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남자는 어렸을 때부터 작은 방에만 갇혀 있었다.
매일 낯선 사람들이 어린 남자를 찾아 왔고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그들의 미래를 읊어 줬다.
어렸을 때는 그저 그렇게 보였기에 말해 준 것뿐이었다. 하지만 자라서는 가족들의 요구에 더 많은 사람의 미래를 알려 줘야만 했다.
매일매일이 똑같은 어느 날.
남자는 꿈에서 자신이 죽는 장면을 보았다. 목이 뚫려 피가 낭자했지만, 오히려 후련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걸 남자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제야 이 지긋지긋한 삶에서 벗어날 수 있겠구나.’
악귀를 마주하는 인간의 공포심에 저절로 몸이 떨려 왔다. 하지만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자신의 지독한 운명의 굴레를 드디어 끊어낼 수 있다는 기대감에 남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조형민과 윤혁은 그저 남자가 공포에 질린 것이라 생각했다.
“용한 점쟁이라도 자신이 죽을 자리는 알지 못하는 모양이지?”
윤혁이 남자를 비아냥거리며 이죽거렸다.
‘병실에 들이닥쳤을 때는 미처 보지 못했는데……. 인간이 어떻게 이런 악귀 덩어리를 몸에 품고 살아 있단 말인가.’
남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윤혁을 쳐다보았다.
윤혁이 잡아 일으킨 남자의 앞으로 조형민이 안광을 번뜩이며 다가갔다.
그의 손에는 목을 찌를 예리한 칼과 피를 담을 가죽 주머니가 들려 있었다.
가까이에서 남자를 마주한 조형민이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봤다.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고 있는 남자의 몸과 달리 그의 눈빛은 강했다.
거기에 마치 자신을 비웃는 듯 삐뚤게 올린 입술.
“넌 곧 죽는다. 겁나지 않는 것이냐? 어째서 그런 눈깔을 하는 거지?”
“악귀 주제에 인간의 눈빛을 읽어?”
남자의 코웃음에 조형민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윤혁이 흠칫 놀라 남자의 뒤통수를 후려갈겼다.
“어르신, 이 새끼가 정신 병원에 오래 갇혀 있어서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봅니다.”
“악귀보고 어르신? 아둔하구나. 네가 원하는 것은 절대 얻지 못할 것인데 말이야.”
남자의 말에 윤혁이 그의 배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뒤로 훅 밀려나 벽에 부딪힌 남자가 배를 움켜잡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뱉었다.
남자는 인상을 쓰며 윤혁을 노려보았다.
“좋은 집에 태어나 호의호식했으면 덕을 베풀어야지. 금수만도 못 한 짓거리를 하니 이제 곧 너도 지옥에 빠져 영원히 그 안에 갇혀 있을 것이다.”
발을 치켜들던 윤혁은 마르고 비리비리한 남자의 눈빛과 불호령에 그대로 멈췄다.
김도운은 일찌감치 뒤로 물러나 책장 뒤에 숨어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있었다.
놀란 그들과 달리, 조형민은 썩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가갔다.
칼을 옆으로 잡고는 자신을 노려보는 남자의 목을 그대로 그었다.
순식간에 잘린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조형민이 가죽 주머니를 앞으로 내밀자 허공을 향하던 피가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목이 잘려 컥컥거리던 남자가 힘겹게 말을 이었다.
“드디어 이 족쇄 같은 육체에서 벗어날 수 있어 기쁘기 그지없다. 하지만 악귀 놈의 헛된 꿈에 내 피가 이용되는 것이 그저 원통할 뿐이다.”
“남의 인생만 보느라 네놈 인생은 살피지 못한 것이냐? 죽을 날도 모르고 살다니 말이야.”
조형민이 그를 조롱하듯 묻자, 남자가 피식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모를 수가 있겠느냐. 컥!”
가죽 주머니가 마치 숨을 들이켜듯 줄어들자, 그의 목에서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와 흡수되었다.
“날, 죽여 준 보답으로 선물 하나 주지.”
남자의 말에 조형민의 미간이 빠르게 구겨졌다.
“수백 년을 살아도 앞을 보지 못하니 짐승과 다를 것이 무엇이냐. 네가 그토록 원하는 것은 가져 보지도 못한 채 그렇게 사라지거라.”
조형민이 벽에 기댄 채 피를 흘리는 남자의 목을 움켜쥐며 소리쳤다.
