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어떤 몬스터를 부하로 만들지 마냥 신난 성하.
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해머를 바라봤다.
“해머, 다크엘프 군단은 네가 맡아라. 뛰어난 원거리 전투형이니 쓸 만할 거다.”
해머가 은석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대장, 감사합니다. 전투에 도움이 되도록 잘 훈련시키겠습니다.”
자신의 휘하에 군대가 생겼다는 게 마음에 드는지 해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창왕, 다음 던전에 나오는 몬스터는 네 부하다.”
“어떤 몬스터가 나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성하가 은석의 앞으로 폴짝 뛰어 들어왔다.
“대장, 그럼 저는요? 저는 쥐 같은 몬스터는 싫은데. 그런 게 나오면 어떡하죠? 패스되나요?”
은석이 어깨를 들썩였다.
“그것도 성하 네 운이지. 네가 원하는 몬스터가 나오길 오늘부터 열심히 빌어 봐.”
그 시각, 협회 직원은 게이트 근처에 마련된 천막 안에서 전화 통화를 하고 있었다.
“그래, 너도 알잖아. 김은석이 들어갔다 나오는 던전은 마정석이 하나도 없어서 꽝정석이라고 불리는 거.”
“그런데 뭘 기다린다는 거야?”
“몬스터 심장에 박혀 있는 마나석이 있잖아. 전에도 마나석은 건드리지 않았다고 하더라고. 그리고 여기가 A급 던전 아니냐.”
“오! A급 몬스터 마나석이라. 좋은데?”
“내가 지금 소원이 딱 하나 있거든.”
“뜬금없이 무슨 소원?”
“김은석이 일주일 다 채우지 말고 몇 시간만 빨리 나왔으면 하는 거.”
“그건 또 무슨 말이야?”
“그래야 협회에는 일주일 다 채웠다 말하고 남은 시간 동안 마나석을 뽑아낼 거 아니냐.”
휴대폰 너머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야, 이 새끼. 머리 좋은데. A급 마나석을 혼자 꿀꺽하겠다고?”
“인마, 이현철도 뒷돈 쓸어 담는 거 세상이 다 아는데 이런 협회에서 정직한 놈만 바보 아니야?”
“그렇지. 기회가 왔을 때 한몫 챙겨야지.”
“그러니까 미리 칼 잘 쓰는 놈 몇 명만 섭외해 놔. 연락하면 바로 튀어올 수 있게.”
우-웅.
그때, 게이트가 클리어되었다는 진동이 울렸다. 협회 직원이 놀라 천막 밖으로 후다닥 뛰어나갔다.
“이, 이게 무슨…….”
“말 하다 말고 뭐 하는 거야? 칼잡이는 몇 명 준비하면 되는데?”
“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김은석이 던전에서 나왔다고!”
“무슨 소리야. 던전에 들어간 지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나온다는 거야?”
“이틀. 겨우 이틀 만에 A급 던전을 클리어했어…….”
직원은 전화를 끊고 일렁이기 시작한 게이트 앞으로 다가갔다. 들어갈 때와 마찬가지로 홀로 걸어 나오는 은석이 보였다.
“하! 저 새끼 진짜 미쳤네. 이틀이라니…….”
직원은 어이가 없어 실없는 웃음만 흘렸다.
상위 길드 팀이 들어가도 빨라야 하루 정도 당겨지는 게 A급 던전이었다.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지 직원은 휴대폰을 들어 날짜를 다시 한번 더 확인했다.
“진짜 이틀이네.”
100회 레이드 달성 기록을 세운 은석이 또 다른 기록을 만들어 낸 순간이었다.
은석은 놀란 표정을 짓고 있는 협회 직원에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지나치려는데 직원이 다급히 은석을 불러 세웠다.
“김은석 헌터님, 잠시만요. 후반 작업에 대해 말씀해 주셔야지, 그냥 가시면 어떡합니까? 이번에도 당연히 마정석은 없겠죠?”
계획이 틀어진 협회 직원의 말투가 귀에 거슬렸다. 하지만 은석은 그저 싱긋이 웃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럴 줄 알았다. 새끼야.’
직원이 입꼬리를 비릿하게 올리며 말했다.
“헌터님이 마정석을 알뜰하게 쓸어 가신다는 건 이미 소문 들어 잘 알고 있습니다.”
“아, 그런 소문이 났었나요?”
“네, 협회에 자자합니다. 그건 그렇고 마나석은 제가, 아니 협회에서 정리하면 되겠죠?”
