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은석이 신청서 몇 장을 손가락으로 슥 넘겨 보았다.
“한번 읽어 보십시오. 생각보다 많이 들어와서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신청서를 읽던 은석이 피식 웃었다.
“이거 저희한테 항의 서한을 보낸 길드도 다 신청한 건가요?”
양손에 머그잔을 들고 오는 안공진 실장 역시 웃음을 흘렸다.
“맞습니다. 욕하는 놈들이 더 한다고……. 그런 길드에서 제일 먼저 신청서를 보내왔습니다.”
안 실장이 내미는 커피를 받아 들었다.
“그쪽에서 이런 기회를 놓칠 리가 없죠. 입찰받을 필요도 없는 데다 던전 수확은 각자의 몫이고.”
은석의 말을 들으며 안 실장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똑똑똑-
노크 소리와 동시에 문이 열렸다.
“형님, 저 왔습니다!!”
방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인사를 하며 들어오는 황희준. 안 실장이 은석의 맞은편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황희준이 테이블 위에 흩어져 있는 신청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형님, 연합 던전에 들어갈 길드를 뽑으시는 겁니까?”
은석은 대답 대신 읽던 종이를 내려놓았다.
“형님, 더 보십시오. 방해하지 않겠습니다.”
자신 때문에 은석이 읽는 것을 멈췄다고 생각한 황희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난 김에 마정석 담을 케이스 좀 가져와.”
은석이 아공간에서 마정석을 꺼내기 시작했다. 그것을 본 황희준이 부리나케 자신의 방으로 뛰어가 보관 상자 몇 개를 들고 돌아왔다.
황희준은 은석이 꺼내 놓은 마정석을 크기별로 적당히 분류해 상자에 담았다. 한두 번 해 온 일이 아니었기에 머뭇거림 없이 빠르게 정리해 갔다.
“형님, 확실히 채굴팀이 있으니 마정석의 양이 예전과 다릅니다.”
안 실장은 소파에 기대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돈이 될 마정석을 분류하는 둘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다가 자신이 모르는 ‘채굴팀’의 존재를 되물었다.
“채굴팀요? 하데스 길드에 제가 모르는 채굴팀이 있습니까?”
난데없는 황희준의 말에 안 실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실장님은 모르시겠군요.”
자신이 말실수를 한 건가 싶어 황희준은 은석의 눈치를 슬쩍 살폈다.
“채굴팀, 나와.”
은석이 채굴팀을 불러냈다. 그들의 뒤로 팀장인 채굴을 비롯한 몇 명의 귀속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지 않은 사무실 안에 100명 모두 불러낼 수는 없었다.
안 실장은 이미 은석의 히든클래스가 네크로맨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갑자기 귀속령이 나타나도 그다지 놀라는 기색은 없었다.
“그런데, 소환수가 채굴을 한다구요? 보통 던전 안에서 사냥을 보조하는 존재가 아닌가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달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습니다. 하지만 저의 소환수는 사냥과 채굴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안 실장의 표정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럼 헌터님이 레이드를 하는 사이, 저들은 던전 안에서 마정석을 캔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안 실장이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내려놓고 손뼉을 쳤다.
“말 그대로 일타이피, 속전속결이군요. 역시 대단하십니다.”
안 실장도 은석의 능력을 알고 있다는 걸 안 황희준은 그제야 싱글벙글 웃기 시작했다.
“그렇죠? 우리 은석 형님, 정말 대단하신 분인 것 같습니다.”
둘의 모습에 은석은 피식 웃음을 내뱉고는 서 있던 채굴팀을 사라지게 했다.
“그런데, 제가 알고 있는 소환수가 아니라 꼭 진짜 인간 같습니다. 네크로맨서라고 하셔서 보통 소설책에 나오는 스켈레톤이나 좀비, 이런 종류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하하, 판타지 좀 읽어 보셨네요. 그렇지요. 일반적으로는.”
안 실장의 물음에 황희준이 끼어들었다.
“실장님도 그렇게 느끼셨군요. 저도 처음에 형님 소환수를 보고 진짜 놀랐습니다. 살아있는 헌터라고 해도 믿겠더라니까요.”
