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저승에 먼저 도착한 최성운 차사가 은석을 기다렸다.
“살아 있는 자가 저승에 오래 머물러 좋은 건 하나도 없다. 빙의되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지.”
“네.”
“그러니 네가 잘 살펴봐야 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최 차사님.”
은석은 망자를 데리고 팀 고스트가 머무는 집으로 향했다. 해머와 창왕, 승형이 이미 문밖에 서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장.”
“들어가자.”
승형과 병사들의 영향인지 더욱 넓어진 집 내부를 보며 은석이 휘파람을 불었다.
“볼수록 참 신기한 집이야.”
“대장, 이쪽을 보십시오.”
창왕이 여러 개의 문 중 하나를 열었다.
“마당?”
“네, 여기에 승형과 병사들이 머무를 수 있는 단독 건물이 생겨 있더군요.”
“굉장하네.”
은석이 승형을 돌아봤다.
“마음에 들어?”
“네, 그동안 저희가 머물렀던 곳에 비하면 이곳은 궁궐입니다.”
환하게 웃는 승형의 어깨를 툭 쳐 주며 은석은 망자를 데리고 복도를 지나 제일 안쪽 방문을 열었다.
그곳에는 넓고 쾌적한 화실이 있었다. 은석이 망자를 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어때?”
망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수십 종의 그림 도구가 완벽하게 갖춰진 방은 그가 꿈에서라도 바라 왔던 공간이었다.
“이건…….”
“마음에 들어?”
망자는 대답 대신 방 안을 뛰어다니며 정신없이 도구들을 살폈다.
미술 도구를 확인한 망자는 당장에라도 그림을 그리고 싶어 참을 수가 없었다.
장난감을 앞에 둔 아이처럼 잔뜩 흥분한 얼굴로 은석을 바라봤다. 그 모습에 은석이 피식 웃었다.
“물감은 마음껏 써도 바로 다시 생겨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사용해.”
“네!”
“그리고, 이중우의 영혼이 느껴지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라면 육체의 혼은 잠들게 해야 하는데, 같이 그림 그려 보라고 일부러 놔둔 거야. 지금 상당히 당황한 상태일 테니 네가 알아서 잘 설명해.”
“네…….”
“잘 지내 봐. 나는 가끔 이중우의 몸 상태만 체크하러 올 테니까.”
나가던 은석이 몸을 돌려 망자에게 말했다.
“이제 내가 나가면 이곳은 너와 이중우 둘만의 세계야. 시간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그리고 싶은 만큼 실컷 그려 봐.”
은석이 나간 후, 망자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참고 있었던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었다.
방문 너머 망자의 울음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대장, 빙의된 상태로…… 괜찮을까요?”
죽은 자의 영혼을 살아 있는 사람의 몸에 넣어 저승에 머물도록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은석은 예전 김은석이 수집해 놓은 고서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방법을 익혔다.
만약의 경우 이중우에게 생길 수 있는 부작용을 막는 비방까지 꼼꼼하게 공부해 둔 상태.
그 사실을 알 리가 없는 해머의 걱정에 은석은 어깨를 들썩이며 대답했다.
“이미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우리는 훈련이나 하러 가자.”
은석의 말을 기다린 듯 승형과 병사들이 우르르 거실로 몰려나왔다.
이제는 거실보다 로비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한껏 기대에 찬 그들의 표정을 보자, 은석은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신입들의 자세가 아주 좋아. 최 차사님도 기다리고 계실 테니까 나가자.”
은석의 말대로 최 차사는 이미 훈련장에 도착해 있었다.
저승차사의 모습에 오랫동안 떠돌이 혼령으로 지낸 승형과 병사들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쫄기는. 인사드려라. 훈련을 맡아 주시는 최성운 차사님이시다. 천 년 전 고려 무관을 지내셨던 분이다.”
승형과 병사들이 깍듯하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올렸다. 최 차사는 잘 훈련된 병사들의 일사불란한 모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의 표정에서 드물게 흐뭇함이 그대로 드러났고, 그것은 폭풍 훈련이 되어 팀 고스트에게 몰아쳤다.
훈련하는 중간중간, 은석은 이중우의 몸 상태만 체크하고 다시 돌아왔다.
최 차사가 불러낸 악귀와 전투를 마친 팀원들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대장, 화가님은 어떻습니까?”
