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염라대왕이 탁자 위로 팔을 휘젓자, 저승화를 우려낸 차가 나타났다.
“앉으십시오. 김은석 헌터님.”
두루마리 하나를 소매에서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먼저, 그동안 저승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보지요.”
펼친 두루마리에서 묘신귀가 증언한 내용과 그림이 나타났다.
“묘신귀가 조형민 차사와의 관계를 말한 건가요?”
“그렇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체포부 차사들이 악귀와 유착 관계라는 것도 알아냈습니다.”
묘신귀는 이승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인간보다 더 화려하게 살아온 악귀였다.
그렇게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이 다름 아닌 체포부 차사 덕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
“그 사실을 알고 이번 무저갱 균열 사냥에도 나타나지 않은 거군요.”
영혼을 완벽하게 귀속시킨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다.
“염라대왕님, 체포부를 관리하는 차사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걸 전혀 몰랐다고요?”
한숨을 내쉬는 염라대왕 대신 최 차사가 대답했다.
“아니, 없다. 차사들은 철저하게 개인적으로 움직이는 자들이다.”
체포부 차사들은 단독으로 움직이거나 악귀가 많을 때만 협업을 하는 정도였다. 그들 전체를 통제하는 이는 없었다.
“이해할 수가 없네요. 저승도 아니고 이승에서 머무는 차사들도 있는데 말입니다.”
“너도 알다시피 차사들이 이승에 오래 머물기 위해선 영혼이 잠시 빠져나간 인간의 육체가 필요하다. 그런 인간이 흔하지 않으니…….”
“원래부터 단독 행동을 했고, 숫자가 적으니 관리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 말씀이시죠?”
최 차사는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도 몰랐을 것이다. 그들이 이승에 오랜 시간 머물면서 누려 온 것들에 이리 집착할 줄은…….
저승과의 계약이 없다면 그들 역시 이승에서는 일반 망자와 다름이 없었다.
인간의 육체는 오직 이승에 오래 머무르기 위해 생명력을 취하는 것에 불과했다.
저승차사들도 어찌 되었든 망자.
이승에 머물러도 기억을 잃거나 악귀로 변하지 않는 장치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염라대왕과의 계약이었다.
“저처럼 말입니까?”
“그래. 계약의 증표가 저승차사의 명패와 저승을 드나들 수 있는 붓이다.”
“그럼 그걸 없애 버리면…….”
“바로 계약은 파기되는 거지.”
“그럼, 계약을 파기한 차사는 그 즉시 망자의 신분이 되는 것입니까?”
“그렇다.”
“그 말은 차사였다고 하더라도 기억을 잃거나 원귀가 될 수 있다는 건가요?”
최 차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승의 힘이 사라졌으니까 당연한 결과지. 아무리 인간의 생명력을 흡수한다고 해도 그건 막을 방법이 없다.”
은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들이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왜 명패를 없애고 위험한 선택을 하는 걸까요?”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믿는 구석이요?”
“염라대왕님이 아닌 저승의 다른 힘을 찾을 작정인 게지.”
염라대왕과의 계약으로 이승에 머물러도 망각의 굴레에서 자유로웠던 체포부 차사.
“원귀가 되지 않게 해 주는 무언가가 있는 건가요?”
“무언가가 아니라, 놈이다.”
최 차사와 은석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차를 마시던 염라대왕.
머금고 있던 마지막 한 모금을 꿀꺽 삼키고 입을 열었다.
“지옥귀왕입니다.”
“지옥……귀왕이요?”
“무저갱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악귀. 지옥을 통틀어 단 하나뿐인 흉악귀입니다.”
은석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말씀은, 이탈한 체포부 차사들이 지옥귀왕과 계약이라도 한다는 건가요?”
“그렇게 예상합니다.”
“지금 무저갱 깊은 곳에 있다면서요?”
지옥귀왕. 말 그대로 지옥귀들의 왕으로 악귀들의 정점에 서 있는 놈이었다.
“그를 이승으로 불러내기 위해 봉인을 깨고 있는 겁니다. 아마 차사들 중 누군가의 소행이겠지요.”
염라대왕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던전으로 인해 악귀의 수가 늘어나긴 했지만 무탈한 시절이었습니다. 무저갱이 열릴 수도 있다는 것을 예상 못 한 저의 불찰입니다.”
“아닙니다, 대왕님. 소신이 체포부 차사들을 제대로 관리 못 한 책임이 큽니다.”
