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만약에 겸의 이야기를 먼저 듣지 않았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을 것이다.
“역시 전설의 대장장이는 다른데.”
발칸은 보기만 했을 뿐인데도, 아이가 죽은 쇳물로 담금질한 검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아주 맑고 고귀한 영이 이 검을 지켜 주고 있구나. 혹시 검을 수호하는 자는 만나 봤느냐?”
은석이 싱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당연히 만나 봤지. 수호령이 검을 직접 줬거든.”
발칸의 얼굴에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오, 그래? 그럼 나도 만나 볼 수 있느냐? 어떤 자인지 궁금하다.”
겸이 떠나지 않았으니 만날 수는 있지만 은석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은석과 귀속의 계약을 맺은 것이 아니니 정신 감응을 사용할 수도, 소환할 수도 없었다.
“그게, 부를 방법이…….”
“어! 대장! 저기.”
은석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이었다. 어느새 작업실에 나타난 겸은 발칸의 조수들을 툭툭 건드리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모두 깜짝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뭐야?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응? 네가 왔으면 하고 생각했던 거 아니야? 그래서 온 건데.”
“아니, 그건 맞지만……. 너 혹시 내 생각을 읽는 거냐?”
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읽는 게 아니라 느끼는 거야. 검을 뽑을 때 네 힘을 넣었잖아. 그때부터 느낄 수 있었는데?”
“그럼 왜 난 느낄 수 없는 거야?”
은석은 뭔가 손해 본다는 느낌이 들어 겸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지만, 이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참나, 애를 상대로 유치하게 뭐 하냐.’
그사이, 발칸이 그의 조수들과 놀고 있는 겸의 곁으로 다가갔다.
“역시 명검의 수호자답게 흘러나오는 기운이 남다르구나.”
뛰어난 검을 볼 수 있어서 감격한 발칸이 은석에게 다시 적룡검을 건넸다.
“최고의 검이 생겼으니 귀검은 녹여서 다른 걸 만들어 주겠다.”
“녹인다고?”
“그래, 버리기엔 이것 또한 뛰어난 검이니 네게 도움이 될 만한 것을 만들어 주지.”
은석은 씨익 웃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전에 우리 팀원들 무기를 만들어 준다고 했잖아. 그건 끝났어?”
그의 질문에 조금 전까지 얼굴 가득했던 환희가 사라지고 예전처럼 불만 가득한 눈빛이 나타났다.
불평하듯 중얼거리면서 용광로가 있는 지하로 내려가는 발칸.
“대장, 저희가 괜히 온 게 아닐까요? 갑자기 저렇게 화를 내시는 걸 보면…….”
해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무기 가지러 내려간 거야. 불평불만은 저 양반 스타일이니까 신경 쓸 필요 없어.”
은석의 말대로 잠시 후 발칸과 그의 조수들이 무기를 들고 올라오는 게 보였다.
여전히 투덜거렸지만, 말과 달리 무기들을 아주 조심스럽게 작업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 모습에 해머도 은석의 말을 이해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오! 전부 다 새롭게 만든 거야? 대단한데. 역시 무기관리팀 팀장 하나는 제대로 구했단 말이지.”
은석이 탄성을 뱉으며 엄지를 척 들어 보이자, 발칸은 쑥스러운 듯 헛기침만 해 댔다.
발칸은 가장 먼저 딱 봐도 해머의 것처럼 보이는 무기를 집어 들었다.
“내가 너희 세계의 무기는 만들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그 누구냐. 시커먼 옷 입고 다니는 그놈.”
“최 차사님?”
“그래, 그놈한테도 묻고, 오래전에 죽었는데 아직 환생 못 한 대장장이들이 있다길래 그놈들도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지.”
은석을 비롯한 팀원들의 눈이 점점 커져 갔다. 만들어 준다고 했어도 이 정도까지 열과 성의를 다할 줄은 몰랐다.
작업실 벽에는 꽤 많은 무기가 걸려 있었기 때문에 은석은 그중에서 몇 개를 줄 거라 생각했었다.
그들이 놀란 모습에 발칸은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아무 무기나 던져 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지?”
“어, 그랬어.”
“무기는 각자에게 맞는 것이 있다. 내가 만든 무기가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그건 우리 세계의 놈들에게나 좋은 거지. 네놈들에게는 길게 늘여 놓은 쇳덩어리와 별반 차이가 없다.”
