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이창범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김도운이 내민 기계를 받아 들었다.
상단에 달린 버튼을 누르니 금방 전원이 들어와 기계 전체가 반짝거렸다.
그리고는 앞쪽에 있는 두 개의 버튼 중 하나를 돌리자 끼익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금은 생길 것 같은 던전이 없어서 이게 끝이에요. 하지만 던전이 나타나면 소리가 달라지는데 그때 왼쪽 버튼을 돌려 보세요.”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두 개의 버튼을 살살 조절하다 보면 어느 순간 딸깍거리면서 맞물리는 순간이 있어요.”
기계를 돌려 뒤편의 작은 액정을 가리켰다.
“그럼 이 창에서 던전의 좌표와 시간이 나타날 거예요. 그걸 보고 위치를 찾으면 되고요.”
김도운은 기계를 다시 받아 몇 번이나 확인하면서 작동법을 익혔다.
“아니다. 그냥 너도 같이 가자. 윤혁 앞에서 했는데 제대로 작동 안 되면 나만 죽어나니까. 널 놔두고 내가 죽을 수야 없지.”
침착하게 설명을 하던 이창범이 같이 가자는 그의 말에 기겁하며 빌기 시작했다.
“제발요, 다 가르쳐 드렸잖아요. 절대 도망 안 갈게요! 여기 있을 테니까 작동 안 되면 다시 오세요.”
두 손을 모아 싹싹 비는 그의 모습에 김도운이 어이가 없는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윤혁 몰라? 갑자기 왜 안 가겠다는 거야?”
“절대, 절대 다시는 도망가지 않겠습니다. 의심스러우시면 저 사람들도 여기 같이 있으면 되잖아요. 제발 여기 있게만 해 주세요.”
이해하기 힘든 그의 행동에 은석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러지? 지금까지 던전을 찾아 주면서 같이 일해 왔을 텐데. 그대로만 하면 되는 거잖아.’
이창범의 행동에 놀란 건 김도운도 마찬가지였다.
‘괜히 끌고 갔다가 윤혁 앞에서 지랄발광이라도 하면……. 또 나만 죽어나겠지? 차라리 아직 못 찾았다 하고 혼자 작동법을 연습을 해 본 다음에 윤혁에게 주는 게 낫겠어.’
김도운이 옆에 서 있는 덩치 하나를 보며 말했다.
“너, 여기서 이 새끼 지키고 있어. 놓치면 죽는다.”
“네, 알겠습니다.”
여전히 빌고 있는 이창범을 보며 말했다.
“그리고 창범아, 만약에 내가 이걸로 던전을 못 찾으면 그때는 바로 튀어 와야 한다. 알겠지?”
지금 당장 가지 않아도 된다는 그의 말에 이창범의 안색이 밝아졌다.
“네, 네. 그럼요. 당연히 될 겁니다. 한 번만 찾아보시면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김도운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끼를 휘두르던 덩치에게 기계를 넘겼다.
“조심히 들고 와라.”
거실을 나가려던 김도운이 멈추더니 다시 돌아와 이창범을 내려다봤다.
그대로 구두를 신고 있는 발을 들어 바닥을 짚고 있는 그의 손을 꽉 눌러 밟았다.
“악! 내 손!”
구둣발로 손등을 마구 비벼대자 이창범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가려고 하니까 또 화가 나서 말이지. 이창범 새끼야, 그러니까 잘하라고. 도망치지 말고.”
바닥으로 침을 퉤 뱉은 후에야 김도운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집 밖으로 나갔다.
얇은 손등의 피부는 짓이겨져 찢어졌고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창범은 손을 부여잡은 채로 온몸을 벌벌 떨었다.
거실 구석에서 그 장면을 쳐다보던 은석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윤혁 앞에서는 꼼짝도 못 하는 놈이 이창범이 약자라고 스트레스를 다 풀고 가는군.’
김도운을 배웅하고 온 덩치가 부서진 문을 적당히 걸쳐 두고 거실로 들어왔다.
조금 전에 김도운이 앉았던 소파에 앉아 이창범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은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자가 사라졌으니 이제 늑대가 왕이다, 이건가?’