은석이 안타깝다는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 어쩌죠? 이번 던전에서는 마나석까지 모두 뽑아왔는데.”
“네에?”
눈이 휘둥그레진 직원을 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정리했습니다.”
A급 마정석과 마나석이 귀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은석은 이전 던전과 마찬가지로 굳이 그것을 꼭 채취할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던전 클리어 후, 나오는 시간을 늦춰 가면서까지 마나석을 뽑아낸 이유는 단 하나.
바로 탐욕귀 때문이었다.
‘탐욕귀의 입 안에 하나라도 들어가게 할 수 없지.’
물론 협회 직원 개인의 욕심을 채우는 것으로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직원은 A급 몬스터 마나석을 가질 생각에 한껏 들떠 있었다.
은석의 말을 듣고 있는 그의 표정이 황당하지 그지없었다.
“정, 정말입니까? 마나석 작업까지 전부 끝냈다고요?”
믿기 힘든지 은석에게 같은 질문을 계속했다. A급 던전의 마정석뿐만 아니라 마나석 후반 작업까지 이틀 만에 끝낸 적은 없었다.
“네, 신경 쓰지 않으시게 아주 깔끔하게 정리하고 나왔습니다.”
은석은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돌아서 걷기 시작했다.
따르릉-
조금 전, 직원과 통화하던 남자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김은석은 갔냐? 칼잡이 몇 명 준비하면 되는 거야?”
“준비는 무슨 준비를 해! 시발! 끊어!”
협회 직원은 버럭 소리를 지르며 전화를 끊었다.
* * *
은석은 멀리서 들리는 고함에 통쾌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방으로 이동했다.
휴대폰 전원을 켜자, 황희준이 보낸 여러 통의 문자 진동이 울렸다.
[형님, 클리어하고 나오셨습니까? 던전 입찰에 문제가 조금 생겼는데요, 나오시면 연락 주십시오.]
[형님, 김도운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급한지 내일 당장 보자고 하는데요. 어쩌죠? 언제 나오십니까? 이틀짼데요.]
은석은 빨리 씻은 후에 하데스 길드로 움직였다.
1층 그의 사무실에 도착해 로비를 내다봤다.
‘의료원이 생기고 나서 확실히 로비 전시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어.’
병사와 지박령이 열심히 일하는지 사람들 사이에서 원귀 하나 보이지 않았다.
사무실 밖으로 나가려다 혹시 자신을 알아볼까 싶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이현의 마법진으로 2층 황희준의 사무실로 바로 이동했다.
“어우! 깜짝이야. 형님, 놀랐습니다. 이렇게 오실 거면 출발 전에 문자라도 주십시오.”
은석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내자, 화들짝 놀란 황희준이 투덜거렸다.
“아, 미안. 그나저나 로비에 사람들이 꽤 있네.”
“병원에서 진료받고 들르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여기가 카페라고 생각하나 봐요.”
“카페?”
“네, 저기 보십시오. 다들 커피 마시며 의자마다 앉아서 일어날 생각을 안 하잖아요.”
“여기 분위기가 좋잖아. 어떻게 보면 갤러리 카페라고도 할 수 있지.”
“음, 그건 그렇네요. 이중우 화가님 작품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 같아서 저도 가끔 로비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가 있거든요.”
황희준이 커피를 내려 은석에게 건넸다.
“던전 입찰에 문제가 있다는 말은 뭐야?”
황희준이 인상을 팍 쓰면서 태블릿을 켰다. 입찰 결과 페이지를 열어 은석이 볼 수 있게 내려놓았다.
“형님, 이거 한번 보십시오.”
최근 입찰을 받는 길드 이름이 모두 같았다.
“천명 길드?”
“네, 형님이 던전에 들어가시고 난 다음부터 천명 길드가 입찰을 모조리 휩쓸고 있습니다.”
“내가 돈은 신경 쓰지 말고 넣으랬잖아.”
은석의 말에 황희준이 억울하다는 듯 콧바람을 세게 내쉬었다.
“제가 입찰이 처음도 아니고 당연히 그랬죠. 그런데 천명 길드가 작정한 모양이더라고요. 터무니없게 높은 금액을 넣었지 뭡니까.”
은석이 최종 입찰 결과표를 천천히 살폈다.
황희준의 말처럼 하데스 길드가 넣은 금액은 일반적인 A급 던전 입찰 가격보다 높았다.
“여기, 천명 길드가 넣은 금액 한번 보십시오.”
