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악귀가 늘어나자, 놈들의 흉한 기운에 기력이 약한 노인들이 사망했다.
명부에 적힌 날짜보다 빨리 망자가 된 자들은 병원을 떠돌다 악귀에게 잡아먹히는 악순환으로 이어졌다.
병원으로 이끈 장본인, 윤혁의 병실 근처에도 늘 악귀들이 들끓었다.
하지만 악귀들은 끝내 윤혁의 병실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인간의 추악한 감정은 악귀에게 매혹적인 것이었지만, 윤혁의 분노는 악귀도 두려워할 지경이었다.
섣불리 다가갈 수 없는 엄청난 분노. 그렇기에 악귀 대부분은 윤혁의 병실 앞을 얼쩡거리다 다른 환자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윤혁의 병실.
그곳은 마치 동굴처럼 사방에 검은 이끼가 잔뜩 끼어 가고 있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볼 수 없는 그것은 ‘지옥 이끼’ 또는 ‘지옥 곰팡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이끼처럼 축축했지만, 생명력을 담은 초록이 아니라 검고 긴 촉수처럼 늘어진 모양.
병실 천장과 사방의 벽에 잔뜩 늘어져 있는 지옥 이끼에서 검은 연기가 물처럼 뚝뚝 떨어져 내렸다.
물론 침대에 묶여 있는 윤혁의 몸 위에도 끊임없이 떨어졌다.
물방울처럼 보이는 연기는 그대로 몸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 양이 늘어날수록 윤혁의 분노는 더욱 깊어졌다.
그곳에 머무는 그 누구도, 느끼지도 보지도 못하는 사이.
한적한 지방의 조용한 병원은 악귀의 집합소로 변해 가고 있었다.
* * *
한국 각성자 협회 최강호 회장을 만나기로 한 아침.
어김없이 안 실장으로부터 문자가 도착했다.
[김은석 헌터님, 오늘 오후 2시입니다. 하데스 길드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기자들이 올 수도 있다고 해도 비공식적인 약속이니 적당히 입고 가면 되겠지?’
준비를 마친 은석은 이현을 불러 바로 하데스 길드로 이동했다.
“어? 공사 시작하셨네.”
길드 사무실에 도착하니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밖으로 나가 보니 의료원과 연구실의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안 실장에게서 공사 이야기를 듣지 못한 터라, 은석은 곧장 2층으로 올라갔다.
“일찍 오셨네요, 헌터님.”
그는 공사 현장으로 나가려는지 안전모를 쓰고 있었다.
“의료원 공사 시작하셨네요.”
“네, 지 선생님을 만나신 날부터 시작했습니다.”
의료원 공사에 대한 준비는 예전에 마쳤다는 안 실장의 말이 떠올랐다.
“역시 빠른 일 처리, 대단하십니다. 안 실장님.”
안 실장이 뿌듯한 미소를 살짝 지었다.
“김은석 헌터님 이야기를 듣고 지 선생님과 따로 연락을 했습니다.”
“그러셨군요.”
“살고 계신 집에서 곧 나와야 한다고 하셔서 예정보다 더 빨리 시작했습니다.”
은석은 안 실장과 공사 현장을 둘러본 후, 출발 전까지 여유롭게 길드 주변 산책로를 걸었다.
“저는 최강호 회장님을 만나는 것이 처음입니다.”
안 실장이 운전해 각성자 협회로 출발했다.
그의 목소리가 긴장한 듯 들렸다.
“제가 최초의 S급 헌터를 다 만나다니……. 어떤 분이십니까? 일상에서도 포스가 느껴지나요?”
“좋은 분입니다. 만나 보시면 듣던 것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렇군요. 아! 그리고 오늘은 최강호 회장님 말고 이현철 비서실장님도 참석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래요?”
“네, 그래서 좀 걱정이 됩니다.”
“그분이 오시는 게 걱정된다고요?”
잠시 정차 중일 때 안 실장이 은석을 쳐다봤다.
“헌터님도 들어보셨죠? 협회 외부는 최강호, 내부는 이현철이라고.”
“네, 협회 설립 때부터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하던데요.”
“맞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협회가 이 실장의 것이나 다름없다고 합니다. 일단은 뭐, 소문으로는 그렇습니다.”
