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어금니를 들고 있는 오른손을 은석을 향해 내밀었다.
“네놈이, 취익. 대장이냐?”
어눌했지만 정확하게 인간의 말을 하는 오크. 은석은 무표정한 얼굴로 오크를 쳐다보고만 있었다.
“취익! 답이 없는 걸 보니 네가 대장이구나.”
오크가 혼자 말하고 있을 때, 은석은 정보탐색 스킬을 사용하고 있었다.
오크 우두머리의 머리 위에 나타나는 정보창.
[샤투그록, 15세, 동족 살육으로 추방]
[‘나는 오크의 왕이다. 이제 곧 이곳을 나가 모두 내 발아래 무릎 꿇릴 것이다.’]
15세라는 샤투그록의 나이를 본 은석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20년을 넘기지 못하는 오크의 수명을 기준으로 본다면 샤투그록의 나이는 꽤 많은 편이었다.
‘그래도 15세는…….’
적응하기 힘든 숫자였다.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다물고 눈에 힘을 주고 있는 은석.
그의 표정을 본 샤투그록이 어금니를 내밀며 외쳤다.
“너의 그 표정……. 취익. 도전이라고 생각해도 되겠나?”
은석의 눈빛을 대장 대 대장의 싸움으로 받아들인 샤투그록.
“전사의 눈빛. 마음에 든다. 취익. 나의 부하가 되어라. 나는 이곳의 취익. 왕이다.”
“왕은 무슨. 쫓겨나서 갇혀 있는 주제에. 샤투그록 왕님아.”
오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의 이름을 정확하게 부르는 은석을 쳐다보며 경악했다. 목소리가 점점 커지며 어금니를 든 양손을 치켜들었다.
“너, 너는 누구냐? 어떻게 내 이름을……. 취익.”
“그건 알 필요 없고.”
흥분한 자신과 달리 귀찮다는 표정의 은석의 태도에 샤투그록은 모욕감을 느꼈다.
‘감히 날 무시해?’
오크의 왕이 되리라 생각했었다.
다른 오크에 비해 덩치도 컸고, 싸움도 잘했다. 힘으로 굴복시키다 보면 무리의 정점에 오를 거라 믿었다.
“악마에게 현혹되어 동족을 살육한 샤투그록을 추방한다.”
장로의 마지막 말이 끝난 후, 샤투그록은 낯선 공간에 떨어졌다.
그 이전에 추방된 오크들이 머물고 있던 이곳 유배지에서, 샤투그록은 추방된 오크들과 밤낮없이 싸우고 쉴 새 없이 죽였다.
그 결과, 그토록 바라던 오크의 왕이 된 것이었다.
‘이곳을 벗어나 나를 추방한 놈들을 죽여 진정한 왕이 되리라!’
드디어 오크의 소굴을 벗어날 수 있는 게이트가 열렸고 이방인이 들어왔다.
샤투그록은 침입자를 죽이러 보낸 오크들을 기다리며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마쳤다.
그들의 목을 가져올 것이라 믿었는데, 살아남은 오크는 동족의 피만 잔뜩 묻혀 돌아온 것이었다.
샤투그록은 분노했다.
‘감히 오크의 왕인 나를 막아서는 자가 있다고!?’
은석을 향해 분노에 찬 눈빛을 쏘아 대는 샤투그록.
어금니를 잡고 있는 양손에 힘을 잔뜩 주고 콧바람을 거칠게 내뿜었다.
“이방인……. 취익. 죽여 주마!”
샤투그록의 말이 끝나자 뒤에 서 있던 오크들이 괴성을 질렀다.
팀 고스트 역시 은석이 명령만 내리면 달려 나갈 준비를 했다. 은석이 흥분한 오크 무리를 보며 싱긋 웃었다.
“샤투그록, 너 같은 놈을 인간 세계에서 뭐라고 하는지 알아?”
놈은 대답 대신 은석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우물 안 개구리.”
은석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검은 오크 군단을 가리켰다.
“여기 보이지? 네놈이 싸울 상대는 우리가 아니라, 이놈들이야.”
샤투그록과 오크 무리를 향해 팔을 뻗으며 외쳤다.
“가라. 다 죽여 버려.”
검은 오크 군단이 괴성을 지르며 빠르게 달려 나갔다. 그 모습에 살아 있는 오크들이 당황해 샤투그록을 쳐다봤다.
검은색이라는 것만 다른 뿐, 조금 전까지 자신들의 동료였다. 그들의 모습에 샤투그록이 은석을 바라봤다.
“너는……. 취익. 악마인가?”
대답을 듣기도 전, 달려 나오는 검은 오크 군단에 은석의 모습이 사라졌다.
