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마음대로 크기 조절도 할 수 있고, 좋은데.”
점들이 모여 있는 여러 곳을 확대해 봤다.
“우리 집 근처에도 귀신들이 많은지 한번 볼까.”
동네 쪽을 살펴보기 위해 지도를 이동시키려는데, 사방에 흩어져 있는 점들이 한곳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은석이 고개를 돌려 최성운 차사를 바라봤다.
“최 차사님, 왜 점들이 한곳으로 모여드는 거죠?”
“어디를 말하는 것이냐?”
최 차사가 귀(鬼) 현황판을 다시 불러내 확인하니, 은석의 말대로 한곳으로 점이 몰려들고 있었다.
“흠. 여기에 곧 던전이 생긴다는 뜻이다.”
“던전이요?”
“그래, 길드에서 입찰을 통해 들어가는 던전은 생성 후 천천히 마력이 차오른다. 그래서 갑자기 귀물들이 몰려들지는 않지.”
“그럼 일반적인 던전은 아니라는 거군요.”
“그렇다. 인스턴트 던전이나 생성과 동시에 몬스터가 나오는 던전 폭발의 경우에 주로 저런 현상이 나타난다.”
은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던전 브레이크였을 때 귀물들이 몰려갔던 경우도 마력이 분출되었기 때문이었군요.”
“그렇지.”
점이 향하는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지도를 확대했다. 그가 살고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산 중턱이었다.
“저기에 던전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데, 인스턴트 던전이라도 생기는 걸까요?”
최 차사 역시 이동 형태를 꼼꼼히 살펴보고 있는 중이었다.
“내 경험상 저건 던전 폭발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던전 폭발.
던전이 생성되는 과정 중에 마력이 과도하게 집중된 나머지, 생성과 동시에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오는 현상.
인적이 드문 곳이라면 다행이지만, 사람들이 많은 곳에 던전 폭발이 일어난다면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는 사망 선고나 다름없었다.
던전에서 나온 배고픈 몬스터들의 먹이가 되어 몰살될 테니까.
“산 중턱이긴 하지만 여긴 미술관이 있는 곳인데…….”
은석은 순간, 며칠 전 첫째 누나 김은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며칠 후에 미술관에서 선배 특별전이 시작하거든. 나랑 친한 선배야. 그러니까 너도 와서 인사하고 꽃 좀 꽂아 두고 가라.’
“설마…….”
귀물들이 모여드는 위치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은석이 최 차사에게 다급히 물었다.
“차사님! 이곳에서 바로 미술관으로 갈 수 있습니까!”
“미술관으로 바로 갈 수는 없고 근처 건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염라대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대왕님, 급한 일이 있어 이만 올라가 봐야겠습니다.”
염라대왕이 빨리 가라는 손짓을 했다. 은석이 문을 열고 나가자, 지상으로 올라가는 긴 계단이 나타났다.
지체할 새 없이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 * *
오늘 아침, 새벽 조깅을 마치고 돌아온 은석.
웬일인지 늘 늦게 일어나는 김은희가 분주하게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디 가?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난 거야?”
“전시회.”
“아, 오늘이 그날이야?”
“그래. 꼭 와라.”
“보고. 나도 오늘 약속 있거든.”
“약속? 오늘 던전도 안 간다면서 무슨 약속? 오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거면 죽어.”
김은희가 도끼눈을 하고 그를 쳐다봤다.
“있거든. 태황 호텔에서 점심 약속.”
“뭐? 태황 호텔이라고? 이게 거짓말하고 있어. 안 오면 진짜 죽는다.”
은석을 향해 주먹을 치켜들어 보였다.
“내가 왜 얼굴도 모르는 누나 선배 전시회에 가야 되는 건데?”
나갈 준비로 서두르던 김은희가 멈춰 섰다.
“화가가 되기 위해 진짜 고생 많이 한 선배야. 한 사람이라도 더 와서 축하해 줬으면 좋겠어.”
은석의 예상과 다른 진지한 답변. 세상만사 관심 없고 시큰둥한 그녀답지 않은 진지한 눈빛이었다.
저런 표정이면 어쩔 수 없지.
“알았어, 늦더라도 꼭 갈게. 대신 꽃값은 누나가 내.”
돌아서는 은석의 뒤통수를 보며 그녀가 미소 지었다.
“벌써 왔어?”
미술관에 도착하자, 화가 이중우가 차에서 짐을 내리고 있었다.
“가깝잖아요.”
김은희가 남은 짐을 꺼내 들었다.
“내가 들게. 무거워.”
“주인공은 몸이나 아끼세요. 오늘 악수도 많이 해야 할 건데 화가님 손이 거칠면 쓰나요.”
“고맙다. 은희야.”
김은희가 싱긋 웃으며 눈을 흘겼다.
“공짜 아닌데. 전시회 끝나면 제대로 한턱 쏴야 해요.”