서로 자신의 잘못이 크다는 염라대왕과 최 차사를 보며 은석이 물었다.
“지옥귀왕은 어떻게 이승으로 나오는 건가요?”
무저갱으로 통하는 구멍은 총 8개.
그중에 현재까지 3개의 봉인이 깨졌고 다시 막아 둔 상태였다.
막았다고는 하나, 이미 그곳을 통해 악귀가 빠져나왔으니 다시 쉽게 열릴 수 있었다.
“그럼 나머지 5개만 열리면 지옥귀왕이 이승으로 나오는 건가요?”
“그전에도 놈이 원하기만 하면 그곳을 빠져나올 것이다.”
“그건 무슨 말씀이시죠?”
“8개가 모두 열린다는 것은 이승에 지옥이 시작된다는 의미고, 지옥귀왕은 지금 자신을 담을 그릇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럼 빙의할 인간만 준비되면 무저갱에서 나올 수도 있다는 거군요.”
최 차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은석이 다시 물었다.
“최 차사님, 이번에 봉인을 확인해 보니 파괴하기가 굉장히 힘들어 보이던데 그건 어떻게 깨는 거죠?”
“무저갱의 봉인을 깨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그것은 저승과 연이 닿은 남자의 피와 생명이 배어든 무기였다.
“8개의 봉인에는 깨야 할 순서가 있다. 그리고 뒤로 갈수록 봉인의 힘이 강하기 때문에 더욱 강한 재료가 필요하지.”
“3개를 깬 자는 나머지 5개의 위치도 알고 있을 테니 이승이 지옥이 되는 건 시간문제겠군요.”
최 차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가능성이 더 높다.”
“그건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저갱은 절대 열리지 말아야 하는 곳이다. 아마 놈은 오랜 시간 위치와 봉인을 여는 방법을 찾았을 것이다. 하지만 뒤로 갈수록 정확한 위치를 찾기가 더욱 힘들지. 봉인을 깰 재료를 찾는 것 역시 쉽지 않고.”
“하지만 그것 역시 시간문제입니다.”
조용히 듣고 있던 염라대왕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김은석 헌터님을 내려오라고 한 것입니다.”
“균열을 만들고 다니는 차사를 찾으라는 거군요.”
“꼭 그 이유만은 아닙니다. 그리고 아마 그 차사는 김은석 헌터가 저승 헌터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겁니다. 앞으로 조심하셔야 합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김은석 헌터님은 악귀를 잡기 위해 저승과 계약을 했지만, 이승에서는 던전이라는 또 다른 해야 할 일이 있지요.”
“네, 그렇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악귀와 이승의 마력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고요.”
염라대왕이 다시 한번 더 탁자 위로 팔을 휘둘렀다. 순식간에 찻잔들이 사라지고 붉은 부채 하나가 나타났다.
“김은석 헌터님, 지금 레벨이 어떻게 되십니까?”
“정확한 건 시스템을 확인해 봐야겠지만, 98레벨입니다.”
염라대왕이 손뼉을 쳤다.
“대단하십니다. 그 짧은 시간에 98까지 올리시다니. 레벨이 높을수록 올리기가 힘들 텐데 말입니다.”
은석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그렇더군요. 높을수록 웬만한 던전이나 악귀를 베어도 레벨이 오르지 않더라고요.”
염라대왕이 탁자 위에 놓인 부채를 집어 들어 보였다.
“이 부채는 악귀 체포부 차사들을 통솔할 수 있는 지휘권과 같습니다.”
부채를 은석의 앞으로 내밀었다.
“전 이걸 김은석 헌터님께 드릴 겁니다.”
“네?”
눈을 동그랗게 뜬 은석을 보며 염라대왕이 씩 웃었다.
“그렇게 놀라실 필요는 없습니다. 지금 당장 이걸 사용하실 수는 없을 테니까요.”
무슨 말인지 이해 못 하겠다는 은석의 표정에 염라대왕이 개구쟁이처럼 웃었다.
“이 부채는 레벨 100이 되어야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김은석 헌터님은 조금 더 노력하셔야 한다는 겁니다.”
그의 말에 은석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 아쉽습니다. 잠시 좋다가 말았네요.”
은석의 과장된 몸짓에 염라대왕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을 보던 최 차사가 얕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체포부 차사들의 지휘권을 살아 있는 인간에게 준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아마 차사들의 반발이 심할 것이야.”
“물론 그렇겠지요. 그걸 잠재우기 위해서 제가 더 강해지면 되지 않겠습니까.”