어느새 팀원들은 작업대 근처로 다가와 자신의 무기를 찾고 있었다. 흥분한 듯한 그들의 모습에 은석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앉아서 이야기하자. 이렇게 넓은 작업대 놔두고 왜 다들 서서 그러고 있어. 그리고 우리도 보덴이 그렇게 맛있다는 드워프의 맥주 좀 줘 봐.”
“대장. 맥, 맥주 말인가요?”
“그래, 보덴이 최고의 맥주라고 하던데. 무기 이야기는 맥주 한 잔씩 하면서 듣자고. 어때?”
은석의 말에 모두 작업대 의자에 빠르게 앉았다. 눈을 반짝이는 성하를 보며 물었다.
“너, 맥주 맛은 알아? 20살이라면서?”
성하는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네, 대장. 당연히 알죠. 언제부터 마셨냐 하면…….”
“아, 그만. 알고 싶지 않다. 맛을 아니까 마시면 되겠네.”
발칸은 성스러운 무기 앞에서 무슨 맥주냐며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이내 그의 조수들이 잔이 넘치도록 맥주를 담아 왔다.
“자, 그럼 이제 우리의 위대한 무기관리 팀장님이 팀 고스트를 위해 만든 무기를 만날 시간인가?”
성하가 건배를 하자며 잔을 높게 들었다.
드워프의 맥주는 기대 이상이었고, 발칸이 만든 무기는 볼수록 놀라웠다.
모두 맥주를 마시는 것도 잊은 채, 무기를 설명하는 발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해머, 이건 네놈에게 잘 어울리는 것으로, 여기 놈들은 ‘철장’이라고 부른다더군.”
전체가 하나의 둥글고 긴 쇠로 만든 철장은 양쪽에 둥근 쇳덩어리를 말아 붙여 놓았다.
크고 강력해 보이는 철장은 망치를 사용했던 해머에게 잘 어울렸다.
“악귀 놈이 맞아서 죽은 무기가 철장이라고 하더군.”
“악귀가 맞아서 죽은 무기? 그걸 누구한테 들은 거야?”
“최 차사가 그러더군. 그 악귀 놈이 이승에서 설치고 다닐 때 인간이 휘두른 철장에 맞아 한 방에 죽었다고.”
“인간이 아니라 귀신이었을 때?”
“그렇다니까. 그래서 악귀를 잡는 너희에게 잘 어울리는 무기라고 생각했지. 어떠냐, 마음에 드느냐?”
철장을 받아 든 해머의 입이 기쁨에 겨워 씰룩거렸다.
예전 망치도 타격감은 좋았지만 둔탁한 모양 때문에 속도를 내며 휘두르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철장은 양쪽에 붙어 있는 쇳덩이를 제외한 부분은 날렵해 잡고 움직이기에 편해 보였다.
“발칸 님, 손안에 착 감기는 느낌이 듭니다.”
새로운 무기에 신난 해머에게 발칸은 하나를 더 내밀었다.
“너희 대장처럼 칠칠치 못하게 검을 부러뜨릴 수도 있으니…….”
슬그머니 해머에게 건네는 것은 철퇴였다.
“허리에 차고 다녀라. 보기와 다르게 가벼울 것이다.”
2개의 무기를 받은 해머가 발칸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멋진 무기는 처음입니다.”
“당연하지. 최고의 대장장이가 여기 있는데 그런 무기를 가져 봤을 리가 있나.”
한껏 턱을 치켜드는 발칸을 보며 은석이 재촉했다.
“알았으니까 빨리 다른 무기도 줘. 다들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잖아.”
창왕을 위해 만든 것은 그에게 잘 어울리는 삼지창이었다. 하지만 다른 것처럼 한쪽에만 달린 삼지창이 아니라, 반대편에 날카로운 검이 달려 있었다.
“바닥으로 내리면 검은 안으로 자동으로 들어가지.”
발칸이 창을 들어 바닥으로 내려치자, 뾰족한 검이 봉 안으로 빠르게 들어갔다.
“그리고 검을 다시 빼고 싶으면 이렇게 잡고 탁 흔들면 된다.”
전체가 금빛으로 번쩍이는 창은 보기만 해도 상서로운 기운이 느껴졌다.
승형과 그의 부대원들에게는 북두칠성이 새겨진 칠성검을 하나씩 건네주었다.
군인이었던 그들은 모두 무기에 대해 일가견이 있었다. 들어 보기만 했던 명검인 칠성검을 받아들자, 감격에 어쩔 줄 몰라 했다.
“대장, 칠성검을 저희가 받아도 될까요?”