“당연하지. 네가 배불러서 그만 먹고 싶다고 할 때까지 사 줄게.”
“오케이! 접수. 이틀 전부터 굶고 기다리겠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며 미술관에 들어간 둘은 바로 전시실로 향했다.
“그동안 네가 많이 도와준 덕분에 오늘은 별로 할 게 없다.”
준비를 마치고 이중우가 전시장 입구를 바라보고 섰다.
“사람들이 많이 올까? 아무도 안 오면 어떡하지?”
“밀물처럼 밀려들어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초조한 듯 자꾸만 한숨을 내쉬는 이중우의 등을 세게 쳤다.
“윽! 야! 아파!!”
“긴장이나 풀어요. 첫 전시회 하는 늙은 초보 화가 티 내지 말고.”
김은희의 과 선배인 이중우.
그가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마 다른 사람이었다면 벌써 다른 직업을 찾아봤을 것이다.
그림에 대한 열정. 그것만큼은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곧,
“작가님, 축하해요.”
“인마, 중우야. 내가 너 성공할 줄 알았다.”
“그림이 너무 좋아요. 작가님.”
이중우의 걱정과 달리 전시회는 성공적이었다. 김은희의 말처럼 그는 사람들과 악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어느 때보다 환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중우. 김은희가 그를 보며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선배, 그동안 고생했어요. 이제 꽃길만 걸으세요.’
그때였다.
미술관 전체에 얕은 진동이 느껴졌다.
“어? 뭐야?”
“지금 흔들린 거 맞지?”
조금 더 강한 진동이 다시 한번 더 울렸다.
“꺄아악!”
“지진? 지진이야? 재난 문자 왔어!?”
연이은 흔들림에 사람들이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콰쾅!
머리가 울릴 정도의 굉음에 모두 귀를 막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미술관을 감싸고 있는 뒷산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미술관은 사방이 창으로 되어 있어 안에서 밖의 상황을 볼 수 있었다.
“어, 어……!”
사람들이 산 쪽으로 손가락질하며 소리쳤다. 흙먼지가 내려앉자, 커다랗게 뚫려 있는 구멍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달려 나오는 몬스터.
“던전이다! 던전 폭발이야!”
누군가가 소리쳤다. 순식간에 전시실 안은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누구랄 것도 없이 비명을 지르며 입구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던전 폭발의 진동으로 벽에 걸린 작품들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도망치기에 정신없는 사람들은 이중우의 그림을 마구 밟으며 뛰어나갔다.
“내 그림…….”
모든 것을 쏟아부은 자신의 작품들이 찢기고 밟혀 널브러졌다.
그동안의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 같아 이중우는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입구로 달려가는 사람들과 반대로 이중우는 전시실 안으로 뛰어갔다.
“선배!! 지금 어딜 가는 거예요! 미쳤어요!?”
이중우를 내버려 둘 수 없던 김은희가 그를 다급히 쫓아갔다.
이중우는 바닥에 떨어진 작품을 집어 들었다. 하지만 이미 수많은 발자국으로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그의 눈에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선배, 그건 나중에 와서 가져가요. 지금 빨리 도망가야 해요!”
“내 작품이……. 내 작품이…….”
지금 이중우의 귀에 그녀의 목소리가 들릴 리가 없었다. 김은희가 팔을 잡고 끌었지만, 이중우는 꼼짝하지 않고 그림만 부여잡고 있었다.
퍽-!
참다못한 김은희가 그의 옆구리를 후려갈겼다.
발끝에서 시작해 허리까지 완벽히 비튼 라이트 훅이었다.
“허읍!!”
짧지만 강한 통증에 순간 숨을 헉 들이킨 이중우를 향해 소리쳤다.
“새끼야! 여기서 죽을래? 정신 차려. 살아야 다시 그림도 그릴 거 아니야!!”
“그, 그래……. 일단 나가자!”
앙칼진 그녀의 목소리에 들고 있던 그림을 던지고 미술관 입구로 달려갔다.
“잠깐! 멈춰. 멈춰.”
미술관 입구가 바로 앞인데, 이중우가 팔을 들어 그녀를 막아 세웠다.
김은희의 팔을 잡고 기둥 뒤로 급하게 몸을 숨겼다.
“선배, 왜 안 나가고…….”
“쉿!”
손가락으로 조용히 하라는 제스처를 하고, 입구를 가리켰다.
몬스터는 언뜻 보면 인간처럼 보였지만 파충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리자드맨이었다.
벌써 산에서 내려온 두 마리가 입구로 도망치던 사람들을 잡아 뜯어 먹는 중이었다.
김은희가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양손으로 빠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리자드맨에게 산 채로 먹히고 있는 사람은 조금 전 전시실에서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던 관람객이었다.
“흐읍……!”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여기서 눈물은 도움 따위 되지 않는다를 걸 알기에 이빨을 꽉 깨물었다.
계단을 발견한 이중우가 그녀에게 윗층으로 올라가자는 손짓을 보냈다.
