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김성혁과의 연합 던전 이후, 은석은 다른 무엇보다 레이드 달성에 집중했다.
[한국 각성자 협회 설립 이후 가장 빠른 100회 레이드 달성!]
[김은석 헌터, 그가 새로운 역사를 쓰다.]
[100회 레이드로 꽉 막아 둔 길드 서열에 변화가 생길 것인가?]
“김은석 헌터님, 최단기 100회 레이드 달성,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모두 안 실장님 덕분입니다.”
안공진 실장은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다 제 덕분입니다. 알아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헌터님이 어찌나 빨리 클리어하시는지 속도에 맞춰 준비하느라 한동안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김성혁과의 레이드에서 은석은 잡귀에 불과했던 목귀가 마력으로 인해 중급 악귀로 바뀌는 것을 보았다.
이후의 레이드에서도 완벽하게 빙의되었건, 아니든 악귀에게 씐 헌터의 숫자가 증가하고 있음을 확인했다.
물론 마력이 낮은 헌터의 경우, 빙의된 악귀 역시 하급이 대부분이었다.
그 말은 곧, 상위 길드와 높은 마력을 가진 헌터에게는 중급 이상의 악귀가 빙의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
소수의 대형 길드들이 상위 랭크 던전을 독식하기 위해 만든 100회 레이드 달성.
은석은 그들 속에 들어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오직 마력이 높은 헌터들에게 빙의된 악귀를 소멸시키기 위해서 빠르게 던전을 클리어한 것이었다.
자신이 그동안 힘들었음을 늘어놓던 안 실장이 작은 메모지 하나를 은석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지태웅이라고 하시더군요. 여러 번 전화가 왔습니다. 올 때마다 늘 레이드 중이어서 전화번호를 받아 놓았습니다.”
지태웅은 얼마 전 황희준의 교통사고 현장에서 그를 도와 준 의사였다. 그리고 연단술이라는 유니크 스킬을 가진 A급 헌터.
‘생각보다 연락이 빨리 왔네.’
이야기를 나눠 보고 싶어 자신도 귀신을 볼 수 있음을 솔직하게 말했지만 단번에 거절하고 돌아선 자였다.
하지만 언젠가는 연락이 올 것이라 예상했다.
왜 자신이 남들은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지 이유를 알고 싶은 것이 사람의 본능.
안 실장이 메모지에 적힌 이름을 보며 웃고 있는 은석에게 물었다.
“기다리셨던 분인가 봅니다. 반가워하시는 표정인데요.”
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연락이 안 오거나 한참 후로 생각했었는데 예상보다 빨리 와서 놀랐습니다.”
“그렇군요. 헌터님 휴대폰이 아닌, 길드로 연락이 온 걸 보면 친한 분은 아니신가 봅니다.”
은석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제 좀 친해 볼까 합니다. 만약에 친해진다면, 아마 하데스 건물의 새 입주자가 될 수도 있고요.”
혼잣말처럼 조용히 내뱉었지만, 안 실장은 빠르게 태블릿을 켜 해야 할 일 목록을 열었다.
‘3층, 혹은 4층 인테리어 공사 스탠바이 할 것.’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은석이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안 실장의 사무실에서 나와 1층으로 내려가며 지태웅의 번호를 눌렀다.
몇 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네, 지태웅입니다.”
차분한 그의 음성이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김은석입니다. 길드로 여러 번 전화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은석의 전화를 기다렸는지 한 옥타브 높아진 목소리로 레이드 달성 축하 인사말부터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헌터님. 기사에서 봤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뭐. 늘 똑같은 일상이죠.”
은석은 그가 왜 길드로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는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먼저 그 이유에 대해 말하지 않고 의미 없는 안부만 건넸다.
사고 현장에서는 은석이 그와 이야기하고 싶어서 붙잡았다면, 이번에는 지태웅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했다.
은석이 쓸데없는 이야기만 늘어놓자, 지태웅은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이유로 전화했는지 왜 안 물어보지? 저번에는 먼저 이야기하자고 했으면서…….’
결국, 답답한 쪽은 지태웅이었다.
