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김은희는 은석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캐물었다.
물론 은석이 사실대로 말할 리는 없었다.
“김은돌, 내가 꼭 알아내고 말 테다.”
“그러시든지.”
자신을 노려보는 김은희를 뒤로하고, 은석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나와.”
은석의 말에 망자 박가(家)가 모습을 드러냈다.
“왜 계속 따라오는 거야? 소원 성취했으면 그만 저승으로 가.”
저승에 가라는 은석의 말에 망자는 당황한 듯 눈만 껌뻑였다.
“전에 귀속령이 되라는 말은…….”
“아, 그거. 그때는 귀속령이 되었으면 했는데, 접었어.”
“왜요?”
“싸우는 것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죽을 수도 없는 상태로 계속 싸우게 하는 것도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것 같고.”
“그럼, 그림은 왜 그리게 해 주셨나요?”
“보답이야.”
“보답요?”
“어. 미술관 던전 폭발에서 네 영혼을 걸고 우리 누나랑 시민들을 구해 줬잖아. 그 보답이야.”
“아…….”
“너 그때 내가 생력을 넣어 주지 않았으면 바로 소멸이었어. 어쨌든 덕분에 누나도 무사하고.”
입을 굳게 닫고 바닥을 내려다보는 망자.
“그럼, 저는 제가 원하는 것을 하면 되는 건가요?”
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승으로 가는 길은 저 자작나무 그림이야. 저리로 들어가면 저승 심판부로 바로 갈 수 있어. 잘 가라.”
말을 마친 은석은 휴대폰을 열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하지만 망자는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은석 역시 몇 번 쳐다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망자는 저녁 내내 그대로 서 있었고, 은석은 자신의 일을 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씻고 들어온 은석을 보며 망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저기, 헌터님.”
“드디어 저승에 가기로 결정한 거야?”
“헌터님의 귀속령이 되겠습니다.”
“뭐? 하기 싫은데 굳이 할 필요 없어.”
“아닙니다.”
“잘 생각해. 내 귀속령이 되면 계속 싸워야 해.”
망자의 눈빛은 단호했다.
“저는 전투계가 아니라 싸움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공간이동이라는 흔치 않은 스킬이 있습니다. 이런 능력이라도 괜찮으시다면, 귀속령으로 받아 주십시오.”
망자를 잠시 쳐다보던 은석이 다시 물었다.
“무르기 없기다?”
그의 말에 망자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물론입니다.”
[망자 박가(家)를 귀속하시겠습니까?]
“귀속.”
은석의 명령이 떨어지자, 망자의 온몸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망자 박가(家)가 귀속령이 되었습니다. 귀속령에 대한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이현.”
이번에는 망자에게 묻지 않고 바로 귀속령의 새로운 이름을 말했다.
“이 이름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했는데, 별로야?”
이현이 빙그레 웃었다.
“아닙니다. 저도 그 이름으로 하고 싶었습니다.”
[귀속령 망자 박가(家)의 새로운 이름은 ‘이현’입니다.]
거의 미술관 지박령이나 다름없었던 이현은 사람이라고 볼 수 없는 형체만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 그가 은석의 귀속령이 되면서 지팡이를 손에 들고 있는 마법사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어, 내 지팡이…….”
귀속령이 되면서 외형의 변화와 함께 예전에 그가 쓰던 무기가 다시 생겨난 것이다.
자신의 지팡이를 가진 이현이 신이 난 듯 크게 휙휙 휘둘렀다.
“이미 가 봤으니 따로 소개해 줄 필요는 없겠지? 저승에 가서 쉬어. 작업했던 화실이 네 방이니까 거기서 그림이나 그리든지.”
이현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소환 해제.”
저승으로 보낸 후 은석은 침대에 누워 황희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형님.”
언제나 그렇듯 재빨리 전화를 받는 황희준.
“문자 보고 전화했다.”
현재 황희준은 하데스 길드의 운영팀을 맡고 있었다.
팀이라고 하기엔 황희준 혼자였지만, 재능이 많은 그답게 무리 없이 척척 해내는 중이었다.
“보내드린 내용 그대로입니다. 요즘에 많이 바쁘시겠지만 던전 레이드부터 뛰어야 할 것 같습니다.”
황희준이 보낸 장문의 문자.
길드를 설립한 다음 100회의 던전 레이드를 채워야지 B-랭크 이상의 던전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조항은 무분별한 길드 설립을 막고자…….”
