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레이드에 들어간다는 은석의 말에 황희준이 더 신난 듯했다.
“그래, 요즘 마력이 높은 던전도 많이 나오고…….”
“맞습니다. 그래서 상위 길드 헌터들이 쉴 새 없이 레이드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러다가 던전 때문에 지구가 사라지는 게 아닌지 걱정입니다.”
‘지구는 던전 전에 지옥 악귀 때문에 없어질 수도 있다.’
저승에 대해 모르는 황희준에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황희준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조용히 읊조렸다.
“형님, 제가 무서운 이야기 하나 해 드릴까요?”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SNS에 진짜 많이 올라왔는데. 영상을 보니 확실한 것 같습니다.”
“뭔데? 어디 귀신이라도 나왔냐?”
휴대폰 너머에서 황희준이 한 손으로 입을 턱 막았다.
“형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혹시 스킬 중에 독심술도 있으십니까?”
은석은 어이가 없어 그저 콧바람만 세게 내쉬었다.
“무슨 이야기인데?”
“최근에 SNS에서 귀신을 찍었다는 사진이나 영상이 많이 올라옵니다.”
“귀신을 봤다거나 흉가 체험은 예전부터 인기 있었던 거 아니야?”
“형님, 이건 그런 곳에 가는 게 아니라 동네에서 목격되는 것들입니다.”
마력 때문에 경계가 흐려지며 지옥에서 탈출하는 악귀들이 늘어났다.
이승에서 악귀를 잡아야 할 체포부 차사들 중 일부는 놈들을 이용해 왔다.
거기에 안응 고속도로 터널에서 악귀를 잡고 있을 때 터진 세 번째 균열.
체포부 차사들이 도착하기 전에 이미 꽤 많은 무저갱의 악귀들이 빠져나간 상태였다.
그러니 어찌 보면 귀신을 봤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귀신을 무서워하는 놈이 그런 건 왜 보는데?”
머쓱해하는 황희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무섭긴 한데 또 궁금하잖습니까. 참을 수가 있어야죠.”
“너의 그 궁금증을 잠재울 수 있게 내가 레이드를 빠르게 돌아야겠다. 빨리 입찰 들어가라.”
“네, 알겠습니다. 형님.”
은석은 전화를 끊고 SNS를 뒤적였다.
“도대체 뭐가 올라왔다고 저러는 거야.”
황희준이 말했던 단어 몇 개를 검색하니 그의 말처럼 수많은 사진과 영상이 나타났다.
그중에 하나를 누르자, 늦은 밤 어느 동네의 작은 공원을 찍고 있는 영상이 재생되었다.
[저거 봐! 지금 바람도 안 부는데 운동 기구가 혼자 움직이잖아.]
[무서워. 뭐야. 말이 안 되잖아. 저렇게 크게 움직일 수가 있어?]
영상을 찍는 사람은 천천히 운동 기구 쪽으로 다가가더니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대로 도망가는 모양인지 영상이 아래위로 빠르게 흔들리다가 멈췄다.
“하…….”
은석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가 본 것은 운동 기구에 올라타 움직이고 있는 악귀의 모습.
놈은 놀라는 사람들을 보며 낄낄거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가까이 다가오는 사람을 향해 순간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귀신을 찍었다는 영상 중에는 특수 카메라를 준비해 다니는 사람까지 있었다.
“다들 흉가나 공동묘지를 찾아다닐 수고는 덜었네.”
은석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다음 날 아침, 조깅을 마치고 들어온 은석의 눈에 방과 거실을 분주히 다니는 김은영이 보였다.
“아침부터 정신없게 뭐 하는 거야?”
김은영은 늘 모두 집을 나간 후에 느지막이 일어났었다.
“동생아, 오늘부터 이 누님이 한국 최고의 마력 전문 병원으로 출근을 하지 않겠니? 지태웅 선생님께 이야기 못 들었어?”
“통화할 시간이 없었어. 진짜 할 생각이었어?”
황희준에게 이미 들었지만, 다시 들어도 놀라웠고 걱정스러웠다.
“어머! 얘는. 당연하지. 계속 놀 수는 없잖아. 병원에 다시 가려니 영 내키지 않았던 것뿐이야. 그런데 영체 신경 안 쓰고 일할 수 있으니 나한텐 완벽한 직장 아니겠냐?”
“힘들 거야. 생각보다 더.”
“동생아, 원래 남의 돈 받는 건 힘든 법이다.”