은석은 이미 주변을 맴도는 존재에 대해 말해 주었고, 자신도 영혼을 본다고까지 했다.
다짐한 듯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켰다.
“헌터님, 저번에 마시자고 하셨던 커피, 마실 시간 있으십니까?”
지태웅이 내민 손을 은석이 잡았다.
“혹시 하데스 길드로 오실 수 있으신가요? 조용히 이야기하기에 여기가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희 길드 커피 맛이 아주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마침 제가 내일 쉬는 날입니다. 오후 2시쯤, 괜찮으신가요?”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후, 은석은 커다란 창 앞으로 걸어갔다. 잎이 무성한 거목 안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신장을 올려다봤다.
“선명하지는 않아도 거대한 신장의 형체는 희미하게 보이겠지?”
하데스 건물에 가득한 영체들을 보고 놀랄 걸 생각하니 은석의 얼굴에 개구진 표정이 떠올랐다.
* * *
네비게이션에서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알려 주기 전에 지태웅은 앞에 보이는 건물이 하데스 길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주변의 건물들이 낮은 편이라 5층인 건물이 눈에 띄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지태웅의 눈에 들어온 것은 건물 양쪽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였다.
“와, 가까이에서 보니까 크기도 크지만……. 저건 뭐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온 지태웅은 눈을 휘둥그레 뜨며 거목을 올려다봤다.
은석의 예상대로 거목 안에 서 있는 좌우 신장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인 것이었다.
‘설마 저것도 사람의 영혼은 아니겠지? 그렇다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혹시 거인?’
스스로도 어이없는 추측인 걸 아는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1층에 들어오시면 오른쪽에 제 사무실이 있습니다.]
“하, 크기도 크기지만……. 뭔지 모를 이 위압감. 평범한 영혼은 아닌 건 분명해.”
좌우 신장이 깃든 거목을 다시 한번 더 바라보는 지태웅이 저도 모르게 숨을 내뱉었다.
그때, 자신의 옆을 스치듯 지나가는 흐린 인영 하나.
“흐억!”
왼팔을 반쯤 걸쳐서 지나간 탓에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는 것 같았다.
하데스 길드를 향해 가던 인영은 문 앞에 서더니 순식간에 땅속으로 훅 꺼지듯 사라졌다.
지태웅은 눈을 비비며 자세히 살폈지만, 사라진 인영은 보이지 않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거야, 건물 아래로 내려간 거야……?”
뭐든 간에 그는 하데스 건물로 들어가야 할지를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거인도 모자라 건물 안으로 들어간 귀신까지……. 진짜 여길 들어가도 되는 거야?”
하데스 길드 건물을 감싸 안고 있는 것처럼 펼쳐진 산. 마치 수문장처럼 건물 양쪽에 자리 잡은 두 그루의 거목.
하데스 길드 주변에는 짙은 자연의 생명력이 넘쳐났다. 이런 곳에서 처음 만나는 것이 죽은 자의 영혼이라니.
아이러니한 장면에 지태웅은 입구에 서서 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하루 이틀 봐 왔던 것도 아니고,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유리문을 밀고 로비에 들어선 지태웅은 저도 모르게 휘파람을 불었다.
건물 안은 당연히 길드에서 근무하는 사람들로 북적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넓은 로비는 마치 미술관에 온 듯 독특한 분위기의 작품들만 전시되어 있었다.
“음. 이거 인터넷에서 봤던 그림 같은데, 던전 풍경이던가?”
천천히 그림을 살펴보던 지태웅의 앞에 나타난 또 다른 흐린 인영.
“이 건물 도대체 뭐야…….”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고 있는 인영은 은석이 경비 삼아 세워 둔 지박령이었다.
일반인이었다면 보이지 않아 그대로 통과해 버렸을 존재. 흐리게나마 영혼의 존재를 느끼는 지태웅은 차마 그대로 지나갈 수가 없었다.
그때, 은석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안 들어오시고 여기서 뭐 하십니까?”
“아, 그게…….”
지태웅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꼿꼿하게 서 있는 지박령을 가리켰다.
