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급 힐러는 네크로맨서-98화 (98/226)

98화

망자 최가(家)의 등장에 이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아직 여기 있어요? 정자 밑에서 뭘 하신 겁니까?”

“그건 알 거 없고. 비켜 봐. 너한테 볼일이 있는 게 아니니까.”

이현을 옆으로 밀며 은석의 앞으로 다가갔다.

망자가 턱을 치켜들며 은석을 똑바로 쳐다봤다.

“던전 안에서 똑똑히 봤죠? 나 싸우는 거.”

“그래.”

“나도 그거, 뭐야. 귀속인가, 계약인가. 암튼 그거 해 줘요.”

망자의 뻔뻔한 요구에 이현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내가 왜?”

“다 봤잖아요. 나 정말 잘 싸워요.”

잘 싸운다는 말에는 동의한다는 듯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이현을 가리키는 망자.

“저 봐요. 저 남자도 내가 잘 싸운다고 생각하니까 저러잖아요. 그러니까 나도 계약해 줘요.”

“우리 팀도 잘 싸워.”

“흥! 그래도 저 마법사보다 내가 더 나을 건데요?”

졸지에 비교 대상이 된 이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가 이현보다 더 잘 싸우는지 어떻게 알아?”

은석의 표정이 순간 냉랭하게 변했다. 망자가 허리에 양손을 올리며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자, 놀라지 말고 들어요. 내가 바로 S급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놀란 표정을 지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껏 모든 자가 그래 왔으니까. 하지만 은석의 표정은 무덤덤하다 못해 귀찮아하는 듯 보였다.

오히려 그 모습에 당황한 망자가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 그쪽 팀에 S급이 있어요? 없잖아요.”

“우린 S급 필요 없어.”

“S급이 왜 필요 없어요? S급이 나오면 서로 자기 길드로 데려가려고 난린데……. 하데스는 달라요?”

“어, 달라.”

“뭐가 다른데요?”

“내가 있거든. 내가 있는데 S급이 왜 필요해?”

훅 들어오는 그의 말에 망자는 할 말을 잃었다.

“아, 몰라 몰라. 다 모르겠고. 계약해 줘요. 안 해 주면 죽을 때까지 따라다닐 거예요.”

망자는 이제 막무가내로 들이대기로 했다. 그런 망자를 잠시 바라보던 은석이 물었다.

“왜 계약을 하고 싶은 거지?”

“그거야 싸우고 싶어서죠.”

“왜 싸우고 싶은 거야?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싸움을 하고 싶은 이유.”

“그러니까 그 이유가…….”

망자는 이유에 대한 답을 하지 못했다.

“꼬맹아, 각성 등급으로만 사냥하는 게 아니란다.”

이현이 만들어 놓은 마법진 안으로 들어가려던 은석이 뒤돌았다.

“그리고 너보다 못해 보이는 이 마법사도 마음만 먹으면 널 소멸시킬 수 있어. 등급만 믿고 까불지 마라.”

은석과 이현이 이내 사라지고, 어스름 새벽이 밝아 오는 산 정상에 망자 혼자만 우두커니 서 있었다.

“내가, 싸우고 싶은 이유…….”

망자는 은석이 던지고 간 질문을 계속 되뇌었다.

* * *

“며칠은 지난 것 같은데 겨우 총회 다음 날이라니.”

방에 도착한 은석은 그제야 피곤함이 몰려왔다.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하며 이현을 소환 해제하려는데.

“대장.”

이현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왜?”

“음. 그 망자 말입니다. 실력도 뛰어난데 왜 계약을 안 하시는 건가요?”

최강호의 집에서부터 망자에게 묘한 동질감을 느끼고 있던 이현이었다.

“S급이라면 무조건 계약해야 해?”

“그건 아니지만. 보통 헌터가 아니니.”

“누가 보통 헌터고 누가 특별한 헌터라는 거야? 다 같이 힘들게 싸우는데.”

그동안 은석과 가장 많이 움직이고 대화를 나눴다. 짧게 툭툭 던지는 말이었지만, 그 안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쉬십시오. 대장.”

“그래, 너도 수고했다.”

* * *

최강호 회장의 집만 가볍게 둘러보고 올 계획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인스턴트 던전이 나타났고 미친 듯이 싸워 단시간에 클리어했다.

‘팀 고스트 전원을 레이드에 불러낸 게 처음이지.’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졌지만 아공간에 넣어 둔 유니크 아이템을 꺼내 들었다.

