 영체의 윗부분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그 순간, 팀 고스트 역시 무저갱의 악귀를 모두 소멸시켰다.

“커헉!”

지옥귀왕을 죽였다는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은석은 온몸에 힘이 빠졌다.

그대로 바닥에 쓰러지듯 엎어졌고 은석의 입과 상처에서 계속 피가 흘러나왔다.

“대……장!”

자신을 부르는 팀 고스트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지만, 은석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나는 다시 죽은 건가…….’

정신을 잃은 후 은석은 하염없이 무저갱을 부유했다.

그렇게 또 시간이 흘렀다.

의식은 돌아왔지만, 은석은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무저갱에 아주 미약하게 흐르는 바람에 몸을 맡겼다.

‘조용하다. 이렇게 고요한 시간이 얼마 만이지…….’

그렇게 끝없는 공간을 유영하듯 떠다니고 있는 은석.

‘……피곤해. 이 정도 했으면 다시 살아난 값은 했겠지?’

무저갱 안을 흘러 다니던 바람이 은석의 볼을 스쳐 갔다.

‘이렇게 바람처럼 계속 떠다니다가 결국 죽게 되는 걸까?’

이름만 같은 다른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 쉼 없이 달려왔다.

처음에는 오직 자신을 죽인 윤혁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하지만 윤혁의 양 손목을 베고 난 후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고 싶어 달렸다.

드디어 지옥귀왕을 소멸했지만, 은석은 성취감보다 모든 게 끝났다는 허무함만 느껴졌다.

그때였다.

찰싹-

은석의 이마를 무언가가 강하게 내리쳤다.

“아얏!”

갑작스러운 타격에 은석이 소리를 내질렀다.

찰싹-

또다시 이마를 세게 내려치자, 은석이 감은 눈을 번쩍 떴다.

“누구야!”

그의 눈앞에 겸의 얼굴이 있었다.

“뭐, 뭐야? 겸이 네가 왜 여기 있어?”

겸은 대답 대신 다시 한번 더 손을 들어 은석의 코를 후려쳤다.

“야! 아프다니까!”

은석이 소리를 내지르며 몸을 휙 틀어 겸을 마주 봤다.

“왜 이래? 갑자기 나타나서?”

겸이 은석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뜸 소리를 질렀다.

“네 이놈! 지금 이 무저지옥에서 뭘 하고 있는 것이냐! 정신을 차렸으면 얼른 일어날 생각을 할 것이지!”

은석이 얼얼한 이마와 코를 어루만지며 대답했다.

“내가 지옥귀왕과 얼마나 오래 싸웠는지 네가 잘 알잖아.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좀 쉬면 안 돼?”

겸이 한심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네놈은 지금 저 위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이냐?”

은석은 대답 대신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겸아, 너도 잘 알겠지만 나도 힘들…….”

빡-

은석이 말하는 사이, 겸의 작은 주먹이 훅 들어와 코를 가격했다.

“무엇이 힘들다는 것이냐! 누구보다 많은 혜택을 받고 사는 놈이. 호강에 겨워 요강에 빠졌다는 것은 네놈을 두고 하는 말이구나. 당장 일어나지 못하겠느냐! 이러라고 내가 널 선택한 줄 아느냐?”

대여섯 살 정도의 외모를 가진 겸이의 불호령에 은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전에는 어린아이처럼 말하더니, 이렇게 보니 조상님 맞네.’

그때, 정신감응으로 팀 고스트의 외침에 들려왔다.

‘대장, 깨어나셨습니까?’

‘대장, 성하예요. 안 죽었어요? 아, 죽었으면 나도 없어졌겠네. 아무튼, 대장 보고 싶어요.’

팀 고스트의 아우성을 들으며 은석은 오른손에 감아 둔 사슬을 풀었다.

“지옥귀왕 하나 없앤다고 이승이 평온할 것 같으냐?”

여전히 화가 나 있는 겸의 표정에 은석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나도 가려고 했어. 그저 잠깐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야.”

“여기가 이승과 시간의 흐름이 다르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이승은 더욱 큰 난리가 났을 것이다.”

은석이 고개를 들어 싱긋이 웃었다.

“그러니까. 시간이 다르니 이왕 들어온 김에 조금만 더 쉬다 갈까?”

“이놈이!”

겸이 은석의 무릎을 발로 걷어찼다.

“아야, 알았어. 알았어. 농담이야. 귀여운 꼬마인 줄 알았더니 완전 무서운 할아버지네.”

“지금 농담을 할 때냐. 어떻게 무저갱을 나갈지 방법을 찾아야지.”

걱정하는 겸을 보며 은석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겸의 앞으로 손을 내밀어 펼치자, 그 안에 둥글고 작은 보석 하나가 놓여 있었다.

“이게 무엇이냐?”

“우리를 여기서 나가게 해 줄 열쇠.”

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열……쇠?”

은석의 손안에 들어 있는 것은 고스트 던전을 클리어하고 받은 유니크 아이템이었다.

“이게 뭐냐면 시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이동할 수 있는 아이템이거든.”

무저갱은 저승과 저승 아래의 지옥과도 또 다른 공간이었다.

저승차사가 들어갈 수 없는 곳이었고 무저갱 안에 갇힌 악귀들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

만약에 자신이 지옥귀왕을 소멸시키고 죽지 않는다면 무저갱에서 빠져나올 방법이 필요했다.