발소리를 죽여 조용히 계단을 올라갔지만.
“어디로 가지?”
2층에도 이미 리자드맨이 먹잇감을 찾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김은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 3층으로 가요. 3층에 도서관이 있어요.”
미술관 3층은 고객 쉼터로 이용되는 곳으로, 쉼터 맞은편에는 복도 형식의 좁고 긴 도서관이 있었다.
“입구가 하나밖에 없어요. 문만 잘 막으면 헌터들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을 거예요.”
김은희와 이중우가 도서관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다. 그들보다 먼저 도망쳐 온 사람들이 안쪽에 모여 벌벌 떨고 있었다.
모두 이중우의 첫 전시를 축하해 주기 위해 온 사람들이었다. 이중우는 그들을 보자, 죄책감이 밀려왔다.
‘오늘 전시회를 하지 않았으면 이런 일을 당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이 사람들을 살려야 해.’
한쪽으로 밀쳐진 철제 의자를 소리 나지 않게 조심히 들어 문 앞에 쌓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위해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김은희 역시 이중우를 따라 도서관 안 물건들을 옮겨 의자 사이에 끼워 넣었다.
덜컹-
낮은 책상을 밀던 김은희가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문 바깥에서 리자드맨 한 마리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김은희가 깜짝 놀라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꺄악!!”
리자드맨을 본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자, 흥분한 놈이 잡은 문을 더 세게 흔들기 시작했다.
김은희는 다리에 힘이 풀려 일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중우가 그녀를 끌어당겼다.
얇은 유리로 된 도서관 문은 주먹 한 방이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이다. 놈은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손잡이를 잡고 흔들기만 했다.
키키킥-
소름 끼치는 웃음을 내뱉으면서.
지금, 놈은 사람들의 공포를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비명이 줄어들자, 흥미를 잃은 듯 리자드맨이 손잡이를 놓았다.
쾅!
그대로 유리문을 쳤다.
한 방에 도서관 유리문이 부서져 내렸다.
“꺄아악!”
더 구석으로 몸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이 서로를 밀쳐 내기 시작했다. 이중우는 앞으로 나가 떨어진 의자 다리 한쪽을 집어 들었다.
도서관 안으로 어슬렁거리며 들어오는 리자드맨을 바라보며 섰다.
“선배, 뭐 하는 거예요!!”
이중우가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모두 내 전시회를 축하해 주러 오신 분들이야. 내가 지켜야지…….”
“지키긴 뭘 지켜요? 선배가 헌터예요!?”
“저놈하고 싸울 동안 헌터가 도착하길 바라야지. 죽어도 내가 죽는 게 맞아.”
고개를 돌리는 그의 표정이 한없이 서글퍼 보였다.
“도와줘서 고마웠다, 은희야. 배 터지게 밥 사 준다는 약속, 못 지켜서 미안하다.”
이중우가 의자 다리를 치켜들며 달려가자, 리자드맨은 비웃는 듯 킥킥거리는 소리를 내며 커다란 입을 쫙 벌렸다.
그런데,
팅-
뛰어가던 이중우의 몸이 무언가에 튕긴 것처럼 뒤로 밀려났다.
동시에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오던 리자드맨이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끼에엑-!
괴성에 고개를 돌려보니 도서관 창밖에서 양팔을 허우적대며 떨어지는 놈이 보였다.
“무슨…….”
눈앞에서 갑자기 몬스터가 사라지자, 도서관 안쪽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김은희만 제외하고.
이중우가 리자드맨을 향해 달려가는 순간. 김은희 눈에 이중우와 몬스터 사이에 나타난 희뿌연 인영이 보였다.
인영이 손을 휘두르자, 이상한 문양이 잔뜩 새겨진 막이 나타났다.
희미한 막에 이중우는 튕겼지만, 리자드맨은 그대로 막을 통과해 건물 바깥으로 떨어진 것이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은석처럼 뛰어난 귀안은 아니었지만, 김은희 역시 희미하게나마 영혼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었다.
도서관 안에서 오직 그녀의 눈에만 보이는 존재.
갑자기 귀신이 나타났다는 것보다, 그것이 자신들을 지켜 줬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그걸 알 리가 없는 이중우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이번에도 역시 보이지 않는 막이 그를 가로막았다.
“선배.”
김은희가 계속 보이지 않는 막을 통과하려는 그를 불렀다.
“근처에 헌터가 도착했나 봐요. 보호막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고 있는 것 같으니까, 이리로 들어와요. 선배.”
가로막고 있는 무언가를 의아해하던 이중우가 그녀의 말을 듣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우리 이제 안전한 거겠지……?”
덜덜 떨고 있는 손을 맞잡으며 한숨을 내쉬는 순간, 사람들의 비명이 작은 도서관 안에 울려 퍼졌다.
조금 전 떨어진 리자드맨의 괴성을 듣고 올라온 3마리가 도서관 안을 노려보고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