“히든클래스가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이렇게 체계적으로 소환수를 이용하시다니……. 헌터님은 사업가 기질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은석을 바라보는 안 실장의 눈빛이 경이감으로 반짝거렸다.
은석은 픽 웃음 한 번 흘릴 뿐 그의 말에 신경 쓰지 않고 마정석을 마저 꺼내 상자에 담았다.
“이게 끝이다.”
황희준이 휘파람을 불었다.
“우와! 형님, 우리 곧 부자 되겠습니다.”
“더 많이 벌어야지. 돈이 권력인 건 헌터도 마찬가지니까.”
맞는 말이라며 황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형님, 마정석 색깔이 전에 것과 조금 다른 것 같습니다.”
“인스턴트 던전 마정석이라 그럴 거야.”
“네? 형님 언제 인스턴트 던전에 들어가셨습니까? 입찰로 올라온 건 없던데.”
갸우뚱거리는 황희준.
“우연히 지나가다 보게 된 거야. 운이 좋았지.”
은석의 대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손뼉을 쳤다.
“역시 형님은 하늘이 도우시는 분입니다. 인스턴트 던전만 나오길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길을 가다가 레이드를 뛰다니요.”
오랜만에 듣는 황희준의 너스레에 은석은 소리 내 웃었다.
“하늘이 아니고 땅이 도와주는 거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황희준은 신경 쓰지 않고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은석은 신청서를 모아 한 손에 집어 들었다.
“실장님, 잠시 제 방에서 읽어 보고 와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천천히 보십시오.”
황희준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럼 저는 마정석 팔고 오겠습니다. 마침 오늘 마정석 시세도 좋던데 빨리 다녀오겠습니다.”
채굴팀 몇을 불러내 마정석이 담긴 상자를 옮기도록 시킨 후, 은석은 1층 자신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귀(鬼)맵.”
눈앞에 커다란 지도가 나타났다.
반대편이 흐릿하게 보이는 투명한 지도 위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은석은 책상에 올려 둔 신청서를 힐끗 쳐다봤다. 그곳에 적힌 길드 주소를 찾아 확대해 보니, “역시 기운을 감출 생각도 하지 않는군.”
하급 악귀를 의미하는 주황색 점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음, 주변에 다른 원귀나 귀물은 없는 것 같고.”
악귀가 머무르는 공간에 다른 귀물이 없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 정도이다.
귀물을 먹어 치우며 악귀가 된 놈이거나, 악귀가 된 후에 재미삼아 귀물을 죽이거나.
후자라도 귀물이나 원귀가 주변에 조금이라도 어슬렁거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이 정도로 깨끗한 걸 보면 어지간히도 악귀가 되고 싶었던 모양이군.”
다른 길드를 살펴보려던 은석의 눈에 조금 전 그 주황색의 점이 빠르게 깜빡거리는 게 보였다.
그것은 하급 악귀의 분노가 극한에 달했다는 경고의 의미였다.
만약에 던전 안이었다면, 마력의 영향으로 강해진 악귀가 빙의된 헌터의 영혼을 잡아먹고 미쳐 날뛰었을 것이다.
은석은 하급 악귀가 빙의되어 있는 길드 신청서를 집어 들었다.
“여기부터 시작해 볼까. 급한 불부터 꺼야겠지.”
* * *
첫 연합 던전을 함께 할 길드를 정한 은석은 안 실장의 사무실로 갔다.
그는 그사이 5층 이중우 화가의 작업실 현장에 올라가고 없었다.
“거의 다 끝났군요.”
5층에 올라간 은석은 막 설치한 주방 식탁을 점검하고 있는 안 실장의 곁으로 다가갔다.
“화가님은 다음 주에 들어오기로 하셨습니다.”
김은희에게 이미 들었던 터라 은석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5층을 두 구역으로 나눠 한쪽에는 이중우가 지낼 집을, 반대편에는 그의 작업실을 만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마치 원룸에 들어온 것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싱크대 서랍을 열어 보니 수저까지 완벽하게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안 실장의 꼼꼼함에 은석은 혀를 내둘렀다.
“실장님, 건물 공사할 때도 느꼈지만 정말 일을 잘하시는 것 같습니다.”
“칭찬으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겠죠?”