평균보다 높은 하데스 길드와도 꽤 가격 차이가 나는 금액이었다.
“그래, 무조건 입찰을 받겠다는 의지가 그대로 드러나네.”
“상위 던전은 천명 길드가 다 휩쓸어 갔습니다. 들어갈 팀이라도 있고 입찰받는 건가?”
“혹시 천명 길드에서도 연합 던전 제안서 보내왔어?”
“네, 입찰을 모조리 쓸어 간 다음에 가장 먼저 보냈더라고요.”
“레이드를 하고 싶다면 연합 던전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거군.”
황희준이 그들이 보낸 제안서를 은석에게 건넸다.
대충 훑어봐도 하데스 길드에 손해될 것은 없어 보였다.
“형님, 진짜 형님과 레이드를 뛰고 싶어서 던전을 쓸어 간 걸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만약에 그게 맞다면, 와! 여기도 돈 지랄이 장난 아니네요.”
황희준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제안서는 내가 가져가서 다시 읽어 볼게. 이제 김도운에 대해 말해 봐.”
“오늘 아침에 메일이 왔습니다. 일단 저를 한번 만나 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얼굴을 봐야 확실한 판단이 서겠지. 인터넷에 나오는 걸 모두 믿을 수는 없으니까.”
“전화번호 하나를 보내 줬는데 확인해 보니 대포폰이었습니다.”
“만나자는 시간은?”
“내일 오전 10시고, 장소는 8시 30분에 문자로 다시 알려 준다고 합니다.”
은석이 피식 웃음을 내뱉었다.
“뭐야, 첩보 영화 찍어?”
어이없어하는 은석과 달리 황희준은 진짜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듯 비장한 눈빛이었다.
그 모습에 은석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알아서 잘할 거라 믿는다만, 하나는 무조건 알아봐라.”
“인스턴트 던전을 찾아내는 사람 말이지요?”
“그래, 아마 말해 줄 가능성은 없다고 봐야겠지만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도 살피고.”
“알겠습니다. 형님. 불시에 허를 찔러 보겠습니다.”
은석이 황희준의 곁에 서 있는 병사 17호를 쳐다봤다.
‘넌 김도운을 만나면 그자를 따라다녀라.’
‘알겠습니다. 대장님.’
은석은 제안서를 말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형님, 벌써 가시려고요?”
“그래, 던전에서 나와서 씻고 바로 여기로 온 거다. 피곤해.”
“그러셨군요. 둘째 누님은 만나지 않고 가시는 겁니까?”
“일하고 있는데 뭐 하러. 혹시 누나 보더라도 내가 왔다는 얘긴 하지 마라.”
황희준이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제안서 읽어 보시고 연락 주십시오.”
은석은 이현을 불러내 다시 그의 방으로 돌아갔다.
“귀(鬼)맵.”
지도를 펼쳐 악귀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무저갱에서 흘러나온 기운 때문인지, 확실히 악귀들의 움직임이 활발해졌어.”
지도를 움직여 이곳저곳을 살피던 중 크고 검은 덩어리 하나가 나타났다.
“이건……. 뭐지?”
검은 덩어리는 꼼짝하지 않았지만, 그곳을 향하는 원귀와 악귀가 보였다.
“움직이지는 않는데……. 인스턴트 던전과는 좀 다른 것 같고.”
은석은 한참 동안 검은 덩어리를 주시했으나 미동도 없었다.
“저긴 어디쯤이지?”
휴대폰을 꺼내 지도에 나타난 지역을 검색해 봤다.
“근처에 마을도 없는 깊은 산속인데, 혹시 공동묘지 그런 건가?”
조금 더 지켜본 다음 귀맵을 없앴다.
“내일 악귀부터 소멸시킨 후에 가 봐야겠군.”
* * *
다음 날, 황희준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보스의 개인 비서처럼 보이기 위해 얼마 없는 옷을 입고 벗기를 몇 번째였다.
“하……. 형님한테 활동비로 양복 한 벌 사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전부 왜 이렇게 구질구질해 보이지.”
황희준은 고르고 골라 그나마 직장인처럼 보이는 깔끔한 수트를 입었다.
정확히 8시 30분이 되자, 약속 장소인 카페명과 주소가 적힌 문자가 왔다.
“흠, 여긴 번화가 한가운데 있는 카페인데……. 역시 비밀스러운 이야기는 익명성이 보장된 인파 속에서 하는 게 정답이지.”
황희준은 거울 앞에서 서서 차가운 표정을 몇 번 지어 본 후에야 집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