“무분별은 무슨. 기존의 길드가 자기 밥줄 빼앗길까 봐 텃세 부리는 거지.”
“그건 그렇지요. 어쨌든 돈으로 상위 헌터들만 스카우트해서 던전을 독식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니…….”
“모조리 입찰 받아.”
“네?”
“로마에서는 로마법을 따라야지. 레이드 100번만 뛰면 된다면서?”
“아, 네. 그렇습니다.”
“내일부터 우리가 들어갈 수 있는 레벨의 던전이 나오면 모조리 받아.”
“모조리요?”
“그래, 돈은 신경 쓰지 말고 다른 길드에서 가져가지 못하게 아예 높은 가격으로 넣어 버려.”
이제 은석의 웬만한 말에도 놀라지 않게 된 황희준이었다.
“알겠습니다. 형님.”
“할 수 있겠어?”
은석의 물음에 휴대폰 너머로 황희준의 자신감 넘치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형님, 제가 누군지 잊으셨습니까? 인스턴트 던전도 해킹으로 들어가는 놈입니다. 이런 밝은 세계의 입찰 정도야.”
황희준의 여유 가득한 너스레에 은석은 웃음을 뱉었다.
“그래, 믿고 기다린다.”
“형님이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100회를 채우실 수 있도록 손가락 한번 제대로 움직여 보겠습니다.”
휴대폰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은석은 눈을 감았다.
“한동안은 레이드에 집중해야겠군.”
* * *
큰소리쳤던 만큼, 황희준의 연락은 빨랐다.
“형님, D-랭크 한 곳과 E랭크 두 곳, 총 세 개의 던전을 받았습니다. 오늘은 입찰이 그것뿐이었습니다.”
“그래, 수고했다. 주소 알려 줘.”
“형님, 혹시 언제 가실 예정이십니까?”
“내일 아침부터 돌 건데, 왜? 너도 가려고?”
“형님만 허락하신다면 저도 레이드에 함께하고 싶습니다.”
“길드 운영 때문에 바쁘지 않아?”
“아무리 바빠도 형님과의 레이드가 우선이지요.”
던전을 클리어하고 일주일 동안 후반 작업을 하는 다른 길드와 달리, 하데스에는 그런 팀을 만들 계획이 없었다.
하데스 길드 자체의 설립 목적이 일반 길드와 다른 것도 있었지만, 레이드를 뛰는 동안 황희준이 마나석 채취와 몬스터 해체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검은 개미를 비롯한 귀속령이 던전 벽에 박힌 마정석을 캐낼 수 있었다.
은석도 낮은 등급의 던전이라 황희준과 함께 들어갈까 생각 중이었다.
하지만 운영에 바쁜 황희준에게 몬스터 해체하러 던전에 들어가자고 하기가 미안했다.
“네가 같이 가면 나야 고맙지.”
은석의 대답에 감동받은 황희준이 벌떡 일어나 휴대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저는 언제나 형님의 부름에 스탠바이 된 상태입니다.”
“그래, 내일 아침에 보자.”
이른 아침, 대문을 열고 나가자 황희준이 활짝 웃으며 은석에게 손을 흔들었다.
“형님, 날씨가 참 좋습니다.”
“그러네. 던전 들어가기 딱 좋은 날씨다.”
“여기에서 가장 가까운 곳부터 갈까요?”
“그래, 거기부터 도장 깨기 시작해 볼까.”
40분가량 차로 달려서 도착한 곳은 한적한 강변 산책로였다. 반대편으로 넘어가는 다리 중간에 생긴 게이트.
“저깁니다. 형님.”
사람들이 호기심에 게이트 근처로 다가가는 것을 막기 위해 경찰과 관리를 맡은 협회 직원이 다리 입구 쪽에 서 있었다.
황희준이 가방에서 서류를 꺼내 그들에게 뛰어갔다.
“입찰 받은 하데스 길드입니다.”
증명서를 확인한 협회 직원이 황희준과 걸어오는 은석을 쳐다봤다.
“혹시 두 분이 전부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진짜요? 아무리 E랭크라지만 두 명이 레이드를 뛴다는 게 말이 됩니까?”
경찰이 다가와 증명서를 힐끗 쳐다봤다.
“저기, 신입 길드라 잘 모르나 본데요. E랭크라도 몬스터 종류에 따라 위험할 수도 있어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한마디씩 건네는 그들 곁으로 은석이 도착했다.