“검에 그냥 북두칠성 모양으로 새겨 넣은 거야. 뭘 그렇게까지 대단한 것처럼 정색하고 그래.”
은석의 말에 발칸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냥 새겨 넣다니! 신령한 검을 보고도 알지 못하는 동태 눈깔 같으니라고. 이건 모든 액을 막고 악귀들을 처단하는 검이다.”
“오, 발칸. 공부 열심히 했나 봐. 나보다 더 잘 알고 있네.”
자신을 놀리는 은석의 너스레에 발칸의 붉은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의 말에 승형과 부대원들이 더욱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이건 네가 대장 노릇을 하니까 하나 더 주는 것이다. 받아라. 단검이다.”
단검을 받아 든 승형은 감격이라도 한 듯 손에 꼭 쥔 채 머리를 끄덕였다.
성하는 이미 발칸에게서 무기를 받았기에, 팀원들이 새로운 무기를 받을 때마다 손뼉 치며 분위기를 띄웠다.
다들 신나게 자신의 무기를 살필 때, 마법사인 이현은 자리에 앉아 싱긋 미소만 짓고 있었다.
“어? 아직 하나 남았네. 이건 내 거야?”
은석이 손을 뻗어 작업대 위의 무기를 잡으려고 하자, 발칸이 자기 앞으로 빠르게 잡아당겼다.
“네놈 것이 아니라 저 마법사의 것이다.”
깜짝 놀란 이현은 발칸과 은석을 번갈아 보고 있기만 했다.
이미 자신에게는 지팡이가 있는데 따로 무기를 만들다니.
“넌 싸우는 자가 아니니 이건 호신용이라고 생각해라. 아주 가벼운 채찍이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현을 본 발칸은 채찍을 들고 작업실의 빈 공간으로 걸어갔다.
한쪽에 쌓여 있는 장작더미를 향해 채찍을 내려쳤다. 그러자, 장작들이 서로 이리저리 붙더니 인간의 형태를 갖췄다.
장작이 변하는 모습에 모두 입을 쩍 벌렸다.
“싸우고 있는 장소에 있는 나무든, 돌이든 상관없다. 이걸 후려치면 이런 놈들이 만들어져 널 보호해 줄 것이다.”
이현은 전투 중에 종종 위험했던 적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팀원들의 도움을 받는 게 늘 미안했었다.
전투계 헌터가 아닌 그에게 꼭 필요했던 무기였다.
“감사합니다, 발칸 님. 저랑 같이 전투를 해 보신 분 같습니다.”
이현의 진심 어린 인사에 발칸은 픽 웃음을 내뱉었다.
“무기는 단순하게 쇠만 두드려서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을 잘 살펴보아야 하지. 어떤 무기가 최적의 것인지 알기 위해서 말이다.”
은석은 작업대에 턱을 괸 채로 발칸과 팀원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보덴이 그의 팔을 툭툭 쳤다.
“대장님, 발칸에게 감동하신 겁니까?”
“아니, 내가 인재를 아주 잘 뽑아서 나에게 감탄하고 있는 중이야. 역시 난 대단한 리더인 것 같아서.”
은석의 농담에 보덴은 머리를 흔들며 다시 맥주를 마셨다.
“무기 수여식도 끝났고 맥주도 다 마셨으니 이제 돌아갈까?”
자리에서 일어서는 은석을 보며 발칸은 귀검을 집어 들었다.
“이건 말했던 대로 새로운 무기로 다시 만들어 주겠다.”
“나야, 그래 주면 아주 고맙지.”
그때, 겸이 다가와 은석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난 먼저 가서 육포 먹을 거야.”
겸을 내려다보던 은석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겸, 너 왜 자꾸 나한테 반말하는 거야? 내가 검의 주인이라며? 그리고 누가 봐도 넌 꼬마고 난 25살인데. 동방예의지국 조선에서 살다 왔으니 이제부터 예의 바르게 존댓말 하는 게 어때?”
겸은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난 아주 오래전에 태어났어. 그렇게 따지면 네가 날 극진히 모셔야 하는 거 아니야? 꼬박꼬박 반말하는 걸 참고 있는 건 난데……. 안 보여? 이 주름?”
살짝 찡그린 자신의 미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완전히 적응한 듯 처음과 달리 점점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흥.”
콧방귀를 한 번 흘리고는 그대로 사라져 버린 겸. 해머가 위로하듯 은석의 어깨를 툭툭 쳤다.
“해머, 내가 너한테 처음부터 반말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냐?”
은석의 물음에 해머는 대답 대신 싱긋이 웃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