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헌터에게는 익숙한 몬스터인 오크였지만 승형과 부대원에게는 아직 낯선 존재.
갑자기 내지르는 오크의 함성에 병사 몇이 움찔했다.
스톤 골렘 돌돌은 오랜만의 사냥에 신이 났는지 쿵쾅거리며 던전을 뛰어다녔다.
그러다 망자 최가(家)의 앞으로 다가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공격할 대상인지 아닌지 고민하는 듯 보였다.
‘몬스터 주제에 무슨 생각하는 척이야!’
자신을 쳐다보는 돌돌을 보고 놀란 망자가 주먹을 쥐고 전투 자세를 취했다.
망자에게서 위험함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 기분이 좋아서인지 돌돌은 다시 뛰어 은석의 곁으로 돌아갔다.
“저 골렘 뭐야? 지가 개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현이 은석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기, 대장.”
“왜?”
“저 망자는 어떡하죠?”
“뭘 어떡해? 그냥 놔두는 거지. 어차피 영혼이라 죽을 염려도 없잖아.”
“아, 그건 그렇지만…….”
이현은 최강호의 집에서 망자와 잠시 이야기를 나눴었다. 그 때문인지 자꾸 주변을 서성이는 망자가 신경 쓰였다.
은석의 입술에서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왜? 거슬려? 죽일까?”
이현이 다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럼 출발.”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던전은 황폐해진 지 오래되어 생명력이라고는 느낄 수 없었다.
투명한 던전 게이트를 제외하고는 하늘은 우중충한 회색빛이었다.
만약에 푸른 나무와 잔디가 있었다면 아름다웠을 것 같은 땅은 건조함을 넘어서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알 수 없는 흙바람에 눈을 찌푸렸다.
“여러 던전을 다녀봤지만, 여기처럼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던전은 또 처음입니다.”
창왕의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곳에 몬스터가 살 수나 있을까.
살아 있는 생명의 기운을 느낄 수 없는 곳이었다.
헌터들은 막막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과 달리 오크 군단은 조금 전부터 땅 이곳저곳을 마구 헤집고 있었다.
“쟤들은 또 왜 저래?”
“자기들끼리 하는 말을 들었는데요. 이런 곳에 있을 만한 정령은 노움밖에 없다고.”
“노움?”
“네, 노움을 화나게 해야 밖으로 나올 거라고 합니다.”
“노움이 뭔가요?”
옆에서 듣고 있던 승형이 슬쩍 물어 왔다.
“아, 그게 몬스터는 아니고 땅의 정령입니다. 음, 뭐라고 말씀드려야 바로 이해하시려나.”
귀속령이 되면서 다른 팀원에게 많은 것을 배웠지만, 승형은 어쨌든 조선 시대에 살던 사람이었다.
아무리 긴 세월을 이승에 머물렀어도 그들의 시간은 조선에 멈춰 있었다.
쉽게 이해할 만한 단어를 찾고 있는데 승형이 먼저 대답했다.
“땅을 지키는 수호신 같은 존재인가요?”
“음. 좀 다르긴 한데 굳이 따지자면 그렇다고도 볼 수 있죠.”
승형과 그의 곁에 서 있던 병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메마른 땅 전체가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벼운 진동이었지만 이내 파도가 몰아쳐 오듯 대지 전체가 솟아오르고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온다.”
앞에 선 은석이 귀검을 들고 대지의 웨이브를 노려봤다.
“지금부터 레이드 시작이다.”
* * *
파앗!
땅이 솟구쳐 오르며 그 속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스켈레톤?”
언데드였다.
수백 구의 스켈레톤과 간간이 섞여 있는 썩어 문드러진 좀비.
죽은 귀속령과 죽은 몬스터의 싸움.
예상하지 못한 몬스터의 등장에 잠시 당황한 팀 고스트의 침묵을 깨고 나선 자는 오크였다.
“쿠아악! 죽여라!”
미치도록 싸우고 싶어 했던 오크다웠다. 그록을 선두로 한 오크 군단이 휘두르는 도끼에 스켈레톤의 해골이 부서져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동안 저승 훈련장에 갇혀 있던 한을 푸는 듯 스켈레톤을 쓸며 지나가는 움직임에 거침이 없었다.
“우아악! 바로 이거지! 이것이 진정한 오크 전사의 싸움이다!”
그록의 외침에 오크 군단 전체가 괴성을 질러 댔다. 평소라면 시끄럽다고 인상을 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어떤 응원보다 기운 넘치는 포효였다.
해머의 눈빛이 번쩍였다.