남자 손바닥 정도 크기의 호리병이었다. 하지만 일반 병처럼 딱딱한 것이 아니라 젤리처럼 말캉거렸다.

병 안에 담긴 물이 튀어나올까 조심스럽게 살폈는데 다행히 뚜껑으로 단단히 막혀 있었다.

덕분에 웬만큼 흔들어도 샐 염려는 없을 것 같았다.

[대지의 마나수입니다.]

호리병의 가는 목을 잡고 좌우로 흔들어 봤다. 안에 담겨 있는 마나수가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대지의 생명력을 응축해서 만든 것입니다.]

마나수에 대한 여러 가지 효능 몇 가지가 나타났는데, 그중 은석의 눈길을 끄는 문장.

[불안정한 마력의 흐름을 원활하게 조절해 줍니다.]

‘그렇게 인스턴트 던전에 들어간 이유가 이것 때문일 수도 있겠네.’

총회에서 윤혁과 악수하면서 느꼈던 불안정한 마력의 흐름. 그제야 윤혁이 왜 그렇게 백훈섭을 들볶았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해머가 이문성이었을 때, 그 역시 아픈 아내의 약을 구하기 위해 인스턴트 던전에 들어갔었다.

‘윤혁 정도면 개인 포션을 만드는 팀도 있을 텐데. 그걸로도 치료가 힘들다는 말이군.’

은석이 손안에서 찰랑거리는 마나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진짜 이걸 찾고 있었으면 좋겠네.’

대지의 마나수를 다시 아공간에 넣은 후, 은석은 노움 보덴을 불러냈다.

던전과 전혀 다른 공간에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무릎을 꿇었다.

“주인님을 뵙습니다.”

“일어서.”

“그건 안 됩니다. 주인님.”

“됐고. 일어나서 여기 앉아. 내가 불편해.”

은석이 의자를 내밀자, 마지못해 일어나는 보덴.

“그리고 주인님이 뭐냐? 그냥 대장이라고 불러.”

보덴이 손사래를 쳤다.

“안 됩니다! 감히 위대한 주인님께.”

그 모습에 은석이 풉 웃음을 뱉었다.

“감히 위대하다는 건 어디서 나오는 논리냐? 대장이 싫으면 대장님이라고 하던지. 주인님이라고 하지 마라. 소름 돋는다.”

보덴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흑마법사 맞아?”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오오! 그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 주인님은 위대하신…….”

“야!”

“맞습니다. 흑마법사.”

“대지의 정령이 흑마법사가 될 수 있나? 원래 흑마법사였어?”

보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제 선택으로 흑마법사가 되었습니다.”

순간, 그의 표정에 비통함이 흘렀다.

“어떤 마법을 할 수 있는데?”

“땅속에 잠들어 있는 모든 죽은 자들을 조종할 수 있습니다.”

“던전 안에서 봤던 스켈레톤이나 좀비처럼?”

“네.”

“다른 것들도 가능해? 땅속에만 있으면?”

“그렇습니다.”

보덴의 대답에 은석의 눈빛이 반짝였다.

몇 가지 더 물어보려는데.

똑똑-

누군가 은석의 방문을 두드렸다.

“은석아, 자니?”

엄마였다.

의자에 앉아 있는 보덴을 다시 저승 훈련장으로 보내고 방문을 열었다.

“아니요. 아직 안 자요.”

“새벽에 들어왔지? 자는 줄 알았는데 말소리가 들려서…….”

“아, 희준이랑 통화 좀 하느라.”

엄마가 삐죽 솟아 나온 은석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쓱 눌렀다.

“우리 아들, 피곤할 텐데 어서 자라. 밥 먹고 잘래?”

은석이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뇨. 자고 일어나서 먹을게요.”

“그래, 은영이는 내가 조용히 시킬 테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방문은 잠그고.”

김은영의 문 여는 동작을 흉내 내는 엄마의 모습에 은석이 킥킥 웃었다.

“역시 우리 아들은 화면보다 실물이 훨씬 더 멋있어.”

엄마 말대로 방문을 잠그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보덴을 불러 더 물어볼까 고민하는 사이, 은석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드드드-

책상 위에 올려 둔 휴대폰의 진동이 울렸다.

드드드-

은석이 인상을 쓰며 이불을 머리끝까지 당겨 올렸다. 하지만 끈질기게 울려 대는 휴대폰은 멈출 생각이 없는 듯했다.

“와. 누군지 몰라도 대단하다, 대단해.”

결국 은석이 포기하고 일어났다. 책상 위를 마구 돌아다니고 있는 휴대폰을 집었다.

