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은석은 컴컴한 던전 안쪽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암안 스킬을 사용하였음에도 꽤 깊은 모양인지 안쪽까지는 잘 보이지 않았다.
‘엄청난 귀(鬼)기군.’
던전 안에서 흘러나오는 흉측한 기운은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큼 지독했다.
은석은 고개를 돌려 헌터들을 바라봤다.
정신없이 마정석을 캐고 있는 한국과 일본 헌터들을 보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에 여기 있는 30명 전부가 빙의된다면…….’
은석은 지금까지 빙의된 헌터를 최대한 살리려고 애써 왔다. 하지만 30명은 적지 않은 숫자였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발끝으로 땅을 툭툭 쳤다.
‘다들 어두워 볼 수 없겠지만, 바닥에 스며든 피의 양이 엄청나다. 아마 이전 헌터들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체까지 모조리 먹어치운 거겠지.’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만큼 더 강해졌을 테고.’
던전 가장 깊은 곳, 인간들은 알아차릴 수 없는 악귀들이 그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은석은 먼저 놈들을 공격해야 할지, 아니면 이곳에서 기다릴지 고민 중이었다.
‘빙의되기 전에 한 놈이라도 소멸시키는 게 좋겠지.’
결정을 내린 은석은 어둠 속으로 한 발씩 내디뎠다.
들어갈수록 강해지는 귀기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옆에서 따라오던 이현도 똑같이 느끼고 있는지, 어금니를 빠득 깨물었다.
‘대장, 마치 눈앞에서 맹수를 마주하는 것 같은 압박감입니다. 얼마나 지독한 놈들이기에 이런 귀기를 뿜어 대는 건지…….’
은석 역시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기운이었다.
수많은 악귀를 베었지만 대부분 하급 악귀나 원귀에 불과했다. 그중에 가장 높은 것이 중급 악귀인 팔귀.
경험하지 못한 기운에 어느새 목덜미에서 식은땀 한줄기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멈춰!’
은석의 말과 동시에 그들 앞에 시뻘건 빛을 번뜩이는 수많은 눈동자가 나타났다.
‘엄청난 숫자입니다, 대장…….’
던전 가장 깊은 그곳에는 헤아릴 수도 없는 많은 수의 악귀들이 바글바글 모여 있었다.
마치 그 자체가 거대한 악귀의 형상인 듯 꿈틀거리는 커다란 덩어리.
은석과 이현을 향해 시커먼 이빨을 드러내며 괴이하고 낮은 괴음을 흘렸다.
‘조심해라, 이현.’
은석은 아공간에서 귀검을 꺼내 푸른 화염을 입혔다.
화르륵-
빛이라고는 없는 깜깜한 던전 안에 푸른 조명이 켜진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난 빛에 괴로운 듯 내지르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온다!’
아귀처럼 커다란 입을 쩍 벌린 악귀 하나가 은석을 향해 달려들었다.
촤앗-
은석은 머리를 물어뜯기 위해 날아오는 놈의 입을 반으로 그어 내렸다.
단 한 번에 악귀 하나가 사라지는 것을 본 놈들이 놀라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은석은 기선 제압을 하기 위해 화염을 더욱 크게 일으켰다.
놈들을 향해 이글거리는 귀검을 내밀며 휙휙 휘둘렀다.
“놀랐겠지. 인간이 네놈들을 죽일 수 있다고는 생각 못 했을 테니까.”
불타오르는 귀검에 위협감을 느낀 악귀들이 감히 먼저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악귀들을 밀치며 걸어 나오는 한 놈이 보였다.
‘저놈이 우두머리군.’
다른 놈들과 비교해 유난히 큰 덩치에 온몸이 검붉었다. 이마 양쪽에 각각 두 개씩의 긴 뿔이 솟아나 있었다.
‘정보탐색.’
[오니 텐슈, 상급 악귀, 살인 및 인육 섭취로 퇴마사에 의해 봉인]
던전에서 탈출한 헌터가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오니였다.
그의 말처럼 은석을 향해 걸어오는 놈은 일본의 대표적인 악귀인 오니의 한 종류였다.
‘퇴마사……?’
은석은 다시 한번 더 메시지를 확인했다.
흉흉한 귀기를 뿜어내는 놈들은 수백 년 전 일본 퇴마사에 의해 봉인된 악귀였다.
‘그런데 어떻게 봉인에서 풀려난 거지?’
던전 마력이 나타나면서 이승과 저승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었다.
