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사막의 만티코어를 제거하였습니다.]
놈의 잘린 머리가 모래 위에 닿자, 은석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대장! 모래가 사라집니다!”
만티코어가 죽자 황금빛 모래 언덕이 거짓말처럼 빠르게 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열대 밀림의 짙푸른 나무들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사막을 지배하던 놈이 죽었으니 여기를 밀림의 만티코어가 차지한 모양이다.”
조금 전까지 입 안에는 가는 모래가 까슬까슬했고 입술이 바싹바싹 말랐었다.
밀림으로 바뀌고 던전 안은 순식간에 높은 습도로 가득 차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직접 보고 있는데도 이런 상황은 진짜 믿기 힘들군요.”
해머가 자신의 머리 위로 늘어진 넝쿨을 뜯어내며 말했다.
“우리가 밀림 쪽을 먼저 죽였다면 던전은 온통 사막이 되었겠군요.”
그때, 사막이었을 때는 들리지 않았던 오크의 괴성이 희미하게 들려왔다.
“저쪽입니다. 대장.”
은석은 귀속령과 함께 소리를 쫓아 달려갔다.
사막에서는 싸움에 집중하느라 미처 듣지 못했던 소리가 은석의 머릿속에서 들리기 시작했다.
힘들어하는 성하의 목소리와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하는 몬스터 귀속령들의 비명이 들려왔다.
팀 고스트 중 체력으로만 보자면 성하는 몬스터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런 성하가 저렇게 힘들어한다는 건……. 아마 독이겠지?’
사막에 나타난 울창한 밀림을 벗어나니, 쓰러진 나무가 쌓여 있는 원래의 밀림 구역이 나타났다.
처음 은석의 계획대로 오크와 오우거들이 밀림의 나무를 모두 부숴 놓았다.
“아…….”
창왕이 하늘을 날고 있는 만티코어를 보며 안타까운 탄식을 흘렸다.
거기에 귀속령 주변에는 푸르스름한 연기가 흐르고 있었다.
“대장, 저놈은 입에서 독을 내뱉는 것 같습니다.”
사막의 만티코어가 꼬리에 독침이 달린 것과 달리 이놈은 입에서 독을 흘려내고 있었다.
밀림의 색깔과 비슷한 초록의 연기를 내뿜는 만티코어는 남자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검버섯이 잔뜩 피어 있는 노인의 모습에 길고 굵은 원숭이의 꼬리가 달려 있었다.
거기에 몸통에 달린 커다란 박쥐의 날개가 쉴 새 없이 퍼덕거렸다.
“저 놈도 만만찮게 괴기스럽게 생겼네요.”
“성하가 버티는 걸 보면 사막의 것보다는 독성이 약할지 몰라도 싸우기에는 더 힘든 놈이다.”
밀림의 만티코어는 아우성치는 귀속령들을 내려다보며 웃는 듯 찡그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미 승리에 도취되어 있는지 은석이 근처에 도착한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새롭게 나타난 밀림의 나무 사이사이에 다크엘프와 듀라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준비……. 발사!”
공중에 떠 있는 만티코어를 향해 화살과 라이플 총알이 날아가 박혔다.
“크아악!”
그들이 집중적으로 공격한 것은 놈의 날개였다.
순식간에 화살과 총알에 뚫리고 찢어졌지만, 놈은 날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돌돌이가 펄쩍 뛰어올라 조금씩 아래로 내려오는 만티코어의 날개를 잡아 끌어내렸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놈이 바닥으로 떨어지자, 성하가 은석의 곁으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선수 교체하시죠. 대장.”
“고생했다.”
은석이 씨익 웃으며 그녀가 내민 손을 마주쳤다. 그리고 곧바로 성하와 오크 무리를 저승으로 돌려보냈다.
땅으로 끌려 내려온 만티코어를 향해 인간형 귀속령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놈이 달려오는 그들을 향해 잔뜩 입을 벌려 독을 토해냈다.
“해제. 다시 소환.”
은석은 빠르게 만티코어의 앞에서 귀속령들을 사라지게 한 뒤, 놈의 뒤편에 다시 나타나게 했다.
“크아악!”
순식간에 몸통을 난도질당한 만티코어가 참을 수 없는 고통에 온몸을 비틀었다.
죽이지만 못했을 뿐, 성하와 오크들이 놈의 힘을 많이 빼 놓은 상태였다.