살아 있는 오크와 다시 살아난 오크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오크 던전의 주인, 샤투그록을 처치하였습니다.]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샤투그록은 스스로 오크의 왕이라 칭할 만했다. 커다란 덩치와 달리 빠른 속도로 귀속령을 끊임없이 베어 냈다.
다시 소환되는 속도가 베는 것을 따라잡지 못하자, 은석이 귀검을 들고 뛰어올랐다.
스릉-
은석이 직접 나서 순식간에 샤투그록의 목을 떨어뜨리자, 던전이 클리어되었다는 알람과 동시에 귀속을 묻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샤투그록의 영혼을 귀속할 수 있습니다. 귀속을 명하시겠습니까?]
“귀속.”
은석의 귀속 명령에 바닥으로 쓰러진 목 없는 몸통에서 샤투그록의 검은 영혼이 솟아올랐다.
[샤투그록의 영혼이 귀속령이 되었습니다. 귀속령에 대한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그록.”
살아 있을 때보다 더 거대해진 느낌의 오크 귀속령, 그록이 은석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너는 앞으로 오크 군단을 이끈다.”
“네.”
오크 특유의 발성이 사라지고 인간처럼 또박또박하게 대답하는 그록.
인스턴트 던전의 모든 오크가 은석의 귀속령이 되었다. 그록의 뒤에 서 있던 오크 군단이 비장한 눈빛으로 은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확인하지 않은 유니크 아이템이 있습니다.]
‘나중에.’
인스턴트 던전을 클리어하는 이유 중의 하나인 유니크 아이템.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확인하는 것보다 던전을 빠져나가는 게 우선이었다.
클리어와 동시에 빠르게 게이트가 닫히기 시작하는 인스턴트 던전.
은석은 팀 고스트와 채굴팀, 오크 군단을 소환 해제하고 이현만 남겨 두었다.
이현의 마법진을 이용해 게이트 앞까지 이동한 은석은 빠르게 던전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가 게이트를 빠져나오자, 이내 인스턴트 던전 입구가 사라졌다.
“닫히는 시간이 저번보다 더 빠른 것 같은데……?”
은석은 바지에 묻은 던전의 흙은 툭툭 털어 냈다.
그때, 갑자기 밝은 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어느 미친 새끼가 우리 던전에 들어갔나 했는데, 너 누구야?”
늦은 밤, 폐허가 된 지 오래된 시 외곽의 골프장에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봤다. 밝은 손전등의 빛이 은석의 눈으로 강하게 들어왔다.
은석은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획 돌렸다. 남자는 빛을 피하는 은석의 얼굴을 집요하게 쫓으며 손전등을 흔들어 댔다.
‘하이드.’
은신 스킬로 몸을 숨겼다.
갑자기 은석이 사라지자, 당황한 남자가 손전등으로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빠각-
남자의 옆으로 다가간 은석이 손을 내밀어 그의 손전등을 잡고 부쉈다.
“으아악!”
사라졌던 은석이 나타나 손전등을 부수자, 놀란 남자가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뭐, 뭐야?”
은석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남자는 내려다봤다. 그는 은석의 첫 인스턴트 던전에서 그를 향해 집요하게 손전등을 비추던 그 용병이었다.
“김은석?”
은석의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중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블린 주술사의 던전에 같이 들어갔던 용병 팀의 리더, 백훈섭이었다.
“백훈섭, 대장님?”
은석이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은석 역시 그들의 등장을 예상 못 했기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오랜만입니다. 대장님. 여기는 어쩐 일이신가요?”
“어쩐 일?”
백훈섭뿐만 아니라 그의 옆에 서 있는 용병들의 눈빛이 사나웠다.
“그건 우리가 할 말인 것 같은데.”
어느새 백훈섭의 곁으로 손전등을 비추던 남자가 다가왔다.
‘저 남자 이름이 아마, 박대국인가 그랬었지?’
은석이라는 걸 안 박대국은 삿대질을 하며 소리쳤다.
“이 새끼, 너 감히 겁도 없이 우리 던전에 들어가? 누구 허락받고 들어간 거야!”
박대국의 말을 듣고 나니, 갑작스러운 이 상황이 한 번에 정리되었다.
‘백훈섭은 인스턴트 던전을 공략하러 왔구나.’
던전 게이트에 도착하니 누군가 이미 들어가 막혀 있는 상태였다.
겨우 3일.
클리어가 성공하든, 실패하든 들어간 자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무작정 기다린 것이었다.
“새끼야, 같이 들어간 놈은 다 뒈졌냐?”
박대국이 새로 꺼낸 손전등으로 은석의 뒤를 비추며 흔들었다.