은석이 미소 짓자, 안 실장 역시 밝은 표정을 지으며 감사의 고갯짓을 했다.
“이곳에 거주하신다고 하니까 아무래도 신경이 더 쓰이더군요.”
반대편 작업실을 둘러보려는 은석을 따라 들어가며 물었다.
“이런 질문은 잘 하지 않지만, 흠흠.”
“물어보십시오.”
“그분을 왜 길드 건물에서 지내게 하시는 겁니까?”
“미술관에서 던전이 폭발했을 때 저희 누나를 구해 주신 분입니다.”
“그때의 보답으로?”
“그런 이유도 있고…….”
말끝을 흐리는 은석.
“그럼 로비에서 전시는 왜 하는 거죠? 그것 역시 누님을 구해 줬기 때문인가요?”
은석이 휴대폰을 꺼내 사진첩을 열었다. 이중우의 작업실에서 찍어 온 작품들을 안 실장에게 보여 주었다.
“이중우 화가님의 작품입니다.”
그의 휴대폰을 받아 들고 유심히 살펴보던 안 실장이 고개를 들었다.
“여긴, 어디인가요? 분위기가 굉장히 독특한데요.”
“던전 안 풍경입니다.”
“네? 던전 안요? 혹시 그 화가님도 각성자이신가요?”
“아뇨. 일반인입니다. 순간 떠오른 것을 그리셨다고 하시더군요.”
“그럼 던전 안이 아닐 수도 있지 않나요?”
“제가 던전 안에서 봤던 것들입니다. 그래서 신기하더라고요. 왠지 길드와 잘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안 실장은 그제야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으며 휴대폰을 건네주었다.
“하데스 식구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걱정 마십시오. 같은 공간에 머무르면 한 가족이나 마찬가지죠.”
너털웃음을 짓는 안 실장에게 신청서 한 장을 내밀었다.
“정하셨습니까?”
“다른 건 조금 더 읽어 봐야 하고……. 일단 이 길드부터 시작하려고요.”
신청서를 받아 든 안 실장.
“한조 길드군요.”
“네.”
* * *
일이 늦어질 것 같다는 황희준의 연락에 은석은 집으로 돌아왔다.
안 실장이 한조 길드와 연합 던전을 준비해 줄 것이고, 던전은 입찰을 넣은 결과만 기다리면 되었다.
“한조 길드라…….”
은석은 휴대폰 검색창을 열었다.
예전에 잠시 들어 봤던 기억은 있는 곳이었으나, 워낙 소규모 길드라 함께 레이드를 뛴 적은 없었다.
하위 그룹의 길드답게 정보도 많지 않았다.
“아직 100회를 다 채우지도 못했고…….”
공략 팀도 6명의 헌터로 구성된 하나가 전부였다.
“딱 하급 악귀가 만만하게 보고 빙의할 만한 곳이군.”
각성자 협회에 들어가 한조 길드의 마지막 던전 출입이 언젠지 찾아봤다.
“……6개월 전?”
은석이 던전을 휩쓸어 가는 것과 무관하게 그들은 오래전부터 던전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래 레이드를 안 했다고?”
소규모 길드가 넘쳐 난다고 해도 아직 처리해야 할 던전의 수가 더 많았다.
“내가 쓸어 가기 시작한 것도 얼마 되지 않았는데.”
길드를 해체하지 않는 이상, 6개월이나 레이드를 돌지 않는 경우는 드물었다.
한조 길드를 검색하던 중 길드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편의점으로 음료수를 옮기기 위해 잠시 정차해 둔 트럭이 미끄러져 1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
경찰은 사이드 브레이크 고장을 사고의 원인으로 발표했습니다.
경사로를 미끄러져 내려오는 트럭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A씨(26)가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A씨(26)는 편의점 근처에 위치한 한조 길드 행정 팀에 근무하는 직원으로, 당시 이어폰 사용으로 위험을 피하지 못해 안타까움을 사고 있습니다.]
워낙 활동이 적은 길드다 보니 교통사고에 이름 한 번 나온 것까지 관련 기사로 올라왔다.
“안됐네. 소리만 들렸어도 충분히 피할 수 있는 사고였을 텐데.”
뒤로 가기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은석의 눈에 사고 날짜가 들어왔다.
“사고도 6개월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