거기에 몸통이 벌집처럼 쑤셔지자, 대응할 힘조차 내지 못하고 쇳소리 가득한 괴성만 질러댔다.
“돌돌아! 모가지 잡아!”
은석이 적룡검을 치켜들며 질주했다.
그의 명령에 돌돌이 한 손으로 만티코어의 흉측한 얼굴을 힘주어 눌렀다.
서걱-
얼굴을 빼내려 버둥거리는 놈의 목을 단번에 그어 내렸다.
[밀림의 만티코어를 제거하였습니다.]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연이어 또 다른 메시지가 떠올랐다.
[축하합니다. 100레벨을 달성하였습니다.]
[지옥선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악귀 체포부 차사들이 충성을 맹세합니다.]
‘드디어 100레벨이다.’
메시지를 본 은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귀속령들이 사막과 밀림의 만티코어 사체를 게이트 입구로 옮겼다.
“대장, 여기에 놔두기만 하면 되나요?”
“그래, 후반 작업을 하기 위해 들어올 팀에게 가지고 나가라고 할 거니까.”
“몬스터를 왜 밖으로…….”
“만티코어를 직접 본 헌터들이 거의 없으니까. 앞으로 이런 놈들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으니 봐 두는 게 좋겠지.”
“대장, 이번에는 마정석 채굴을 하지 않으십니까?”
“그것도 협회 쪽에 넘길 거다. 만티코어 마나석도 함께.”
“S급이라 꽤 값어치가 나갈 텐데요. 그걸 왜…….”
“수수료를 받는다고 해도 입찰을 안 하니 협회 운영이 힘드실 거다.”
“아, 회장님께 드리는 선물이군요.”
“뭐, 기부라고 하면 되겠지.”
은석은 귀속령을 모두 소환 해제한 후, 게이트 밖으로 나갔다.
“어?”
들어올 때 있었던 크고 깊은 분화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다른 게이트와 마찬가지로 둥글고 큰 모양으로 변해 있었다.
그것뿐만 아니라 게이트 앞에 일렬로 서 있는 협회 직원들.
은석이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김은석 헌터님, 고생하셨습니다.”
협회 직원의 단체 인사를 받아 본 적이 처음이라 은석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김은석 헌터님 덕분에 엄청난 피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브레이크까지 4일밖에 남지 않은 S급 던전이었다.
은석에게 기대하기는 했지만 다들 솔직히 반쯤은 포기한 상태였다. 그런데 4일을 채우기는커녕 이틀 만에 S급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온 것이었다.
레이드에 들어갔을 때 게이트 앞까지 안내했던 직원이 더 환하게 웃고 있었다.
“후반 작업은 협회에서 맡아서 해 주십시오. 마정석도 그대로고, 만티코어의 사체도 입구에 있습니다.”
“네? 만티코어요?”
눈이 휘둥그레진 직원들을 보며 은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번 던전의 몬스터가 만티코어였습니다. 최강호 회장님께서 어떻게 처리하는지 잘 아실 테니 물어보고 진행하십시오.”
“아……. 네, 네. 알겠습니다!”
그때, 멀리서 은석을 향해 손을 마구 흔들며 뛰어오는 사람들이 보였다.
“저기요! 잠시만요!”
숨을 헐떡이며 도착한 사람들이 다급하게 물었다.
“김은석 헌터님, 최초로 S급 던전을 솔로로 클리어한 소감 한 말씀 해 주십시오.”
던전이 클리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급하게 달려온 기자들이었다.
한 사람의 질문이 시작되자, 뒤이어 도착한 기자들도 질문을 쏟아냈다.
“헌터님, 앞으로도 이렇게 높은 등급의 던전이 나타날 거라 예상하십니까?”
처음에는 은신으로 몸을 감춘 후 자리를 빠져나가려 했지만, 은석은 마음을 바꾸었다.
S급이 나타났다는 것은 지구의 마력 농도가 더욱 짙어졌다는 증거.
앞으로도 이런 최상위 랭크의 던전이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조건 숨기는 것이 해결 방법이 될 수는 없지.’
기자들을 천천히 돌아보며 은석이 입을 열었다.
“앞으로 높은 등급의 던전과 몬스터가 더 많이 나타날 거라고 생각합니다.”
“김은석 헌터님, 그렇게 예상하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기자들의 질문에 답을 하던 은석의 눈에 잿빛 구름으로 뒤덮인 하늘의 모습이 들어왔다.
