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어제도 잡았는데 두 마리쯤이야! 잡자!”
“그래! 죽이자! 우리에겐 천상의 힐러님이 계신다!”
누군가 소리치자, 자연스럽게 현기주의 이름이 터져 나왔다.
‘저놈의 천상의 힐러.’
은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용병들이 자연스럽게 두 무리로 나뉘어 전열을 갖췄다.
던전 경험이 많이 없는 젊은 용병들이라 요령도 없었다. 하지만 패기만큼은 S급 헌터 이상이었다.
크르렁-
가까이 다가온 삼각 코뿔소는 어제보다 더 큰 놈이었다.
“궁수! 쏴!”
단단한 가죽과 위협적인 세 개의 뿔.
가까이 다가가는 것은 위험했다. 먼저 활을 다루는 용병들이 앞으로 나섰다.
촤앗-
특수 제작한 활 덕분에 한꺼번에 수십 발의 화살이 빠르게 날아갔다.
물론 삼각 코뿔소의 가죽을 뚫기엔 역부족이었다.
“탱커!”
덩치 좋은 탱커들이 달려드는 삼각 코뿔소를 정면으로 막았다.
“으윽!”
세 명의 탱커 중 둘이 뒤로 날아갔다.
남은 한 명 역시 코뿔소의 어금니에 부딪혀 갈비뼈가 부러졌다.
“용병들이 이기기 힘든 몬스터다.”
“왜 이길 수가 없어요?”
은석의 혼잣말을 들은 윤지은이 물었다.
“삼각 코뿔소가 위협적이긴 하지만 방법만 알면 쉽게 이길 수 있지.”
“방법이 뭔데요?”
“서로 합을 맞춰야 해. 만약에 함께 훈련한 길드 소속 헌터였다면 다치는 사람이 이렇게 많이 생기지 않았을 거다.”
“오빠는 어떻게 그걸 알아요? 헌터가 된 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고 하던데.”
옆에서 듣고 있던 황희준이 가슴을 내밀며 나섰다.
“우리 은석 형님은 모르시는 것이 없어!”
“이 아저씨는 오빠 하인이에요?”
윤지은이 새초롬한 표정으로 황희준을 노려봤다.
“뭐?! 아, 아저씨? 아니! 이 아줌마가.”
“희준아.”
은석이 그의 이름을 부르자, 황희준이 입을 다물었다.
즉각 반응하는 그의 모습이 재미있는지 윤지은이 눈을 가늘게 뜨고 킥킥 웃었다.
그때, 용병 하나가 은석을 향해 달려왔다.
“이봐요! 어제 그 넝쿨은 어디 있습니까?”
“여기는 끈끈이 넝쿨이 없습니다.”
“뭐라고요? 아니, 같은 던전인데 왜 없어요? 가지고 있는데 숨기고 있는 거 아닙니까?
은석이 한숨을 내쉬었다.
“주변을 보세요. 넝쿨이 감겨 있을 만한 나무가 있는가.”
용병이 은석의 말대로 주변을 살폈다.
나무라고는 한 그루도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넓고 넓은 초원이었다.
“도망쳐!”
은석이 용병과 이야기를 나누는 잠깐 사이. 삼각 코뿔소에게 박혀 날아가는 용병들이 늘어났다.
“으아! 우린 전부 죽을 거야.”
패닉에 빠진 용병이 머리를 감싸 안으며 주저앉았다.
“나와라.”
은석이 어제 죽여서 귀속시킨 삼각 코뿔소를 소환했다.
정확한 형태는 보이지 않았지만 갑자기 검고 거대한 덩어리가 나타나자, 용병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와! 오빠, 소환수 짱이네요! 그런데 저거 혹시 코뿔소예요?”
윤지은이 눈치 빠르게 거대한 덩치를 보며 넘겨짚듯 물었다.
은석은 대답 대신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흠, 역시 라이징 스타라더니, 저런 소환수도 부리는구나…….”
“왼쪽 놈과 싸워.”
은석의 명령이 떨어지자, 콧바람을 내뿜으며 검은 코뿔소가 달려 나갔다.
파각-
두 마리가 정통으로 부딪치자 뿔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게 뭐야?”
갑자기 나타난 검은색의 커다란 덩어리. 용병 몇이 또 다른 몬스터가 나타난 줄 착각하고 무기를 휘둘렀다.
하지만 곧 그들이 아닌 삼각 코뿔소를 공격하는 모습에 뒤로 물러섰다.
낯선 형체와 삼각 코뿔소가 부딪치며 나는 소리는 섬뜩했다.
“저게 소환수라고? 스켈레톤도 아니고, 도대체 저게 뭐야?”
그 모습에 용병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제 검은 인영을 불러내 몬스터를 죽였던 은석을 찾았다.
그때 은석은 해머, 창왕과 함께 다른 쪽에서 달려오는 삼각 코뿔소를 향해 가고 있었다.
달리는 은석이 손을 뻗자 그의 손안에 귀검이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본 윤지은의 입이 떡 벌어졌다.
“헉! 뭐야? 인벤토리를 사용한다고? 구하기 힘든 아티팩트를? 저 오빠 알수록 대단한데.”