은석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저 혼자 들어갔습니다.”
박대국을 비롯한 용병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음을 뱉었다.
“형님, 저 새끼 미쳤는데요.”
비웃는 그들과 달리 백훈섭은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은석을 노려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묻겠다. 같이 들어간 자들은 모두 던전 안에서 죽었나?”
은석이 옆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진짠데……. 못 믿으시면 어쩔 수 없지만.”
박대국이 또다시 은석의 얼굴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며 빈정거렸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새꺄! F급 주제에.”
서걱-
순간 박대국의 눈앞에 푸른 선 하나가 흘러가는 게 보였다. 이내 들고 있던 손전등의 앞쪽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어…….”
푸른 선을 따라가 보니 은석이 들고 있는 귀검이 나타났다.
“다음에는 손목입니다.”
은석이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이 새끼가……!”
화가 치밀어 오른 박대국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백훈섭이 손을 들어 달려 나가려는 그를 막아 세웠다.
“형님! 왜 막으시는 겁니까?”
잔뜩 화가 난 박대국이 소리를 질렀다. 백훈섭이 차가운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조용해.”
그의 한마디에 입을 꾹 다물고 뒤로 물러서는 박대국.
백훈섭은 은석이 최근에 어떤 활약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단지 기사나 동영상을 100% 믿지 못할 뿐.
‘혼자 들어갔는데 상처 하나 없이 클리어했다는 말이지.’
그뿐만 아니라 검을 꺼내고 손전등을 자르는 순간을 보지도 못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강하다. 예전의 그놈이 아닌 것 같아…….’
정보탐색으로 백훈섭의 생각을 읽은 은석이 귀검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봤어? 아공간 아티팩트야.”
“태황 그룹 길드 헌터는 장비부터가 다르구만.”
은석의 얼굴을 알고 있는 용병 중 몇 명이 수군거렸다.
백훈섭이 다시 물었다.
“무려 태황 그룹의 헌터가 돈이 없어서 인스턴트 던전에 들어간 건 아닐 테고.”
“지나가다 우연히 게이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지나가다? 설마 여기가 도시 한복판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은석의 대답에 백훈섭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맞는데……. 집에 가려다가 발견한 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무슨 말을 한들 저들이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어차피 각성자 협회에 등록된 던전도 아니고. 제가 들어간 게 문제가 되나요?”
박대국이 낮은 목소리로 욕을 뱉었다.
“아니, 문제 될 건 없지. 하지만 이건 우리가 구입한 던전이야.”
은석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니까요. 이런 던전을 구입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죠.”
협회에 등록되지 않은, 또는 등록되기 전에 뒤로 빼돌려 불법적으로 거래하는 것.
인스턴트 던전을 구입했다는 것 자체가 불법을 인정하는 꼴이었다.
어금니를 빠드득 깨무는 백훈섭의 모습에 은석이 웃음을 삼켰다.
“그럼 별문제 없는 거 맞죠?”
그들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저는 차도 없고 걸어가야 하니까 이만 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다음에 또 뵐 수 있으면 뵙겠습니다.”
자신을 노려보는 박대국의 어깨를 툭 치고 골프장 밖으로 걸어 나갔다.
“퉤! 재수 없는 새끼.”
박대국은 은석이 들으라는 듯 침을 뱉으며 험한 말을 퍼부었다.
은석에게 인스턴트 던전을 빼앗긴 꼴이 되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백훈섭의 눈빛이 번뜩였다.
‘병사 4호.’
은석이 승형 부대 병사 4호를 불러냈다.
‘네, 대장님.’
몸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은석의 옆에 나타난 4호.
‘제일 앞에 서 있는 중년 남자를 따라다녀. 누구를 만나는지, 누구와 전화 통화를 하는지 바로 보고해.’
‘네, 알겠습니다. 대장님.’
은석의 명령에 4호는 빠르게 날아가 백훈섭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빨리 윤혁에게 알려야겠어.’]
4호를 붙여 놓은 이유는, 떠나려는 순간 은석에게 보인 백훈섭의 생각 때문이었다.
‘백훈섭의 입에서 윤혁이라는 이름이 나올 줄이야. 둘이 어떤 관계인지는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백훈섭 일행이 근처에 세워 둔 차를 타고 떠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은석이 몸을 돌려 희미해지는 백라이트를 바라보며 이현을 불러냈다.
그림을 그리다 나왔는지 얼굴과 손에 물감이 잔뜩 묻어 있었다.
“아, 빨리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서…….”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이현이 멋쩍게 웃었다. 은석이 하품을 늘어지게 하며 말했다.
“집에 가자. 나도 빨리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