자신감 넘치는 은석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염라대왕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자세 아주 좋습니다. 그렇다면 왜 지금, 사용도 못 하는 부채를 김은석 헌터님에게 드리는지 아십니까?”
은석은 염라대왕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은석이 저승을 나가는 즉시, 그가 체포부 차사들의 지휘권을 가졌다는 소문이 돌 것이다.
저승차사들의 자존심에 인간의 명령을 들으려는 자들이 얼마나 있을까.
은석의 지휘권에 대한 반발로 망자를 인도하는 심판부 차사가 되기를 선택하는 자가 있을 것이다.
물론 악귀를 잡기 위한 사명감으로 체포부 차사로 남는 자들도 있을 터.
두 가지 모두 싫은 자들이 선택할 수 있는 마지막은 계약을 파기한 후 일반 망자가 되어 환생을 기다리는 것.
그것도 아니라면, 망각의 굴레에 갇혀 새로운 힘을 줄 수 있는 지옥귀왕을 애타게 기다릴 수도 있었다.
도망친 조형민처럼.
“염라대왕님, 그러다 모두 계약을 파기하시면 어쩌시려고요?”
염라대왕이 웃으며 대답했다.
“다 포기하면 김은석 헌터님이 모두 베어 귀속령으로 만들어 버리십시오. 어떻게 보면 그게 더 관리하기 쉽지 않습니까?”
“허락해 주신다면야…….”
“대왕님, 오랫동안 악귀들을 잡느라 고생한 차사들입니다. 아무리 농담이라도…….”
최 차사가 정색을 하며 끼어들자, 염라대왕이 껄껄 웃었다.
“그냥 해 본 말일세. 내가 설마 그러라 하겠는가.”
염라대왕이 건네는 붉은 부채를 받아들었다.
“이건 지휘권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저승으로 내려오는 문을 열 수도 있습니다.”
그 말에 은석의 얼굴이 환해졌다.
“저승차사의 붓처럼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붉은 부채는 은석의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크기였다.
신기하게도 부채의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부채의 영혼만 들고 있는 느낌입니다.”
“작고 가볍지만, 그 위력은 대단하지요. 한번 펼쳐 보십시오.”
잘게 접혀 있는 부채를 펼치자, 날카로운 금속성의 소리가 들렸다.
‘나무로 만든 건 줄 알았는데.’
8개뿐인 부챗살은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살에 붙인 건 아무리 봐도 종이는 아닌 것 같은데 얼마나 얇게 만들었는지 종이보다 더 부드럽게 흔들리는군.’
부채를 살펴보던 은석이 물었다.
“부챗살 사이마다 다른 그림이 그려져 있군요.”
“팔열지옥을 이어 그린 겁니다. 그래서 그 부채의 이름이 ‘지옥선’이지요.”
부채에 그려진 팔열지옥의 풍광은 실제를 마주하는 듯 생생했고, 동시에 은석은 손안에서 낯선 힘이 느껴졌다.
“염라대왕님, 이건 단순히 지휘권을 상징하는 부채는 아니군요.”
“그렇습니다. 악귀를 잡을 때 유용하게 쓰이실 겁니다. 아! 물론 그걸 사용할 수 있는 레벨까지 올리셔야겠지요.”
“최대한 빨리 레벨 100이 되겠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집이나 저승 구멍을 통하지 않고 바로 저승으로 내려올 수 있어서 좋습니다.”
은석의 말에 최 차사가 덧붙였다.
“도망쳤거나, 인도할 차사들을 만나지 못한 망자들이 있다면 네가 그 지옥선으로 바로 저승 심판부로 보낼 수도 있다.”
“그것도 좋군요. 여러모로 잘 사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염라대왕님.”
은석이 염라대왕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더 많은 무저갱의 악귀가 나오기 전에 레벨을 달성하셔서 체포부 차사들의 수장이 되십시오.”
“알겠습니다. 노력하겠습니다.”
은석은 지옥선을 품 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은석 헌터님만 믿겠습니다. 저승은 현재 밀려드는 망자를 심판하기에도 벅찬 상황입니다.”
최 차사가 은석의 곁으로 다가왔다.
“지옥선을 가지고 있으면 네가 이승, 내가 저승에 있어도 대화를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할 이야기가 있으면 내려올 필요 없이 바로 연락하거라.”
“네, 알겠습니다. 최 차사님.”
은석은 그들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절대 지옥귀왕이 이승을 지옥으로 만들도록 놔두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