덩치가 어깨를 움츠린 채 고통을 참고 있는 이창범을 보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야! 손님이 왔으면 먹을 거라도 가져와야 할 것 아니야! 손님 대접이 뭐 이따위야.”
“손님은 무슨. 도둑놈 주제에.”
이창범과 덩치뿐인 집 안에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야!”
놀란 덩치가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은석이 몸을 감췄던 은신을 없애는 동시에 놈의 뒷덜미를 강하게 내려쳤다.
“어억!”
짧은 비명을 흘리며 덩치는 소파 옆으로 풀썩 엎어졌다.
이창범 역시 갑자기 나타난 은석의 모습에 놀라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나 몰라? 조금 전에 만났었잖아.”
“아, 김은석 헌터……. 그런데 어떻게…….”
은석이 이창범 앞에 한쪽 무릎을 굽히며 앉았다.
“그건 차차 알게 될 거고. 얼굴이 이게 뭐냐?”
시간이 지나면서 맞은 부위가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해 이창범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은석은 그의 상처를 살피며 혀를 끌끌 찼다.
“맞기 전에 주면 될 것을. 꼭 고집을 피워요. 다들.”
그의 말이 기분 나빴는지 이창범이 고개를 휙 돌렸다. 하지만 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오른손을 확 잡아끌었다.
“악!”
통증이 여전한지 이창범은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자신의 손을 살피는 은석을 핏줄이 터져 벌겋게 변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힘도 없으면서 성질머리가 그러니 이렇게 쥐어 터지고 다니는 거지.”
이창범의 시선은 신경 쓰지 않고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고 했다.
순간, 자신을 때리는 줄 알았는지 이창범이 손을 들어 막으려 했다. 하지만 이미 만신창이가 된 팔이 제대로 들릴 리가 없었다.
“움직이지 마라. 치료해 줄 테니까. 내가 힐러라는 건 알지?”
이창범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은석의 손에서 나온 생력이 그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온몸을 감싸는 따뜻한 기운에 놀라는 것도 잠시, 이내 눈을 감으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깨에서 손을 떼어냈지만, 이창범은 한동안 몸 안을 돌고 있는 따듯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눈을 뜨고 더는 통증이 느껴지지 않는 손을 내려다봤다. 찢어지고 피가 흐르던 상처가 사라지고 없었다.
“와, 진짜……. 다 나았네.”
손을 들어 얼굴과 몸을 더듬거리며 이창범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대박…….”
놀라는 그의 모습에 은석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힐러 본 적 없어?”
“봤어요. 봤지만 이렇게 완벽하게 상처가 사라지는 건 처음이에요.”
그때, 소파에 쓰러져 있던 덩치가 신음을 흘리며 얼굴을 움찔거렸다.
깨어나려는 것 같아 은석이 일어나 그의 얼굴에 정통으로 주먹을 날렸다.
신음은 멈췄지만 대신 쌍코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걸 본 이창범이 풉 웃음을 터트리자, 은석이 그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서 너도 때려. 조금 전에 엄청 많이 맞았잖아. 복수해야지. 지금이 기회야.”
이창범은 멋쩍은 미소만 지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복수는 무슨……. 때리는 제 손이 더 아플걸요.”
“음, 그럴 수도 있겠네. 그럼 내가 널 대신해서 한 대 더 쳐 줄게.”
은석은 덩치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세게 날렸다. 그리고는 거실 구석에 넘어져 있는 작은 의자를 가져와 킥킥거리는 이창범의 앞에 내려놓았다.
“앉아.”
은석이 맞은편에 놔둔 의자를 가리켰다.
의자에 앉은 이창범이 은석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 구해 주셔서 고맙…….”
“왜 거짓말을 한 거지?”
인사를 끝내기도 전에 치고 들어온 은석의 질문.
“네? 거짓말이요? 무슨 거짓말을 말씀하시는 건지.”
은석이 피식 웃음을 뱉었다.
“무슨 거짓말이라니. 이것 말고 또 다른 거짓말이 있다는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당황하는 이창범을 보며 은석이 말했다.
“김도운에게 준 그 기계. 그거 아무것도 아니잖아. 던전 찾는 기계는 당연히 아니고.”
은석의 말에 이창범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움직였다.