김은영도 은석이 뭘 말하고 싶은지 잘 알고 있었다. 평범한 병원이었다면 저런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은석의 팔을 주먹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오! 누님 걱정도 할 줄 알고. 우리 은돌이 많이 컸는데.”
“됐고. 출근은 어떻게 할 거야? 대중교통으로 가기 불편한 곳인데.”
“오늘은 아빠가 데려다 주신다고 했고. 올 때는……. 희준이 있지? 희준이 차 얻어 타고 오지 뭐.”
은석은 첫 출근 축하한다는 인사말을 건네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 안 실장에게서 장문의 문자가 도착했다.
[아침 일찍 죄송합니다. 오늘부터 김은영 간호사님이 출근하신다고 들었습니다. 교통편이 좋지 않은 곳이라 출퇴근에 쓰시라고 급하게 작은 차 한 대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제가 길드로 돌아갈 때까지만 사용하시라 전해 주십시오.]
업무에 대한 간단한 이야기와 윤꽃샘 회장의 상태에 대한 것도 덧붙였다.
그의 문자를 읽어 내려가며 은석은 혀를 내둘렀다.
“역시 안 실장님 대단하시네. 병원에서 정신없으실 건데 언제 또 이런 걸 준비하신 거야?
김은영에게 말해 주려다 병원에 가서 듣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관뒀다.
은석은 귀맵을 열어 무저갱에서 나온 악귀의 위치를 확인한 후, 서둘러 나갈 준비를 했다.
“주거지 근처에 몰려 있으니 곧 사람들을 괴롭히기 시작할 거다. 그전에 모두 소멸시켜야 해.”
이현을 불러내 지도에 나타난 곳 중 악귀들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장소로 이동했다.
* * *
그들이 도착한 곳은 예전에 제약 회사로 사용되었던 건물이었다.
단층이었지만 부지가 넓어 여러 개의 방과 복도가 미로처럼 이어져 있었다.
이상하게도 햇살이 건물 안으로 들지 않아 서늘하고 음산한 기운이 가득했다.
“대지에 음지가 굉장한 곳입니다.”
주차장으로 이용되었던 넓은 앞마당을 둘러보던 이현이 말했다.
건물 뒤에는 공원으로 이용되는 낮은 언덕 지대가 있었다. 거기에 뿌리를 내린 커다란 나무들이 건물 지붕으로 가지를 뻗어 뒤덮고 있는 모양새였다.
“땅이 이러니 건물에 사람이 오래 머물 수 없지.”
유리로 된 건물 출입문은 두꺼운 쇠줄과 큰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귀신 한번 보겠다고 참 많이도 다녀가셨네.”
먼지가 내려앉은 출입문과 창문에는 사람들의 손바닥 자국이 가득했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악귀를 보려고 굳이 밤에 이런 곳을 찾아오는 걸까요?”
“이해할 수 없지? 나도 그렇다. 무서운 게 뭐 그렇게 좋다고. 악귀나 붙여 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사용하지 않는 건물이라고 해도 엄연히 주인이 있는 사유지였다.
함부로 자물쇠를 부술 수도 없으니, 은석은 흔적을 남기지 않고 빠르게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은석이 이동한 곳은 물건을 쌓아 두었던 커다란 창고였다. 햇살이 밝은 아침이었으나, 창고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어 칠흑같이 어두웠다.
“암안.”
은석이 시동어를 말하자, 그의 눈앞에 바글거리며 모여 있는 악귀와 원귀들이 나타났다.
“어? 저건?”
정보탐색 레벨 상승으로 따로 명령하지 않아도 악귀들의 등급이 자동으로 머리 위에 나타난 것이었다.
“무저갱에서 나온 상급 악귀 몇에, 대부분 음기에 이끌려 머물던 놈들이군.”
살아 있는 인간의 등장에 입맛을 다시며 다가오는 악귀들이 보였다.
놈들을 가소롭게 쳐다보며 은석은 인간형 귀속령을 소환했다.
“와! 귀신 떼거지. 너무 좋아요. 대장!”
잔뜩 몰려 있는 악귀를 보며 성하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너희들로 충분하겠지?”
“물론입니다. 대장.”
해머가 몸을 풀 듯 철장을 휘두르며 대답했다.
“전부 소멸입니까?”
“그래, 빨리 클리어하고 다른 곳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건물 안 어둠 속에서 소멸되는 악귀들의 찢어지는 비명이 끊이지 않았다.
아침부터 시작된 악귀 소멸은 오후 늦게까지 이어졌다.
은석은 귀맵을 보며 먼저 무저갱의 악귀부터 찾아 없앴다.