“진짜 미친 듯이 그림만 계속 그리더라.”
“이번에 가신 게 벌써 네 번째죠?”
“다섯 번째.”
“후와. 이렇게 오래 있어도 괜찮을까요?”
은석이 누워 있는 그들의 옆에 앉았다.
“곧 끝날 것 같기도 하고.”
최 차사가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이 정도면 충분히 쉬었다. 그만 일어나거라. 이번에는 조금 더 강한 악귀를 불러내 주지.”
그의 뒤에서 이빨을 드러낸 채 으르렁거리는 검은 호랑이 무리가 나타났다.
* * *
기나긴 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고스트 팀원들은 각자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은석은 망자의 화실 앞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십시오.”
망자는 여전히 캔버스 앞에서 그림을 그리는 중이었다.
은석이 방 안으로 들어서자, 망자가 붓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일어났다.
은석을 돌아보는 그의 얼굴에 더할 나위 없이 만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이 그림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벌써? 더 그려도 되는데?”
은석이 앞으로 걸어가 막 끝낸 작품을 바라봤다. 그림에 대한 열망만큼이나 실력 또한 뛰어난 자였다.
망자가 그린 마지막 작품 속 풍경이 눈에 익었다.
“여긴 던전 안 아니야?”
신비로운 분위기의 풍경화는 던전 안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이었다.
망자가 머쓱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네. 그리다 보니 던전 안에서 보고 느꼈던 것들도 다 나오더라고요.”
“음. 멋진데?”
“그렇습니까?”
“일반인들은 던전 안이 어떤 곳인지 모르니까 더 굉장하게 느끼겠는데.”
은석의 말에 망자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잘 생각해. 진짜 여기서 그만둬도 돼? 이런 기회는 다신 없어.”
망자는 결심한 듯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충분합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자가 저승에 오래 머무는 것도 좋지 않고…….”
은석이 눈썹을 씰룩거렸다.
“이미 오래 머물렀거든. 지금에 와서 생각해 주는 척은.”
그의 말에 망자가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진짜 마지막으로 묻는다. 정말 이걸로 충분해?”
“네, 충분합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오케이.”
대답과 동시에 은석이 아공간을 열어 그동안 망자가 그린 수백 점의 그림을 집어넣기 시작했다.
“그림은 왜…….”
“그렸으니까 전시해야지. 이중우 화가랑 이야기 끝난 거 아니야? 그래서 화가명도 저렇게 적은 거고.”
그림 한쪽에 적혀 있는 화가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현>
“저게 새로 만든 화가명 아니야? ‘이’는 이중우 화가의 이름일 테고, 그럼 ‘현’은 네 이름 중에 하나겠지.”
망자가 쑥스러운 듯 이마를 긁적였다.
“그림을 그리면서 이중우 화가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래.”
“각자 이름에서 한 자씩 따와 새로운 이름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중우 화가님께서……. 감사하게도 앞으로 계속 ‘이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실 거라고 했습니다.”
“괜찮네. 그런데 표정이 왜 그래? 마음에 안 들어?”
망자가 다급하게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요. 절대 아닙니다. 저는 이렇게 그리는 것으로 만족했는데 전시까지 생각해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너도 많은 걸 줬잖아.”
은석이 던전 풍경을 그린 그림을 쳐다봤다.
“이런 그림은 헌터가 아니면 못 그려. 아니, 헌터라도 너처럼 예술가가 아니면 그냥 빨리 클리어하고 나가고 싶은 던전일 뿐이야.”
망자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저의 상상력과 던전 안에서 느꼈던 것들을 모두 화가님에게 전해 드렸습니다.”
은석이 손뼉을 쳤다.
“앞으로 이중우, 아니 화가 이현은 독특한 그림으로 굉장히 유명해지겠네.”
은석의 과장된 몸짓에 망자가 재미있는 듯 웃었다.
“그리고, 제가 왼손잡이입니다. 오랫동안 왼손으로 그렸으니 이제 이중우 화가님도 그림 그리시는 게 어렵지 않으실 겁니다.”
“그렇게 다 주고. 아깝지 않아?”
망자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헌터님 덕분에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원도 한도 없이 그렸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허리 굽혀 인사하는 망자를 보며 은석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만족했다니 됐어. 이제 그만 올라가자.”