오전 9시 10분.

새벽 6시가 넘어 잠이 들었으니 겨우 세 시간 정도 지났을 뿐이었다.

여전히 울려대는 휴대폰에 떠 있는 이름은 안공진 실장이었다.

“그래도 10분이나 참고 전화하셨네.”

통화 버튼을 눌렀다.

“좋은 아침입니다. 김은석 헌터님.”

“네, 그렇네요. 좋은 하아아아…….”

은석이 늘어지게 긴 하품을 내뱉었다.

“어이쿠. 제가 너무 일찍 전화 드렸나 봅니다. 어제 총회 때문에 늦게 들어오셨을 텐데요. 혹시 너무 즐거우셔서 밤을 지새우신 건가요?”

은석은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은 채 대답했다.

“차라리 총회에서 늦게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죠. 안 실장님 덕분에 신데렐라가 된 기분을 느껴 봤습니다.”

껄껄거리는 안 실장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저도 어제 윤꽃샘 회장님과 생중계를 시청했습니다.”

“그러셨군요.”

“김은석 헌터님 화면발이 장난이 아니던데요? 이참에 위험한 헌터 말고 영화배우로, 아니다. 아이돌로 직업을 바꿔 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은석이 낮은 웃음을 흘렸다. 차갑고 냉정했던 안 실장의 첫인상.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그에 대한 이미지가 점점 달라졌다.

윤꽃샘 회장이 오랜 기간 곁에 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럴까요? 안 실장님 혹시 연예계에 아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물론입니다. 김은석 헌터님만 원하신다면야 특 SSS급 매니지먼트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음. 그럼 희준이를 매니저로 써야겠군요.”

실없는 농담은 주고받는 사이, 비몽사몽하던 정신이 조금씩 맑아지는 것 같았다.

“이제 잠은 좀 깨셨습니까?”

“네, 덕분에 정신 차리고 있습니다.”

스피커 버튼을 누른 뒤 책상 위에 올려 두었다. 침대에 앉아 가볍게 목을 움직이며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오늘은 전화 드리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연합 던전을 빨리 진행해야 할 것 같아서요.”

총회 전 한조 길드와의 레이드가 연합 던전의 처음이자 마지막. 하지만 연합 던전을 통해 빙의된 헌터를 기생형 몬스터로 잘 포장해 두었다.

앞으로의 레이드는 이전과 달리 훨씬 편하지 않을까.

다시 속도를 올려 하루라도 빨리 100회의 레이드를 채워 상급 던전에 들어가야 했다.

안 실장의 말에 조금 전까지 눈꺼풀을 무겁게 누르던 잠이 싹 사라졌다.

“길드에 계십니까?”

달라진 은석의 목소리. 휴대폰 너머 안 실장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있을 곳이 길드 말고 어디 있겠습니까.”

“곧 가겠습니다. 만나서 얘기하시죠.”

전화를 끊고 은석은 황희준에게 길드로 오라는 문자를 보냈다.

* * *

은석은 하데스 길드 1층에 위치한 그의 사무실 안으로 이동했다.

안 실장을 만나기 전 먼저 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사무실에서 연결된 문을 통해 건물 지하로 내려갔다.

저승으로 가는 작은 구멍. 그 앞에 차려진 조촐한 음식상이 보였다.

여러 가지 이유로 저승차사의 안내를 받지 못하는 망자들이 있었다.

음식은 이승을 떠돌다 힘들게 저승으로 가는 그들을 위한 은석의 작은 선물이었다.

저승 구멍 주변을 간단히 치우고 음식 몇 가지를 교체했다. 그리고 하데스 길드 밖으로 나가 건물 양쪽에 서 있는 거목 앞에 섰다.

“와. 엄청나네.”

완전히 회복된 것을 넘어서 이전보다 더 커지고 풍성해진 것 같았다.

거목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신장(神將).

옛 군복을 입고 양손에 창과 검을 든 모습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예전보다 더욱 위엄 있고 강해진 느낌이었다.

“오랜만이지?”

좌우 신장이 은석을 향해 깊숙이 허리를 굽혔다.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나 한참을 올려다볼 정도로 크게 자란 나무. 그만큼 좌우 신장의 분위기도 달라져 있었다.

“많이 변했네. 나무가 제대로 뿌리내린 모양이야.”

좌우 신장이 감사의 의미로 다시 고개를 숙였다.

“최근에 원귀가 꽤 많아졌지?”

“네.”

“앞으로 계속 늘어날 거야. 원귀를 부르는 마력이 하데스 건물 안에 있으니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