“뭐야? 뭘 본 거야? 말해!”
남자는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리며 침을 퉤 뱉었다. 침이라기보다 핏덩어리에 가까운 타액이 조형민의 얼굴에 떨어졌다.
그리고는 머리를 한쪽으로 힘없이 툭 떨어뜨렸다.
조형민은 남자가 숨이 끊어졌음에도 그를 계속 흔들어 댔다.
그사이, 남자의 몸에 흐르던 피는 모조리 가죽 주머니 안으로 흡수되었다.
핏기 하나 없이 죽은 남자를 바닥으로 내던진 조형민은 윤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쯧. 칼은 구해 왔느냐?”
“네, 네. 여기 있습니다.”
메고 있던 배낭 안에서 단도 하나를 꺼내 조형민에게 건넸다.
“인간 주제에 어쭙잖은 재주 하나로 감히 앞날을 운운해?”
분이 풀리지 않은 조형민은 남자를 들어 순식간에 입 안으로 구겨 넣어 삼켜 버렸다.
그 모습에 김도운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조형민이 붉게 물든 두 눈을 번뜩이며 윤혁을 돌아봤다.
“6번째 봉인을 부숴 버리고 오겠다. 너는 빨리 7번째를 찾거라.”
윤혁이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십시오, 어르신.”
앞날을 내다본다는 남자의 마지막 말이 신경 쓰였지만, 조형민은 어금니를 빠득 깨물었다.
“더 빨리 모든 봉인석을 깨는 수밖에 없다. 귀왕님이 나오시면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 * *
[형님, 창범이입니다. 혹시 오늘 길드에 오실 수 있나요?]
아침 일찍 이창범에게서 온 문자를 확인한 후 바로 전화를 걸었다.
“길드는 왜?”
“아, 형님. 일어나셨군요.”
옆에서 황희준의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출근하는 길이냐?”
“네, 지금 희준이와 가는 길입니다.”
“혹시 뭘 찾은 거야?”
은석이 이창범에게 말해 둔 임무.
무저갱이 열리기 직전에 몰려드는 악귀의 파장을 감지하면 바로 알려 달라는 것이었다.
“네, 찾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연락드린 거고요.”
“알았다. 길드에 도착하면 바로 내 방으로 와라.”
은석은 곧바로 하데스 길드로 이동해 그를 기다렸다.
노크를 하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이창범의 뒤에서 황희준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형님, 저는 개미처럼 열심히 일하러 갑니다!”
은석도 씨익 웃으며 대충 손을 흔들어 보였다.
“앉아. 커피?”
“감사합니다.”
이창범에게 머그잔을 건네주며 은석도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찾고 있는 게 맞아?”
“맞습니다. 오늘 아침에 감지했고 바로 형님께 연락을 드린 겁니다.”
“그전에 느꼈다던 그 파장이야?”
이창범이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이 생기기 전, 미약한 마력이 한곳에 모이기 시작한다. 곧 마력에 민감한 악귀들이 몰려들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게이트가 나타난다.
하지만 무저갱의 경우는 달랐다.
무저지옥을 떠돌던 악귀들은 봉인석이 깨질 것이라 느끼는 순간, 몰려들기 시작한다.
그렇기에 무저갱을 감지했다는 것은 곧 봉인석이 깨진다는 의미였다.
“위치는?”
이창범이 프린트해 붉은 동그라미를 쳐 둔 지도를 주머니에서 꺼내 내밀었다.
“여기입니다. 해석 시립박물관 뒤편에 있는 작은 능입니다.”
은석이 지도를 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위치 좋네. 평일 아침에 야외 전시장을 찾아올 사람도 없을 거고.”
이창범이 나간 후 이현을 불러 해석 시립박물관의 옥상으로 이동했다.
“대장, 무저갱이 열리는 곳은 저기 능 사이가 아닌가요? 왜 여기로…….”
“여기서 봐야 제대로 보이거든.”
“네? 뭐가요?”
은석이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크지 않은 2개의 능과 그 사이에 서 있는 조형민이 있었다.
“곧 봉인이 깨지겠군요.”
“그래, 이제 6번째 무저갱이 열리고 악귀가 쏟아져 나오겠지.”
은석의 계획은 봉인석이 깨지도록 지켜본 후 최대한 빨리 악귀들을 없애는 것이었다.
이현도 이미 들었던 터라 그저 입술을 굳게 다물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위치를 아는 건 마지막 봉인석뿐이야. 7번째까지는 저놈이 열도록 해야 해.”