그 영향으로 지옥을 탈출하는 악귀들이 점점 많아졌다. 하지만 인간에 의해 갇혀 있던 악귀들은 처음이었다.
‘혹시 처음에 들어온 헌터들이 봉인을 푼 걸까?’
지금 은석이 추측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었다.
다가오는 텐슈를 보며 생각에 잠긴 은석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텐슈는 그런 은석의 모습이 자신을 향한 두려움이라고 착각했다.
만족스러운 듯 길고 뾰족한 손톱을 내밀며 꺼끌꺼끌한 웃음을 내뱉었다.
“너는 다른 인간과 달리 우리를 볼 수 있구나. 퇴마사인가? 지금까지 본 인간들 중에 가장 맛있는 냄새가 나는군. 당장이라도 갈기갈기 찢어 씹어 먹고 싶구나.”
오니의 입에서 은석과 이현은 전혀 알 수 없는 일본어가 흘러나왔다.
놈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이야기하는 내내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기까지 했다.
“하. 뭔 소리야. 알아들을 수 있어야 욕이라도 하지.”
정보탐색 스킬을 사용해 텐슈의 생각을 읽었지만, 그것이 지금 놈이 내뱉는 말과 같은지는 알 수 없었다.
일본어를 모르는 은석은 특별히 반응하지 않고 놈의 생각만 읽으며 가만히 서 있었다.
“인간 놈! 지금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다니!!”
은석의 반응이 없자, 분노한 텐슈가 괴성을 내질렀다.
은석이 이현을 보며 물었다.
“저 새끼, 지금 욕하는 거겠지?”
“음. 분위기로 봐서는 저희가 대답을 하지 않아 화가 난 것 같습니다.”
텐슈가 바닥을 향해 침을 퉤 뱉으며 더욱 흉흉한 귀기를 뿜어냈다.
퇴마사에 의해 봉인될 만한 상급 악귀의 기운이었다.
“제 발로 잡아먹히기 위해 찾아왔으니 네놈 소원대로 갈기갈기 찢어 먹어 주마.”
다른 악귀의 손에 들린 영혼 하나를 휙 낚아챘다. 보란 듯 혼령 하나를 입 안에 넣고 우걱우걱 씹어 삼켰다.
“날 저렇게 먹겠다는 거군. 나와라.”
던전 입구 쪽은 넓었지만, 안으로 들어갈수록 좁아지는 구조였다.
협소한 장소 때문에 우선 승형과 그의 병사들을 먼저 소환했다.
갑자기 나타난 많은 귀속령의 모습에 악귀들이 괴성을 내질렀다. 텐슈의 명령만 떨어지면 당장에라도 달려와 찢을 기세였다.
악귀들을 본 승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대장, 저놈들은 왜구가 아닙니까?”
승형과 병사들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침략자들을 모조리 죽이기 위해 스스로 귀속령이 되기를 원했다. 살아 있을 때 싸웠던 왜군의 혼령은 아니었지만, 일본의 악귀니 그들에게 딱 맞는 싸움 상대였다.
평소보다 더욱 번뜩이는 눈빛으로 악귀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그래, 네가 그렇게 죽이고 싶어 하던 놈들이다. 마음껏 죽여 봐.”
은석의 명령에 그 어느 때보다 의욕이 넘치는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던전 가장 깊은 곳에서 인간들은 모르는 악귀와 귀속령들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잠시 싸우는 것을 지켜본 은석은 해머와 창왕, 성하까지 불러냈다.
성하는 처음 보는 일본 악귀의 모습이 신기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쳐다봤다.
“와, 씨! 완전 재미있겠는데요. 이거 진짜 게임 같잖아.”
성하는 드워프 발칸이 준 무기를 손가락에 끼우며 곧 싸울 생각에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일단 싸우는 건 승형이 알아서 할 거고. 너희들은 저쪽에서 빠져나가는 놈들을 죽여.”
은석의 명령에 성하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아……. 저기 들어가서 싸우고 싶은데.”
그 모습에 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알겠습니다. 대장.”
창왕이 긴 창을 휘두르며 뒤로 천천히 물러났다. 입을 삐쭉거리던 성하도 어느새 창왕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은석의 레벨이 올라가면서 귀속령의 실력 또한 성장했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봉인되었던 상급 악귀들 역시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으악!”
승형의 병사 하나가 악귀가 휘두른 손톱에 당해 소멸되었다가 이내 다시 나타났다.
은석이 죽지 않는 이상 그들이 완전히 소멸될 일은 없었다.
‘저렇게 없어졌다가 나타나는 사이에 여길 빠져나갈 수 있겠는데.’