은석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괜찮습니다. 잡귀 잡으려고 세워 둔 겁니다. 움직이지 않을 테니 그냥 들어오시면 됩니다.”
“아, 네. 그럼…….”
그의 말에도 도저히 통과할 엄두는 나지 않아, 옆으로 살짝 피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시오. 지태웅 헌터님.”
은석에게 인사를 건네려는 순간, 그의 입에서 헌터라는 단어가 흘러나왔다. 지태웅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석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혹시 제가 헌터라는 말을 했었나요? 그랬을 리가 없을 텐데.”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어떻게 아셨죠? 제 뒷조사라도 한 겁니까?”
지태웅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지만, 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의자에 앉기를 권했다.
“일단 앉으십시오.”
막 뽑은 따뜻한 커피 두 잔을 들고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지태웅의 앞으로 머그잔 하나를 내밀며 말했다.
“제가 전에 죽은 자를 본다고 말씀드렸었죠?”
태연하게 커피를 마시는 은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헌터님 곁에 머물던 혼령 하나가 알려 주더군요. 의사지만 각성자라고.”
물론 거짓말이었고, 지태웅 역시 은석의 말을 100% 믿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진짜 영혼이 말해 줬다고? 내가 헌터인 걸 어디 말한 적도 없는데 알고 있는 걸 보면 믿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은석의 입가에 미소가 슬그머니 나타났다 사라졌다.
“커피, 드셔 보십시오. 저희 실장님 입맛이 꽤 까다로우셔서 맛이 괜찮으실 겁니다.”
여전히 찜찜했지만 더 이상 묻기도 애매한 지태웅은 은석의 권유대로 커피를 마셨다.
“으음. 정말 맛있는데요.”
그는 하데스 길드에 도착한 이후로 계속 긴장 상태였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커피 한 모금에 지태웅의 뻣뻣하게 굳은 몸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예민하게 반응해서 죄송합니다. 각성자라는 걸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게다가 영혼이 말해 줬다니, 솔직히 조금 놀랐습니다.”
지태웅은 머그잔을 내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남들이 모르고 있는 걸 느낀다는 건, 신기하면서도 귀찮은 일이군요.”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태웅에게 물었다.
“언제부터 죽은 자들을 느끼기 시작하셨습니까? 태어나셨을 때부터 그러셨나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아주 평범하게 살아온 사람입니다.”
“그럼 각성은 언제 하셨나요?”
“전공의가 되고 몇 년 후에 각성자가 되었습니다. 영혼들을 보기 시작한 것은 각성하고도 한참 지나고 나서고요.”
* * *
“지태웅 헌터님, A급입니다. 축하드립니다.”
며칠 전부터 느낌이 이상해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력측정을 받았다.
‘뭐? 내가 A급 각성자라고? 허!’
헌터 자격증을 받아 든 지태웅은 지금 상황이 어이가 없어 헛웃음만 실실 흘렸다.
게다가 이름도 생소한 연단술이라는 스킬을 가진 마법사였다.
당연히 그는 헌터로 활동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A급 헌터를 길드에서 그냥 내버려 둘 리가 없었다.
길드에 들어오라는 제의를 계속 거절하던 어느 날.
“헌터로 활동할 생각 없습니다.”
길드 홍보팀이라는 소개에 지태웅은 습관처럼 거절 의사를 밝히고 전화를 끊으려 했다.
“잠깐만요. 선생님! 연구에 관심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이전의 길드에서 수도 없이 들었던 고액의 연봉과 혜택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남자의 말처럼 지태웅은 개발 연구에 꽤 관심이 많았다. 그쪽과 관련된 동아리 활동도 했었고, 치료약 개발에 참여한 적도 있었다.
‘그걸 이 남자는 어떻게 아는 거지?’
혼자 재미 삼아, 취미 삼아 했던 연구였다. 그것을 알고 있다는 사실에 지태웅은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다.
“제 뒷조사를 하신 겁니까? 유쾌하지 않군요. 앞으로 전화하지…….”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빠르게 끼어들었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합니다. 하지만 연구에 최적화된 스킬을 썩히시는 게 안타까워서 실례를 무릅쓰고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