거기에 은석의 양옆에 서서 함께 달려가는 해머와 창왕의 검은 인영.
윤지은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퍼억-
먼저 도착한 해머가 삼각 코뿔소의 이마에 망치를 내려쳤다. 순간, 삼각 코뿔소의 앞다리가 반으로 접혔다가 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은석이 놈의 눈을 향해 귀검을 빠르게 휘둘렀다.
파앗!
날카로운 검 끝에 한쪽 눈이 베여 피가 터져 나왔다.
연속 공격에 휘청거리는 그 순간, 창왕이 미끄러지듯 놈의 아래로 들어가 창을 찔러 넣었다.
“예쓰!”
멀리서 은석의 사냥을 지켜보던 황희준과 윤지은이 양손을 불끈 쥐었다.
크아악-
은석의 검은 코뿔소는 싸우던 놈에게 몸통이 뚫리자 연기로 사라졌다.
검은 코뿔소를 없앤 놈이 거친 숨을 내쉬며 은석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그는 등을 돌린 채 막 죽인 삼각 코뿔소의 귀속을 명령하는 중이었다.
“조심해요!”
은석의 등을 향해 달려가는 삼각 코뿔소를 본 윤지은이 막아섰다.
삼각 코뿔소의 주둥이가 양팔을 교차시킨 채 서 있는 윤지은을 향해 부딪쳐 왔다.
“윽!”
놈의 질주를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신 윤지은이 뒤로 밀려나 바닥에 쓰러졌다.
어금니와 거친 주둥이에 강하게 부딪힌 마찰로 강화복의 팔 부분이 너덜거렸다.
팔의 피부가 쓸려 피가 맺히고 있었다.
황희준이 뛰어와 쓰러진 그녀를 안아서 옮겼다.
“고마워.”
아픈 양팔을 부여잡고 있던 윤지은이 생긋 웃어 보였다.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다친 윤지은이 안전한 곳으로 빠진 것을 확인한 후, 귀검을 아래로 내려쳤다.
“푸른 화염.”
화르륵-
그의 귀검은 평소에도 푸른 귀기가 흘러 신비로워 보였는데, 오늘은 더욱 강하고 푸른 불꽃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역시 고기는 구워야 제맛이지.”
콧김을 뿜어내는 삼각 코뿔소를 향해 푸른 화염이 일렁이는 귀검을 휘둘렀다.
푸른색의 화염이라 차가워 보였는지, 삼각 코뿔소는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은석이 픽 웃으며 주둥이를 향해 귀검을 강하게 내려쳤다.
가죽이 딱딱하고 질겨 한 번에 잘리지는 않았지만, 대신 짧은 털이 타는 냄새가 진동했다.
생각 못 한 뜨거움에 놀란 놈이 얼굴을 흔들며 뒤로 물러섰다.
빠르게 달려들어 다시 귀검을 휘둘렀다. 동시에 창왕이 창을 찔러 넣어 삼각 코뿔소의 목숨을 한 번에 끊어 버렸다.
[삼각 코뿔소를 처치하였습니다. 귀속하시겠습니까?]
[레벨이 올랐습니다.]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 * *
“저 사람은 누구야? 저렇게 잘 싸우는데 왜 용병이야?”
“나 알아. 동영상으로 봤어. 와, 영상보다 더 죽이는데.”
사냥이 끝난 후 은석에게 말을 걸고 싶은 용병들이 그의 주변을 서성였다.
은석은 그들을 신경 쓰지 않고 황희준의 해체 작업만 지켜보고 있었다.
삼각 코뿔소 두 마리 모두 은석이 잡았지만, 한 마리는 용병들이 가져갔다.
어제 일을 들먹이며 빼앗아 가다시피 했다.
가죽을 벗기려 했으나 마음먹은 대로 쉽게 되지 않는 듯 보였다.
반면 황희준은 어제보다 더욱 능숙하게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한 마리 해 봤다고 속도가 늘었네?”
“헤헤, 그렇게 보이십니까? 형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어째 싸울 때보다 더 신나 보였다.
“저기 미안한데, 우리도 좀…….”
삼각 코뿔소 한 마리를 우겨서 가져간 용병들이 다가왔다.
황희준의 작업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슬그머니 부탁했다.
“해체해 주면 뭘 줄 건데?”
“네?”
“이봐. 몬스터도 죽여 줘, 달라고 해서 한 마리 통으로 넘겨줬는데, 이제는 뭐? 해체 작업까지 해 달라고?”
용병들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삼각 코뿔소는 부패 속도가 빨랐다. 해체 작업을 서두르지 않으면 그대로 썩어서 버릴 수밖에 없었다.
“뭐, 뭘 드리면 됩니까?”
“마나석.”
용병들이 인상을 쓰며 은석을 쳐다봤다.
“마나석은 좀 심하지 않습니까?”
“내가 죽인 건데? 싫으면 말고.”
은석이 돌아서자 다급하게 외쳤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머지는 저희가 가지는 거, 맞지요?”
“가지든가 맘대로 하고. 희준아. 한 마리 더 잡아라.”