“던전은 기계가 아니라 네가 찾는 거잖아. 왜 숨기고 있는 거야? 네가 각성자라는 걸 말이야.”
이창범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떻게 그걸…….”
급기야 딸꾹질까지 하기 시작하는 이창범.
“그걸 아는 사람은 이제 없는데……. 누가 말해 준거죠?”
“말해 주긴 누가 말해 줘. 내 능력이지.”
“……능력.”
은석도 문틈으로 목소리만 들었을 때는 몰랐었다. 김도운을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을 때 마주한 이창범의 정보창.
[이창범, 22세, A급 마법사(탐지)]
‘던전을 찾아낸 게 네가 만든 기계가 아니라 너였구나.’
기계를 들고 히죽거리는 김도운을 보며 은석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았다.
“왜 탐지 능력을 가진 A급 마법사라는 걸 숨기는 거지?”
이창범은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래, 말하기 싫으면 어쩔 수 없지. 하지만 내가 널 구해 줬다는 건 잊지 마라.”
은석의 말에 이창범은 얼굴이 부어오른 채 쓰러져 있는 덩치를 쳐다봤다.
“김도운이 기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 널 가만히 둘 것 같아?”
그의 이름이 나오자 이창범의 표정에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사람은 자신에게 오는 기회를 잘 잡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네게 그런 기회가 온 거야.”
이창범은 눈을 껌뻑거리며 은석을 가만히 쳐다봤다.
겨우 이십 대 초반의 나이. 은석은 아직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모른다.
다만 잔뜩 주눅 든 행동과 불안하게 움직이는 눈동자만으로도 그가 평범하게 살아오지 않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윤혁이 돈은 많이 던져 줬을지 몰라도 제대로 된 대접을 해 줬을 리는 없을 테고.’
아무 말 하지 않고 있는 이창범을 살펴본 은석이 내린 결론은 설득보다 적당한 협박과 농담이었다.
“네가 윤혁과 짜고 인스턴트 던전을 찾아내서 경매에 올렸지?”
생각에 잠겨 있던 이창범이 놀라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게 짠 게 아니라, 시켜서…….”
“어떤 관계든 간에, 그거 불법인 건 알지?”
이창범은 은석의 눈을 피하며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조금 전에도 말했었지만 나는 오선 헌터님의 소개로 온 거야. 기억나지? 저놈한테 맞았다고 그새 다 잊어버린 거 아니지?”
이창범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오선 헌터님. 잠깐 만났었지만 좋으신 분 같았어요.”
“그래, 그 좋으신 분이 널 내게 소개해 줬어.”
“그때는 어려서, 돌려서 거절하신 걸 금방 이해하지 못했었죠. 연락 주신다길래 진짜 컴퓨터 앞에서 계속 기다렸었는데……. 이제야 연락을 주시네요.”
“오선 헌터님이 박수무당이라는 건 알지?”
“네. 그건 왜…….”
“생각해 보면 진짜 영험하시지 않냐? 네가 딱 이렇게 얻어터지고 있을 걸 예감하고 날 보내신 게 아닐까?”
은석의 너스레에 이창범이 그제야 긴장이 풀어진 듯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답답한지 깊은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은석은 잠시 그를 지켜보기로 했다.
“내가…….”
이창범이 고개를 들어 은석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가 김은석 헌터님의 손을 잡으면 윤혁의 손에 죽지 않을 수 있나요?”
느닷없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윤혁의 이름.
“윤혁? 김도운이 아니라?”
이창범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건 진짜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는 건데…….”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주위를 다시 한번 더 살폈다. 듣는 사람이 없는데도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윤혁은, 사람을 죽여서 연기로 만들어 버려요.”
가슴 속 깊이 숨겨 두었던 엄청난 비밀을 말한 이창범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
하지만 은석의 반응은 자신의 예상과 전혀 달랐다.
은석이 눈빛이 빠르게 굳어져 갔다. 그걸 본 이창범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거……라뇨?”
“봤어? 윤혁이 사람을 연기로 만드는 거.”
“……네, 봤어요.”
“어디서? 던전 안에서?”
“같이 레이드를 돌던 형을, 죽였어요. 윤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