“우리도 질 수 없지.”
이현이 커다란 마법진을 만들었다. 순식간에 인간형 귀속령 전체를 스켈레톤 무리의 가운데로 이동시켰다.
앞에서는 오크, 중간에서는 헌터들의 스켈레톤 사냥이 시작되었다.
스톤 골렘인 돌돌은 커다란 발로 스켈레톤을 마구잡이로 밟으며 뛰어다녔다.
스켈레톤이 땅속에서 끊임없이 올라왔다. 하지만 팀 고스트의 사냥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엄청난 수의 언데드들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모두 싸움에 정신없던 그때. 오직 한 명, 망자 최가(家)의 주변에만 아무도 없었다.
싸움을 바라보는 눈빛이 초조했고 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진짜 멋져! 대박이야! 나도, 나도 진짜 싸우고 싶다. 잘 싸울 수 있는데!!”
싸움에 대한 순수한 열망. 스켈레톤의 수가 줄어드는 것을 지켜보는 망자의 마음이 급해졌다.
드디어 마음을 먹은 듯 입술을 굳게 다물고 은석을 향해 뛰었다. 은석은 막 좀비 한 놈의 목을 벤 후였다.
“나도 싸우게 해 주세요!”
은석은 망자를 힐끗 쳐다볼 뿐 달려드는 스켈레톤에만 집중했다.
“제발 부탁합니다. 딱 한 번만 싸울 수 있게 해 주세요…….”
망자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며 고개가 아래로 떨궈졌다. 기가 죽은 망자를 쳐다보던 은석.
“던전 안에서만 싸울 수 있을 거야.”
그의 말에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 은석은 손을 내밀어 망자의 팔에 살짝 대고 소량을 생력을 흘려 넣어줬다.
몸 안에 흐르기 시작하는 낯설지만 강한 느낌. 망자의 눈이 점점 커졌다.
“와씨! 이거 완전 죽이잖아!!”
느닷없이 소리를 지르며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다.
“선생님! 사장님! 아무튼. 완전 능력자시군요.”
은석을 향해 허리를 꾸벅 굽혔다. 호들갑 떠는 망자를 보며 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렇게 싸우고 싶다고 했으니까. 어디 한번 보여 봐. 네 실력.”
은석의 말에 망자가 입술을 비릿하게 올리며 씩 웃었다.
퍽퍽-
맨주먹을 세게 부딪치며 스켈레톤을 향해 돌아섰다.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것들.”
때마침 망자를 향해 찢어진 입을 벌리며 달려오는 좀비.
퍽!
좀비의 눈 사이로 뻗은 주먹이 그대로 머리를 뚫어 버렸다. 뒤통수를 뚫고 나온 망자의 주먹을 본 창왕의 입이 떡 벌어졌다.
“에이, 더럽게.”
망자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좀비의 머리를 뽑아내 바닥에 던졌다.
“자! 제대로 시작해 볼까.”
주먹을 쥐며 자세를 잡고 가볍게 스텝을 밟기 시작한 망자.
그녀를 향해 스켈레톤이 몰려들었다.
퍼벅- 퍽-!
둔탁한 타격음이 멈추지 않고 들려왔다. 무기로 싸우는 그들이 지금껏 듣지 못한 섬뜩한 마찰음이었다.
정작 소리를 내는 망자는 잔뜩 신난 아이 같았다. 쉴 새 없이 휘두르는 주먹에 해골은 빠르게 박살 났다.
전광석화와 같은 모습에 싸움을 멈추고 망자의 모습을 구경하는 오크도 있었다.
“대단한데. 지금 보호 장갑 안 낀 거 맞지?”
“네, 맨주먹입니다.”
“역시 S급은 죽어도 S급이라는 건가.”
최소한의 움직임, 상대방의 빈틈을 놓치지 않는 날카로운 눈빛.
처음 싸움을 시작한 그 자리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은 채 스켈레톤을 마구 부수고 있었다.
그런 망자의 모습에 해머가 혀를 내둘렀다.
“저런 자와는 절대 싸우고 싶지 않다.”
쓰러지는 스켈레톤 사이로 보이는 망자의 얼굴에는 함박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거지. 이게 바로 진짜 싸우는 맛이지!’
망자는 지금, 죽은 이후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싱글벙글거리는 망자를 본 이현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은석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살폈다. 팀 고스트의 활약에 확실히 언데드의 숫자가 줄어드는 게 보였다.
‘이래서는 제한 시간까지 싸움만 하겠는데…….’