은석의 염려대로 그 틈을 이용해 악귀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저기! 막아!”
“넵!”
창왕의 지시에 성하가 빠르게 달려가 악귀의 안면에 주먹을 날렸다.
터지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검은 연기로 변해 흩어 없어지는 악귀.
나머지 팀원들도 끊임없이 소멸시키고 있었지만, 여전히 악귀들은 많았다.
‘그록을 불러내기에는 너무 좁고.’
거침없이 무기를 휘두르는 오크 그록 때문에 같은 팀원들까지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한 놈이라도 빠져나가 빙의가 되면 그때부터는 진짜 지옥이다.’
은석은 귀검을 휘둘러 빠져나온 악귀 하나를 베었다.
그때,
‘조심해!!’
누군가의 외침에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그의 뒤에서 목을 길게 늘인 악귀 하나가 이빨을 드러내며 다가오고 있었다.
스릉-
귀검을 휘둘러 긴 목의 중간을 단번에 잘라 냈다.
주변을 살펴봤지만, 말을 한 자를 찾을 수가 없었다.
“꼬마 목소리 같았는데…….”
“대장님!”
그 순간, 병사 몇 명이 큰 소리를 지르며 사라졌다. 동시에 오니 텐슈와 악귀 몇 놈이 귀속령 사이를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젠장!”
은석은 놈의 뒤를 따라 질주했다. 텐슈가 향하는 곳은 빙의할 인간들이 잔뜩 모여 있는 입구 쪽이었다.
* * *
“어. 갑자기 웬 바람이 불지?”
마정석을 캐던 일본 헌터가 던전 안쪽을 바라봤다.
“컥! 커걱.”
그의 옆에 서 있던 동료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내며 온몸을 비정상적으로 비틀었다.
“이봐. 왜 그래? 어디 아파?”
대답 대신 그에게 날아든 것은 동료가 들고 있던 단도였다. 가슴을 향해 날아오던 단도를 가까스로 피한 헌터가 소리쳤다.
“미쳤어? 왜 이래!?”
그때, 던전 곳곳에서 마성석을 캐고 있던 헌터들이 이상한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정석 던전의 평화로운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은석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빙의된 헌터들이 동료를 공격하고 있었다.
갑자기 이상하게 변해 공격하는 동료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라 막기에만 급급했다.
그들을 향해 은석이 소리쳤다.
“기생형 몬스터입니다. 잡아서 묶어 두십시오!!”
불산 길드 헌터들이 일본 쪽에 은석의 말을 전달했다.
그들도 듣기만 했을 뿐, 기생형 몬스터를 보는 것이 처음이었기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변한 이유를 알았으니 더는 머뭇거릴 필요가 없었다.
아직 빙의한 헌터의 숫자가 적었기 때문에 하나둘씩 제압하기 시작했다.
승형과 병사들을 제외한 나머지 팀원들이 곧이어 도착했다.
“금방 빙의한 놈들이다. 쉽게 뽑아낼 수 있을 거다. 알지? 최대한 헌터들을 살려야 해. 만약에, 늦었다 싶으면……. 죽여라.”
은석의 명령이 끝나자마자, 팀 고스트가 빙의된 헌터들을 향해 달려갔다.
“저, 저건 또 뭐야?”
그들과 전혀 다른 분위기의 강화복에 얼굴 전체를 가리는 마스크까지 착용한 귀속령의 모습에 일본 헌터들이 소리쳤다.
불산 길드는 은석이 네크로맨서라는 히든클래스를 가진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 헌터들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었으니 갑자기 등장한 낯선 존재에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창왕이 빙의된 헌터의 뒷목을 잡아 누르면서 말했다.
“내가 뽑아낼 테니까 넌 바로 소멸시켜.”
헌터의 등 안으로 손을 넣었다가 빼자 악다구니를 쓰는 악귀가 잡혀 나왔다.
이상하게 변한 동료보다 그의 몸 안으로 손을 집어넣는 창왕에 모습에 기겁했다.
“……그런데 왜 피가 안 나지? 뚫린 구멍도 없고.”
창왕이 손에 잡혀 발버둥치는 악귀를 성하 쪽으로 내밀었다.
“으쌰!”
신나게 주먹을 휘둘러 단번에 터트려 버렸다. 악귀에 빙의되었던 헌터는 정신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창왕이 그를 잡아 일으켜 근처에 서 있던 헌터에게 건네며 말했다.
“빨리 단단하게 묶어 놓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깨어난 후에 다시 공격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