“왜? 무슨 문제 있어?”
“아닙니다. 던전에 두 명만 들어간다고…….”
은석이 그들을 보며 물었다.
“던전 출입에 인원 제한이 있습니까?”
뒤늦게 도착한 은석을 쳐다보던 협회 직원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소리쳤다.
“어! 김은석 헌터!”
직원의 말에 경찰도 그제야 기억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 흉가에서 몬스터 잡던 그 영상 속 헌터?”
협회 직원이 부리나케 다가와 은석에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이렇게 유명한 분이 겨우 E랭크 던전 레이드에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은석은 그의 손을 맞잡으며 친근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생하십니다. 오면서 보니까 증명서를 보고 계시던데, 혹시 저희가 준비한 서류가 잘못된 곳이 있나요?”
직원이 다급하게 손을 흔들었다.
“아닙니다. 서류는 완벽합니다. 다만, E랭크 던전이라도 두 분이 들어간다고 하셔서 걱정스러운 마음에 꼼꼼히 살펴본 겁니다.”
“아. 그런 거군요. 그럼 아무 문제 없는 거죠?”
“그럼요. 김은석 헌터님의 실력이라면 두 명이 아니라 혼자서도 충분하지요.”
은석은 수고하라는 인사를 한 후 게이트 앞으로 걸어갔다. 그들의 뒤에서 낮은 목소리로 나누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저 둘만 보내도 됩니까?”
“영상 보셨잖습니까.”
“흠, 영상을 다 믿을 수는 없지 않나요? 만약에 저러고 죽어도 우리한테는 아무 해도 없겠죠?”
경찰의 걱정스러운 한숨에 직원이 고개를 흔들었다.
“던전 인원에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협회에서 정식으로 입찰 받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건데 우리는 상관없죠.”
“그건 그렇고, 실제로 보니까 영상보다 더 잘생겼네. 부럽다. 인물도 훤한데다 실력도 뛰어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걸어가던 은석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앞서가던 황희준이 먼저 던전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 * *
[늪의 주인 독두꺼비 던전입니다.]
‘귀찮은 게 걸렸네.’
던전에 들어가자마자 나타나는 몬스터 정보를 확인한 은석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
독두꺼비.
낮은 랭크의 던전에만 나오는 하급 몬스터였다. 혀에서 나오는 독이 닿으면 일시적으로 마비 증상이 올 뿐이었다.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마비 역시 한 시간 남짓이면 저절로 풀렸다.
하지만 일반 두꺼비보다도 작은 크기에 어디로 튈지 모르기 때문에 잡기가 까다로운 놈이었다.
“어우. 형님. 주변이 온통 늪입니다. 처녀 귀신이 나올 것 같은데요.”
“늪이랑 처녀 귀신은 어떻게 연결되는 거냐?”
황희준이 은석 곁으로 다가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마 저 늪 속에서 몬스터가 나오겠죠? 여기서 준비하고 있을까요?”
황희준의 물음에 대답 대신 은석은 팀 고스트를 불러냈다.
“다들 나와.”
그의 명령에 주변이 일렁이더니 팀 고스트가 드디어 완벽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까지 봐 왔던 희미한 인영이 아닌 강화 마스크를 쓴 완벽한 사람의 모습.
“으악!”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들의 모습에 깜짝 놀란 황희준이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형님……. 이 사람들은 혹시, 그 검은 연기 맞나요?”
은석의 귀력이 낮았을 때는 귀속이 되어도 여전히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혼령인 상태였다.
하지만 귀력이 올라가며 혼령에서 희미한 인영, 결국엔 인간처럼 모습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은석의 명령에 따라 정체를 보일 수도, 감출 수도 있게 된 것이었다.
“와. 그냥 연기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멋지네요.”
황희준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들을 둘러봤다.
“그런데 형님, 왜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는 건가요?”
완전한 인간의 모습을 드러내면서부터 은석은 혹시나 누군가가 귀속령들을 알아볼까 싶어 그들의 얼굴에 마스크를 씌웠다.
“멋있잖아. 강해 보이고.”
“음. 혹시 형님의 소환수들은 로봇인가요?”
황희준다운 엉뚱한 물음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너다운 생각이다.”
한동안 은석과 팀원들의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황희준은 머리만 긁적였다.
“그러면 이제 형님도 마스크를 쓰실 생각이십니까?”
“아니, 이런 얼굴을 마스크로 가리는 건 예의가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