틈틈이 영상 속에서 본 사람들을 괴롭히던 악귀도 소멸시켰다.
운동 기구를 흔들던 악귀의 머리가 막 성하의 주먹에 뚫려 사라졌다.
“대장, 진짜 악귀가 엄청 늘어난 것 같아요.”
“늘어났다기보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놈들이 모습을 드러낸 거지.”
“숨었다가 왜 갑자기 나타난 거죠?”
“이승의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는 걸 놈들도 느낀 거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싹 다 나왔으면 좋겠어요. 모조리 다 없애 버리게. 역시 싸우는 상대는 많아야 흥이 나는 거 아니겠습니까.”
성하의 말에 심각했던 팀원들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대장, 그럼 이제 또 다른 악귀를 잡으러 가는 건가요?”
그때, 주머니에 넣어 둔 은석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잠시만.”
황희준에게서 도착한 문자였다.
[형님, 레이드 일정이 잡혔습니다. 어디 계십니까? 괜찮으시면 길드로 오셨으면 합니다.]
은석이 들고 있던 적룡검을 휙 내려치며 영체의 찌꺼기를 털어냈다.
그 모습에 모두 오늘 악귀 사냥은 여기서 끝났다는 걸 알았다.
“오늘 일정은 여기까지고 곧 던전에 들어갈 거다. 그런데 요즘에는 최 차사님과 훈련은 안 해?”
승형이 대답했다.
“네, 차사님과 훈련하고 싶은데 많이 바쁘신지 잘 뵙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그와 훈련하기를 즐겼던 창왕과 승형, 그의 병사들이 아쉬운 탄성을 흘렸다.
“바쁘신 것도 있지만 훈련은 그만하면 되었다고 생각하셔서 그런 걸 꺼다.”
“아닙니다. 아직 많이 부족합니다.”
“얼마 전에 악귀와 싸우는 너희들을 보고 최 차사님이 체포부 차사보다 실력이 뛰어나다고 하셨다.”
최 차사가 칭찬했다는 말에 모두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러니 섭섭해할 필요 없어.”
은석은 모두 저승 훈련장으로 돌려보내고, 바로 하데스 길드로 이동했다.
* * *
사무실에 도착한 은석은 싸우느라 지저분해진 옷을 먼저 벗었다.
옷장에 준비해 둔 여벌의 옷으로 갈아입고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하데스 길드 건물 밖으로 나가 의료원으로 향했다.
의료원은 하데스 건물 3층에 있었지만, 길드 내부에서는 갈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게 좋아 로비를 전시장으로 오픈했지만, 의료원은 철저히 분리했다.
하데스 길드 입구 반대편에 의료원 출입문을 새로 만들었다.
그래서 병원을 방문한 사람들도 로비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서는 건물을 돌아 다시 들어가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의료원 공사를 하며 길드 사무실에는 등록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보안 시스템을 설치했다.
안 실장이 인간을 상대로 대비했다면, 은석은 영혼을 대상으로 시스템을 정비했다.
각 층마다 서 있는 지박령의 수를 늘렸고, 특히 의료원에 병사들을 상주시켰다.
의료원에는 용병들뿐만 아니라 마력에 다친 일반인들도 있었다.
일반인이지만 마력으로 인한 상처로 인해 놈들의 표적이 될 수도 있었다.
몸 안에 남아 있는 소량의 마력조차도 원귀나 악귀에게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으니까.
은석이 다가가자, 병원 입구에 세워 둔 병사 2명이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보고해.”
“오늘 인간에게 붙어 온 원귀들이 많았습니다. 모두 소멸시켰고 놈들을 잡는 사이 몰래 들어갔던 원귀는 병원 내에 있는 지박령이 잡아 둔 상태입니다.”
의료원에 들어서니 대기실에 세워 둔 지박령이 숨어든 원귀 하나를 꽉 붙잡고 있는 게 보였다.
은석이 옆을 지나가며 손을 뻗어 원귀의 머리를 터트려 버렸다.
진료 첫날이었지만, 대기실 안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지 선생님과 누나만으로 힘들겠는데…….’
은석은 조용히 진료실 안을 들여다보았다.
던전 안에서 화상을 입은 용병을 치료하고 있는 지태웅과 김은영이 보였다.
‘둘째 누나 맞아? 농담이나 하고 빈둥거릴 줄 알았는데 진짜 직장에서는 다르구나.’
은석은 조용히 병원을 빠져나와 길드 2층, 황희준의 사무실로 갔다.
“어! 형님? 빨리 오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