‘날씨가 왜 저래? 그냥 흐리다고 할 수 있는 구름이 아닌데? 혹시 내가 던전에 있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건가?’
은석은 빨리 저승에 내려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따로 자리를 한번 마련하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잠시만요! 김은석 헌터님, 질문 하나만 더 드리겠습니다!”
“여기서 모든 걸 다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한국 각성자 협회와 함께 공식적으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은석은 재빨리 은신으로 몸을 감추었다.
눈앞에서 갑자기 은석이 사라지자 기자들의 탄식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중 몇 명은 발 빠르게 협회 쪽 정보통에게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 * *
“어딜 갔다가 이제야 들어오는 것이냐?”
방에 도착하니 침대 위에 앉아 인상을 잔뜩 쓰고 있는 청안이 보였다.
“뭐야? 주인도 없는 남의 방에서 뭐 해.”
“흥! 주인? 내가 이 집의 주인이거늘, 어디 주인이 없다는 것이냐?”
“됐고. 나 지금 바쁘거든. 할 말 있어서 기다린 거면 빨리 해.”
“최 차사 놈이 그렇게 불렀을 때는 대답도 하지 않더니. 이제야 저승에 내려간다고?”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던 은석이 뒤를 돌아봤다.
“던전에 있었는데. 왜, 최 차사님이 날 불렀어?”
“네가 없는 사이 5번째 봉인석이 깨졌다.”
은석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커튼을 열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잿빛 구름이 세상을 완전히 뒤덮을 듯 낮게 날며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던전에서 지금 나온 것이냐?”
“그래, 나와서 보니 하늘이 저 모양이더라고. 그래서 급하게 온 거야.”
“지금 바로 저승으로 내려가는 것이냐?”
“어, 내려갈 거야. 그런데 왜 자꾸 꼬치꼬치 캐묻는 거야?”
5번째 무저갱 입구가 열리고 이승의 기운이 바뀌면서 청안이 평소와 달리 불안해 보였다.
그렇다고 당장 인간들 앞에 본래의 모습을 드러내 악귀를 잡으러 다닐 수도 없었기에 초조해하는 것 같았다.
청안의 모습에 은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아직 3개가 남아 있으니까.”
“네가 다시 던전에 들어가 버리면…….”
은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제 무저갱에 집중할 거야. 던전은 지금 협회에서 잘하고 있으니까.”
순간 청안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니까 내가 부르면 당장 달려와서 악귀 잡아먹을 준비나 하고 있어라.”
“물론이다. 이렇게 집 안에만 있는 것보다 그편이 훨씬 좋지.”
“최 차사님 뵙고 올 테니 집 잘 지켜. 밖에서 악귀들이 난리 치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라. 감히 어느 놈이 지옥 제1수문장인 청안 님이 지키는 이곳에 들어온단 말이냐.”
은석이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좋아. 비싼 사료를 사 준 보람이 있어.”
그리고 곧바로 자작나무 그림을 열어 저승으로 내려갔다.
은석은 먼저 카포텐의 저택으로 갈 생각이었다.
봉인에 대해 알아보는 것도 급했지만, 던전에서 중독되어 돌아간 귀속령들의 확인이 우선이었다.
은석의 상태가 좋으니 그들 역시 이미 회복되었겠지만, 그래도 직접 보고 싶었다.
“왜 다들 여기 계시는 겁니까?”
하지만 저승에서 은석을 먼저 기다리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악귀 체포부 차사들이 줄을 맞춰 카포텐의 저택 앞에 서 있었던 것.
“대장님을 뵙습니다.”
은석이 나타나자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100레벨을 달성해 지옥선의 주인이 되자, 은석에게 수장으로서의 예를 행하는 것이었다.
고개를 숙인 차사들을 보며 은석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귀속령들이 대장이라고 부르길래, 그렇게 호칭하라 일렀는데 마음에 드느냐?”
한쪽 옆에 서 있던 최 차사가 은석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렇군요. 갑자기 대장이라고 불러서 놀랐습니다.”
“지옥선의 주인이 된 것을 축하한다. 아주 훌륭하구나.”
“감사합니다. 최 차사님.”
“이제 이들은 내가 아니라 네 명령을 가장 우선으로 따를 것이다.”
최 차사의 말을 들으며 은석은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는 차사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그는 저승차사들의 지휘권을 가진 최초의 인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