최 차사의 도움으로 이중우의 작업실에 도착했다. 시계를 보니 김은희가 커피를 사러 나간 후, 5분 정도 지났을 뿐이었다.
은석이 이중우의 등에 쓴 글자를 지우자, 망자가 그의 몸 밖으로 훅 빠져나왔다.
의식을 잃은 채 쓰러지는 이중우를 잡아 의자에 앉혔다. 망자가 그를 걱정스러운 듯 바라봤다.
“헌터님, 혹시 제가 빙의한 것 때문에 피해가 가지 않을까요? 귀안이 열린다거나 빙의가 쉬운 몸으로 바뀐다거나…….”
“걱정 마. 내가 그런 것도 생각하지 않고 무책임하게 이런 일을 벌렸을까 봐?”
의자에 기대어 있는 이중우의 어깨에 손을 올려 생력을 몸 안으로 흘려 넣었다.
동시에 악귀들이 들어갈 수 없도록 만드는 짧은 주문을 읊조렸다.
“허억!”
이중우가 숨을 내뱉으며 눈을 떴다.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긴…….”
“작업실입니다. 막 저승에서 올라왔습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은석을 바라보는 이중우.
“혹시 그분은…….”
이중우의 옆을 가리켰다.
“지금 화가님 옆에 서 계십니다.”
은석의 말에 망자가 서 있다는 옆을 향해 한 번, 은석에게 한 번. 고마움이 가득 담긴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다시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말을 하던 도중에 이중우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동안 혼자 오롯이 겪었던 좌절과 이제 그 시간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은석은 눈물을 흘리는 그를 놔두고 작업실 구석으로 가, 아공간에서 그들이 함께 그린 그림을 꺼내 차례대로 세웠다.
그 모습을 본 이중우가 달려와 은석을 도와주려고 했다.
“괜찮습니다. 아무리 제가 생력을 넣어 드렸다고는 하나, 오랫동안 음식을 섭취하지 않아 힘드실 겁니다.”
이중우가 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그 어느 때보다 몸도 정신도 아주 맑은 상태입니다.”
그는 은석이 꺼내는 그림들을 받아 정리했다. 수백 점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무너지지 않게 잘 세워 둔 후 두꺼운 천으로 덮어 두었다.
천을 덮던 은석의 눈에 깔끔한 사인이 들어왔다.
“이현, 좋은 이름입니다. 앞으로 이 이름으로 활동하실 거라고 들었습니다.”
“네, 그분 덕분에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으니 함께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똑똑-
커피를 사러 갔던 김은희가 문을 두드렸다.
은석이 이중우를 쳐다보자,
“이 일은 그분과 저, 헌터님. 우리만의 비밀입니다.”
은석이 하려는 말을 알아차리고 먼저 언급했다. 은석이 씩 웃으며 문을 열었다.
“야! 빨리 안 열고 뭐 하고 있는 거야?”
김은희가 눈을 가늘게 뜨며 작업실 안으로 들어왔다.
“선배, 커피…….”
이중우에게 커피를 건네던 김은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커피 들고 뭐 하는 거야?”
은석이 손을 내밀었다.
“어? 아, 그래. 커피.”
잠시 이중우를 쳐다보면 김은희가 테이블 위에 커피를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다시 이중우를 뚫어지게 쳐다봤다.
“왜? 내 얼굴에 뭐가 묻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선배, 뭔가,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그녀의 말처럼 이중우는 달라졌다. 초췌한 얼굴은 그대로였으나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고 있었다.
“은희야, 네 동생분이 날 구해 줬다.”
“네, 미술관에서 그랬죠.”
“그때뿐만 아니라 오늘도 날 구해 줬어. 너한테도 정말 고맙다.”
뜬금없는 이중우의 말에 김은희가 미간을 찡그리며 은석을 쳐다봤다.
“너! 선배한테 뭔 짓을 한 거야?”
은석이 양손을 들고 어깨를 들썩였다.
“뭘 할 시간도 없었다. 아! 왼손 사용하는 방법을 알려 줬네.”
의심에 가득 찬 눈초리로 둘을 번갈아 쳐다보는 김은희.
“뭔가 있는데…….”
은석과 이중우가 그녀를 보며 개구지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