“대단한 사람인가 보죠? 저도 아직 그분을 만난 적은 없습니다.”
“소문은 그렇습니다. 다들 쉬쉬하는데 정확한 건 당사자들만 알겠죠. 다만…….”
자동차 안에는 둘 뿐이었지만 누가 엿듣는 듯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능구렁이 같으면서도 독사 같은, 굉장히 무서운 사람이라고 합니다.”
“흠, 능구렁이에 독사라. 어떤 이미지인지 금방 떠오르지 않는군요.”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각성자 협회에서 조금 떨어진 주차장에 도착했다.
“준비해 온 건 어디 있나요?”
“제가 뒷좌석에 놔뒀습니다.”
안 실장이 넣어 둔 선물 가방을 꺼내고 차 문을 닫았다.
그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김은석 헌터님, 저기 기자들이 있네요. 아! 이야기하고 있는 저 사람이 이현철 비서실장입니다.”
협회 입구에 여러 명의 사람이 서 있는 게 보였다. 그중에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중년의 남자가 있었는데, 그가 안 실장이 말하는 이현철이었다.
그를 쳐다보는 은석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저 새끼…… 뭐야?’
이현철에게서 엄청난 양의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와 주변을 휘감고 있었다.
은석은 꼼짝도 하지 않고 그를 노려봤다.
‘저 사람이 각성자 협회의 실세인 이현철 비서실장이라고? 말도 안 되는…….’
은석은 정보탐색으로 본 메시지에 경악했다.
[최상급 악귀, 탐욕귀]
이현철에게 빙의한 것을 넘어서, 악귀 그 자체였다.
그것도 은석이 처음 만나는 최상급 악귀.
‘이현철에 대한 정보는 아예 나오지도 않는군.’
은석은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엄청난 악귀의 기운을 풍기고 있는데 어째서 유준한 차사는 아무 행동을 취하지 않는 거지?’
의문은 금세 해결되었다.
이현철이 서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입구에서 뛰어나오는 유준한 차사가 보였다.
정확히는 유준한이 빙의한 협회 보안 직원.
유준한이 헐레벌떡 뛰어나오자, 이현철 주변의 검은 연기가 몸 안으로 흡수되어 감쪽같이 사라졌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은석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허! 저놈 봐라? 보안 직원이 체포부 차사라는 걸 알고 있구나. 지금 가지고 노는 거야?’
유준한은 갑자기 사라진 악귀의 기운에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최상급 악귀라……. 쉽게 봐서는 안 되겠는데.’
멀리서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은석은 본능적으로 놈이 지금까지의 악귀와 전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것 같았다.
‘그럼, 최강호 회장이 저런 상태가 된 것도, 저 악귀 놈의 짓일 가능성이 높겠군. 그런데 왜?’
안 실장이 양손 가득 준비한 선물을 들고 다가왔다.
“헌터님, 가시죠?”
기자들과 이야기를 마친 이현철이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 실장님, 혹시 향수 있으십니까?”
“네? 향수요? 갑자기 향수는 왜…….”
“아, 길드에서 산책을 좀 했더니 땀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요. 높으신 분들 뵙는데 땀 냄새보다는 향수 향이 좋지 않을까 해서요.”
안 실장이 은석을 향해 고개를 내밀며 킁킁 냄새를 맡았다.
“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요? 일단 뭐,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안 실장은 차로 돌아가 비상용으로 넣어 둔 작은 향수를 꺼내 왔다.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이거 향이 좋기는 하지만 굉장히 독합니다. 아주 살짝만 뿌리십시오.”
“감사합니다.”
향수를 받아 든 은석은 안 실장의 당부와 달리 거의 분무하다시피 뿌려댔다.
“푸푸, 헌터님? 제 말을 못 들으신 겁니까? 이거 독한 향수라니까요. 어우, 냄새.”
안 실장이 콧등을 찡그리며 손을 들어 마구 흔들어 댔다. 은석 역시 독한 향기에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상대는 은석도 처음 만나는 최상급 악귀였다. 만에 하나 이현철이 귀속령들의 기운을 느낄까 봐 임시방편으로 선택한 것이 독한 향수.