여기서 다른 방법을 찾지 않는다면 던전을 나가서 백훈섭과 마주칠 확률이 높았다.
‘언데드를 조종하는 놈이 어디 있을 건데…….’
멀리서 싸우고 있는 이현이 보였다.
‘이현.’
정신감응으로 그를 불렀다.
‘네, 대장.’
‘어디 숨어서 언데드를 조종하고 있을 거다. 너는 그놈을 찾아.’
‘알겠습니다.’
순간이동을 이용해 빠르게 스켈레톤 사이를 훑었다.
언데드 무리에는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먼 곳으로 이동했다. 적이 숨을 만한 곳을 빠르게 살피던 중 관목 몇 그루와 바위를 발견했다.
‘어!’
바위 뒤에 도착한 이현의 눈에 낯선 존재가 보였다.
빠르게 몸을 낮추고 숨을 죽였다. 다행히 놈은 이현의 등장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싸우고 있는 스켈레톤을 보며 낮은 목소리로 주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낡고 검은 망토를 두른 놈은 체격이 왜소해 마치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이현이 얼굴을 보기 위해 조심스레 바위 옆으로 이동했다.
‘노움이잖아.’
오크들의 말이 맞았다.
언데드를 조종하는 놈의 정체는 대지의 정령인 노움이었다. 하지만 노움의 모습은 이현이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달랐다.
언제나 눈을 반짝이며 장난할 거리를 찾는 노움답지 않게 두 눈에는 생기가 없었고 퀭했다.
정리되지 않은 머리카락은 사방으로 뻗었다. 피부는 던전의 땅처럼 거칠다 못해 쩍쩍 갈라진 상태였다.
‘언데드를 부리는 노움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이현이 다시 바위 뒤로 자리를 옮기며 은석을 불렀다.
‘대장.’
‘찾았어?’
‘네.’
은석은 빠르게 동체 감응을 사용했다.
스켈레톤의 무리에서 한참 떨어진 곳. 그의 눈에 기괴한 뒷모습이 들어왔다.
‘정체는?’
‘노움……. 같습니다.’
던전에 들어왔을 때 봤던 알림창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대지의 정령이었군. 오크의 말이 맞았어.’
‘어떻게 할까요? 제가 잡을까요?’
‘아니, 놓치면 다시 잡기가 더 힘들어져. 내가 간다.’
‘그럼 저는 여기서 지켜보고 있겠습니다.’
은석은 쉴드와 하이드 스킬로 몸을 감추고 이현이 숨어 있는 곳을 향해 질주했다.
빠른 속도만큼 스켈레톤들이 그의 보호막에 튕겨 날아갔다.
언데드 무리를 빠져나오자, 은석은 속도를 줄였다.
최대한 조심스럽게 바위 뒤에 엎드려 있는 이현의 곁으로 다가갔다. 은석을 보자, 노움이 서 있는 관목 사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놈이군.’
[대지의 정령, 노움 보덴크훔디크, 흑마법사]
‘노움이 흑마법사?’
노움은 4대 정령 중 땅의 힘을 이용하는 대지의 정령이었다. 대지는 생명령을 의미했다. 그런 노움이 죽은 자를 부리는 흑마법사라니.
그의 생각을 읽어 보려는 순간, 스켈레톤 무리를 노려보던 노움이 무릎을 굽혔다.
바닥에 손을 대고 중얼거리는 노움. 곧 엄청난 진동 소리가 들리더니, 팀 고스트가 서 있는 바닥이 습지처럼 물컹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노움 역시 스켈레톤만 믿고 있다가는 싸움이 끝나지 않을 거라 판단한 것이었다.
팀 고스트가 서 있는 땅만 변해 그들을 땅속으로 끌어당겼다.
‘소환 해제.’
은석의 명령에 팀 고스트 전원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망자 최가(家)만이 허리까지 땅속에 박혀 허우적대고 있었다.
싸우던 적들이 갑자기 사라지자, 노움은 깜짝 놀라 관목 사이를 걸어 나왔다.
어리둥절한 그의 생각이 전해졌는지, 스켈레톤들 역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거지?”
노움이 바닥에서 손을 떼자, 늪지 같았던 땅이 다시 딱딱해졌다.
은석은 노움의 얼빠진 표정을 보며 씨익 웃었다.
‘나와.’
그의 명령에 다시 나타난 팀 고스트. 기다렸다는 듯 빠르게 스켈레톤의 해골을 박살 내 버렸다.
“으어어!”
놀란 노움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그 순간, 은석이 빠르게 달려가 노움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잡았다, 이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