“내가 이길 수 있을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든 준비는 해 두는 게 좋을 거 같아서.”

무저갱에 들어오기 전, 아공간에 넣어 두었던 아이템을 미리 꺼내 둔 것이었다.

은석의 설명에 겸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은 정확해. 적룡검의 주인다워.”

그제야 화가 풀린 듯 예전의 말투로 돌아온 겸을 보며 은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은석이 손을 움켜쥐며 힘을 꽉 주었다. 고스트 던전 아이템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집으로 돌아가자.”

* * *

“막아라! 도망치는 악귀를 모조리 소멸시켜라!”

은석이 지옥귀왕을 붙잡아 무저갱에 뛰어든 후, 최 차사는 빠르게 구멍을 봉인했다.

은석의 말대로 주인이 사라지자, 악귀들의 힘은 빠르게 약해졌다.

하지만 악귀의 수가 많았고 던전에서 쏟아져 나온 몬스터에 빙의한 놈들까지 더해졌다.

은석이 사라졌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최 차사의 외침에 악귀 체포부 차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악귀를 소멸시켜 나갔다.

무저갱이 다시 막히고, 이승을 가득 채웠던 귀기 또한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름 역시 서서히 걷히고 있었다.

수문장의 모습으로 변한 청안은 연신 몬스터를 찢어 삼켰다.

그때, 갑자기 땅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뭐지? 또다시 던전이 나타나는 건가?”

모두 잔뜩 긴장한 눈빛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무저갱의 구멍 근처에서 강한 빛이 번쩍 빛났다.

“김은석!!”

최 차사가 큰 소리로 은석의 이름을 외쳤다. 빛이 사그라든 그곳에 은석이 빙그레 웃으며 서 있었다.

“어, 어떻게…….”

놀란 최 차사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지옥귀왕을 끌고 무저갱으로 들어간 은석이 고작 반나절이 지나고 다시 나타난 것.

차사들 역시 눈을 휘둥그레 뜨며 은석을 쳐다보았다.

은석이 싱긋이 웃으며 팀 고스트를 소환했다.

“아직 악귀를 다 없애지 못하셨습니까? 이런, 이런. 역시 제가 없으니 속도가 더딥니다. 최 차사님.”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어떻게 네가……?”

“지옥귀왕은 소멸했습니다. 물론 무저갱의 악귀도 모두 없앴고요.”

“정말로 지옥귀왕을 없앴다는 것이냐?”

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무저갱에서 진짜 미칠 정도로 길게 싸웠었는데 하루도 안 지났다니……. 뭔가 좀 억울한데요.”

은석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은 구름도 모두 걷혔군요. 역시 어두운 곳보다는 밝은 곳이 좋네요.”

은석이 최 차사를 보며 어깨를 들썩였다.

“기분이 막 좋아지는 게, 악귀를 모조리 없애고 싶어지는데요.”

곧바로 팀 고스트를 소환했다.

“무저갱에서 오래 쉬었지?”

“네, 몸이 근질근질합니다.”

성하가 앞을 향해 주먹을 빠르게 내질렀다.

“얼른 가시죠. 대장.”

“그래, 가자. 악귀 잡으러.”

* * *

전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원인 모를 기상 현상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지구가 곧 멸망할 것이라 외쳐 대던 사람들이 TV에서 감쪽같이 사라졌다.

악귀 체포부 차사들은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악귀를 잡아 소멸시켰다.

천명 길드는 던전 안에서 빙의된 헌터를 찾아 악귀를 없앴다.

지옥귀왕이 사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승과 저승의 경계는 다시 짙어졌다.

모든 것이 천천히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어느 날.

은석은 하데스 길드 로비에 서 있었다.

그의 앞에는 사무실 문 정도 크기의 직사각형 캔버스가 세워져 있었다.

“작품명이 <노움의 대지>군요.”

“네, 가족을 잃고 흑마법사가 된 노움의 이야기를 듣고 그린 겁니다.”

은석은 예전에 노움 보덴이 흑마법사가 된 사연을 이중우에게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여기에 보덴 일족을 죽인 몬스터가 있다는 말이지.”

은석이 보덴을 소환했다.

“오! 주인님. 저기는 제가 살던 곳이 아닌가요?”

보덴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작품을 쳐다봤다.

“전에 네가 그랬었지? 지구에 원하는 만큼의 마력이 채워지면 몬스터들이 총공격을 해 올 거라고.”

“네, 제가 살던 곳을 짓밟은 것처럼 무자비하게 들이닥칠 겁니다.”

은석이 작품 앞으로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때를 기다리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겠지. 그래서 지금부터는 내가 먼저 그놈들을 찾아가서 없애 버릴 생각이다.”

은석이 놀란 보덴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 시작은 보덴의 일족을 없앤 복수부터. 어때?”

보덴이 감격에 겨운 눈빛으로 은석을 올려다봤다.

“전에 지옥귀왕과 싸워 봐서 알겠지만, 싸움은 내가 사는 곳에서 하면 안 돼. 지금까지 우리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니 이제 우리 차례다.”

오직 은석만이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게이트.

그 앞에 선 은석은 자신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이중우를 향해 싱긋이 웃었다.

“잠깐, 여행 좀 다녀오겠습니다.”

은석이 게이트 안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THE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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