하지만 이것도 저승 훈련장에 머물고 있는 귀속령의 기운을 느낄 만큼 능력이 있다면 소용없는 짓일 수도 있었다.
‘어느 정도의 능력이 있는 놈인지 알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대비하는 게 좋겠지.’
독한 향이 집중을 방해할 수 있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잘 썼습니다. 안 실장님.”
그는 은석이 건네는 향수를 받지 않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게 많이 뿌리시는 걸 보니 그 향이 마음에 드셨나 봅니다. 헌터님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은석이 멋쩍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저도 비상용으로 들고 다니는 거라 거의 사용하지 않는 향수입니다. 쓰십시오. 새 거나 다름없습니다.”
코를 잔뜩 찡그리고 있는 안 실장을 보며 은석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다른 향수를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안 실장이 앞서 걸었다.
“그럼 이제 협회로 가실까요? 저기 앞에 기자들 보이시죠?”
“네, 안 실장님과 친분이 있으신 분들인가요?”
“맞습니다. 들어가는 장면 사진만 찍어서 기사로 쓰라고 했으니 헌터님을 귀찮게 하지 않을 겁니다.”
은석과 안 실장이 협회 입구에 도착하니, 기자들이 아닌 보안 직원이 다가왔다.
유준한 차사가 은석을 알아본 것이었다. 그가 말을 걸려고 하자 은석이 먼저 가볍게 목례를 했다.
“수고하십니다. 최강호 회장님과 약속이 있어서 왔습니다. 이쪽은 하데스 길드의 안공진 실장님이십니다.”
옆에 서 있던 안 실장 역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는 척하지 말라는 은석의 의도를 알아차렸는지,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유준한 차사는 별다른 말 없이 옆으로 비켜섰다.
은석과 안 실장은 지난번에 최강호 회장과 이야기를 나눴던 작은 사무실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최강호 회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하데스 길드의 안공진이라고 합니다.”
잔뜩 경직된 안 실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90도로 허리를 굽혔다. 그의 옆에 서 있던 은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오! 김은석 헌터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요즘 활약이 엄청나던데요? 기사 잘 읽고 있습니다.”
호탕하게 웃는 최강호 회장의 뒤로 이현철 비서실장이 따라 들어오고 있었다.
‘밖에서 보지 못했다면 나도 감쪽같이 속았겠는데?’
악귀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아무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현철, D급 헌터, 마법사]
정보탐색에서도 인간 이현철에 대한 간단한 정보만 나타났다. 은석은 저도 모르게 짧은 탄성을 흘렸다.
‘정말 완벽하게 감췄군. 그래서 같은 건물에 머무는 유준한 차사도 존재만 알지, 찾지 못하는 거였어.’
최강호 회장이 이현철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이쪽은 저번에 바빠서 참석하지 못한 이현철 비서실장입니다.”
멀리서 봤던 것보다 더 말랐고 키가 더 컸다. 악귀라는 걸 몰랐다면 적당히 깐깐하고 젠틀해 보이는 인상의 중년 남자였다.
‘능구렁이에 독사라는 표현이 잘 어울리는데.’
이현철이 웃으며 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정말 만나고 싶었습니다. 김은석 헌터님.”
그가 내민 손을 내려다보며 은석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네놈의 과거를 알아서 보여 준다니, 고맙군.’
은석은 그의 손을 잡으며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김은석입니다.”
동시에 외쳤다.
‘정보탐색.’
현재 악귀는 자신의 기운을 완전히 감춘 상태였다. 배종근의 영혼을 삼킨 단지귀와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상황.
은석도 무엇을 마주하게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이현철의 과거일 수도, 악귀의 과거일 수도 있었다.
‘이왕이면 둘 다 나왔으면 좋겠는데.’
순간, 은석의 눈앞이 깜깜해졌고 완전 다른 세상이 펼쳐졌다.
* * *
‘여긴, 어디지?’
사람들의 복장을 보니 고려 시대인 것 같았다.
넓은 광장에 관료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피투성이가 된 채 묶여 있었다.
사람들이 그를 향해 돌을 던지며 악다구니를 썼다. 하지만 그는 돌에 맞는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악담을 퍼부었다.
“버러지 같은 것들! 누구 덕분에 먹고 살았는지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거지새끼들. 영원히 비루하게 빌어먹고 살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