“이번에는 얼마나 큰 혼란이 일어날까요…….”
“첫 번째 균열이 생겼을 때부터 이미 세상은 혼란에 빠졌다. 열린 균열을 임시로 막고 조형민을 죽이는 걸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지.”
“지옥귀왕이 나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걱정됩니다.”
“그래, 걱정되지. 그러니 최대한 빨리 놈을 죽이고 무저갱을 없애는 수밖에 없다.”
은석의 계획이 위험한 방법이라는 것은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외에 다른 특별한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현은 능을 쳐다보는 은석의 옆모습을 힐끗 바라보았다.
은석은 미술관에서 지박령으로 떠돌다 사라질 자신을 구해 준 은인 같은 사람이었다.
‘부족하겠지만 온 힘을 다해 대장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마법봉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시작한다.”
은석의 말에 이현도 능을 내려다보았다.
조형민은 두 개의 능 사이 잔디를 향해 피를 뿌리기 시작했다.
초록색의 잔디가 순식간에 붉어질 정도로 많은 피였다.
“무저갱의 구멍이 나타납니다!”
양쪽 능과 땅에 흩뿌려진 피들이 가운데로 모여들어 일직선을 만들었다. 그러다 위로 솟아올라 타원형의 길고 얇은 판을 만들어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대장, 꼭 게이트 모양 같습니다.”
은석은 대답 대신 고개만 두어 번 끄덕였다.
2m가 넘게 우뚝 솟은 타원형의 구멍 위에서 붉은색의 물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꼭 핏물이 흘러내리는 것 같은데요.”
구멍을 천천히 살피던 조형민은 품 안에서 칼을 꺼내 들어 입구를 그대로 그어 내렸다.
사람의 살이 잘린 듯, 칼로 그은 곳에서 붉은색의 액체가 뿜어져 나와 능 하나를 붉게 적셨다.
뿜어져 나오던 액체가 줄어들자, 이내 무저갱의 악귀들이 잘린 틈으로 나오기 시작했다.
6번째 무저갱이 열리고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흉흉한 기운에 하늘이 점점 흐려져 갔다.
하늘을 살펴보던 조형민은 크게 웃고는 빠르게 자리를 떴다.
“자, 이제 우리가 나설 차례인가.”
은석은 구멍이 열린 능을 중심으로 넓게 보호막을 쳤다.
“빠져나간 놈들은 나중에 찾아 소멸시키면 되고.”
보호막에 막혀 밖으로 나가지 못한 악귀들의 찢어질 듯한 쇳소리에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나와라.”
은석의 명령에 인간형 귀속령과 악귀 체포부 차사들이 나타났다.
“무저갱에서 나오고 있는 악귀들을 모두 소멸시켜.”
“존명.”
“알겠습니다. 대장.”
악귀들을 향해 날아가는 그들을 보며 은석은 해머를 불렀다.
“넌 보호막 밖으로 나가서 빠져나간 놈들을 없애.”
“알겠습니다.”
“멀리까지 쫓을 필요는 없어. 근처에 사는 주민들을 해코지할 수 있으니 일단 근방에 머무르는 놈들을 소멸시켜.”
주말을 제외하고 평일에는 찾는 사람이 거의 없는 작은 시립박물관이었다.
작은 능 두 개뿐인 야외 전시장 역시 늘 조용했다.
그런 곳이 오늘은 악귀의 괴성으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하지만 바로 옆을 지나더라도 인간들은 소름 끼치는 악귀의 비명을 들을 수가 없었다.
곧, 해머가 주택가로 숨어든 악귀들을 모두 소멸시키고 돌아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무저갱에서 나온 악귀는 모두 사라졌다.
마지막 악귀의 목을 그은 최 차사가 칼을 집어넣으며 구멍 앞으로 다가갔다.
“너희 팀과 훈련을 하니 차사들의 실력이 확실히 좋아진 것 같구나.”
무저갱을 봉인하며 툭 던지는 최 차사의 칭찬에 은석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 * *
6번째 무저갱을 열고 조형민은 다시 불산 길드로 돌아갔다.
창문 앞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는 그의 입가에서 웃음이 떠나질 않았다.
틀어놓은 TV에서는 이상 현상에 대한 뉴스가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이전에는 하늘을 뒤덮는 것이었는데 이번에는 어떤 현상이 나타나서 이승을 혼란스럽게 만들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