막 해체를 마친 황희준이 땀을 닦으며 일어섰다.
“넵! 형님.”
황희준이 두 번째 몬스터의 가죽을 벗기기 시작하자, 은석은 시신들을 모아 놓은 곳으로 움직였다.
늘 그렇듯 시신 주변에는 자신의 죽은 몸을 멍하게 들여다보는 영혼들이 모여 있었다.
“이봐.”
당연히 죽은 자신들을 부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자, 은석은 그들 곁으로 가까이 다가갔다.
“야.”
망자들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을 거는 은석의 등장에 다들 놀라 웅성거렸다.
“볼 수 있으니까 놀라지 말고 잘 들어. 딱 한 번만 이야기한다.”
수십의 망자들을 천천히 둘러봤다.
“던전 클리어하고 나갈 때 우리와 같이 나가야 한다. 만약에 못 나갈 경우, 영원히 이곳에 갇혀 있을 거다. 그러니까 잘 따라다녀. 어차피 너희들은 아무도 못 봐. 그러니까 정신 차리고 일행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해.”
용병의 숫자가 많았던 만큼 죽은 자의 수가 많았다.
지난번처럼 저들을 붙잡고 다닐 수 있는 다온도 없었다.
무엇보다, 이번 던전의 목표는 현기주이기 때문에 이들 모두를 챙길 수 없었다.
망자 하나가 슬그머니 손을 들었다.
“저기, 궁금한 게 있습니다.”
“말해.”
“제가 조금 전에 보니까 우리처럼 죽은 사람 같았는데 싸우던 헌터가 있더라고요.”
“어, 내 팀원이야.”
“갑자기 팍하고 어디선가 나타나시던데……. 그 말은, 다시 온 곳으로 갈 수 있는 거 아닙니까? 저희도 그분들이 계시는 곳에 같이 머물면 안 되는 겁니까? 우리도 죽었잖아요.”
당당하게 요구하는 망자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뻔뻔하군.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서 묻는 건가?”
은석의 대답에 망자가 발끈해 소리를 질렀다.
“죽은 사람 차별하는 겁니까? 왜 그 사람은 되고, 우린 안 되는 거요?”
그의 말에 몇몇 망자가 동의하는 듯 은석에게 삿대질을 했다.
잠시 그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은석.
“나와라.”
소환 해제 했던 해머와 창왕을 불렀다.
그들이 살아 있었다면 희뿌연 검은 인영으로 보였겠지만.
지금 그들 눈앞에 서 있는 것은 검은 오라를 뿜어내고 있는 위풍당당한 헌터들이었다.
“싸워서 이겨 봐. 그럼 내가 업어서 던전을 빠져나가 주지.”
은석의 말에 해머와 창왕이 그들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너희를 이기시는 분이 계시면 편안하게 모셔 와라.”
은석은 망자들에게 파이팅을 외치며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두 번째 해체를 마친 황희준이 은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 했냐?”
“네, 형님. 계속하니까 정말 스킬이 느는 것 같습니다.”
황희준이 두 개의 마나석을 은석에게 내밀었다.
그중에 하나만 집어 아공간에 넣었다.
“하나는 네 꺼다.”
은석의 말에 황희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가, 이걸 가져도 됩니까? 형님?”
“충분히 되지. 삼각 코뿔소 세 마리를 완벽하게 해체했는데.”
감격한 듯 황희준이 코를 훌쩍였다.
“윤지은은 어디 있어?”
은석은 미리 황희준에게 치료실로 보내지 말라고 말해 두었다.
그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큰 바위를 가리켰다.
“저기로 옮겨 놨습니다.”
“알았다. 나머지 정리하고 따라와.”
도착해서 보니 윤지은은 양팔을 붙잡고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
‘여길 먼저 올 걸 그랬나. 미안하네.’
몸을 잔뜩 웅크린 채 누워 있는 윤지은의 옆에 앉았다.
“괜찮아?”
“그럼요. 탱커에게 이런 고통쯤은, 으윽!”
쓸린 상처에서 진물이 흘러나왔다.
은석이 손을 내밀어 윤지은의 양팔을 잡았다.
“아! 아파요.”
“조금만 참아.”
그의 손에서 따뜻한 생력이 흘러나오자 누런 진물과 피딱지, 상처가 서서히 사라졌다.
기분 좋은 따뜻함에 윤지은이 눈을 감았다.
“탱커 맞네. 그렇게 세게 부딪혔는데도 뼈는 멀쩡한 걸 보면.”
은석의 말에 대답하기도 전에 그대로 잠이 들어 버렸다.
어느새 다가온 황희준이 뭐라고 말을 하려고 하자, 은석이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은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황희준에게 말했다.
“혼자 두기는 위험하니까 깨어날 때까지 네가 여기에 있어라.”
“알겠습니다. 그런데 형님은 어디 가십니까?”
치료실이라고 만들어 놓은 천막을 쳐다보며 눈빛을 반짝였다.
“다친 사람들이 많잖아. 우리 천상의 힐러님 혼자서는 힘드실 테니 가서 도와드려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