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은석의 옆에 얌전히 자리 잡은 황희준.
“너 레이드 처음이지?”
황희준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D급이면 길드에도 들어갈 수 있을 텐데 왜 인스턴트 던전에 들어온 거야?”
황희준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제, 제가 D급이라고 말씀드렸던가요?”
그가 은석의 눈에만 보이는,
[황희준, 22세, D급 헌터]
라고 뜨는 정보창을 알 리가 없었다.
“말했어. 등산로에서 처음 만났을 때.”
“아, 그렇구나.”
그의 말에 금방 수긍하는 순진한 모습에 은석이 픽 웃었다.
“그러니까, 이렇게 위험한 곳을 왜 온 거냐고.”
황희준이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기자가 꿈이라…….”
예상하지 못한 그의 대답에 은석은 헛웃음이 났다.
기자가 꿈이라 던전에 들어가 본 적도 없는 초보 각성자가 인스턴트 던전에 들어왔다고?
“여기는 들어오고 싶다고 아무나 지원할 수 있는 곳이 아닌데.”
은석의 말에 황희준이 머뭇거렸다.
‘나는 지금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해커라는 나의 정체를 밝히고 형님의 줄에 서느냐, 아니면 적당히 둘러대고 던전을 나갈 때까지만 이 남자를 이용하느냐.’
미간을 찌푸리며 일생일대의 심각한 고민에 빠진 황희준.
그를 보며 은석이 한마디 툭 던졌다.
“첫 인스턴트 던전 출입 동기니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 시신만은 꼭 던전 밖으로 가지고 나가 줄게.”
“제가 해커입니다.”
은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빠르게 대답했다.
시신이라는 말을 들은 황희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해커?”
“제 입으로 말하기 그렇지만, 제가 좀 실력 있는 해커입니다.”
“해킹으로 인스턴트 던전에 들어올 수 있었다고?”
“범죄 경력 때문에 길드나 각성자 협회의 용병으로 일할 수 없는 사람이나 큰돈이 필요한 헌터들이 많습니다. 그들이 찾는 곳이 바로 인스턴트 던전이고요.”
“여길 용병으로 지원할 수 있는 사이트가 있다는 말이지.”
“네, 절차가 까다로워 아무나 지원할 수는 없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뛰어난 해킹 실력으로 손쉽게 가입과 지원을 할 수 있었고요”
‘하! 이상균 새끼, 직접 지원할 수 있는 사이트가 있다는 걸 그동안 숨겨왔다 이거지.’
은석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걸리적거리는 짐 같던 황희준이 그 순간, 소중한 아이템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실력 있는 해커였다니, 대단한데.”
은석의 칭찬에 황희준의 어깨가 으쓱였다.
“소중한 인재가 이런 곳에서 죽으면 안 되지. 걱정 마. 내가 넌 꼭 살려서 나간다.”
은석의 말에 황희준이 감격한 듯 눈을 반짝였다.
저녁 식사를 가져오겠다며 멀어지는 황희준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만약 죽더라도 사이트 가입 방법은 알아낸 다음에 저승에 보내줄게.’
* * *
어제와 다른 분위기의 고요한 밤이 찾아왔다.
헌터들의 한숨이 한동안 이어졌다.
은석과 한 팀이 되었다는 안도감 때문인지 황희준은 어제보다 더 편하게 잠들었다.
팔짱을 낀 채 어두운 던전 안을 노려보고 있는 은석.
그의 앞에 희미한 인영이 나타났다.
“뭐야?”
은석에게 손이 잘린 망자였다.
가까이에서 보니 덩치가 무척 컸다.
오른쪽 관자놀이에 구멍이 뚫려 있었고, 그 안에서 흘러내린 피가 얼굴의 반을 뒤덮어 말라붙었다.
[망자 이가(家), 30세, A급 헌터]
남자는 아무 말 없이 은석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은석 역시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역시 너는 보통 인간이 아니구나. 나를 보고 놀라지 않는다니.”
풉-
은석이 어이없는 웃음을 뱉었다.
“무슨 개소리야.”
“나는 이문성이라고 한다. 헌터다.”
“그래서? 어쩌라고.”
짧은 은석의 대답.
다음 대화를 이어 갈 방법이 없어져 이문성은 난감했다.
귀신인 자신을 보고도 놀라기는커녕, 왜 그의 앞에 나타났는지 궁금해하지도 않는다니.
“내가 왜 네 앞에 나타났는지 궁금…….”
“아니, 안 궁금해. 꺼져.”
이문성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은석은 할 말만 하고 눈을 감았다.
은석의 무관심한 태도에 굳게 다문 입술에 힘을 주었다.
“고블린을 조종하는 주술사가 어디 숨어 있는지 안다.”
이문성의 말에 은석이 천천히 눈을 떴다.
고블린 마을을 지나야 주술사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고블린의 수가 많았고 문제는 죽지 않고 계속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은석 혼자만의 힘으로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어디 있는데?”
이문성이 기다린 대답이 나왔다.
“그냥 알려 줄 수는 없지.”
“그럼 말고.”
다시 눈을 감는 은석. 이문성의 얼굴에 황당함이 스쳤다.
“보스를 죽여야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다. 제한된 시간 안에 클리어하지 못하면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다.”
“알아.”
“그런데도 알고 싶지 않다고?”
은석이 다시 눈을 떠 이문성을 바라봤다.
“너는 이미 죽었으니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도 상관없잖아.”
“너는 살아 있지 않느냐.”
“나도 상관없어.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거든. 브레이크가 일어나서 몬스터가 나가든지 말든지.”
은석의 말에 이문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는 헌터가 아니냐. 헌터는 사람들을 몬스터에게서 구해야 할 의무가…….”
“그러는 너는? 헌터라면서. 그런데 조건을 걸어 보스 위치를 알려 주는 건 괜찮고?”
이문성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자신을 볼 수 있는 인간을 만나 이문성은 기뻤다.
사라진 왼손 따위 아무렇지도 않았다.
드디어 그의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사랑받고 자란 티를 팍팍 풍기는 곱상한 외모의 이십 대 중반의 남자.
각성한 기쁨에 어린 치기로 인스턴트 던전에 들어왔겠지. 보스의 위치를 알기 위해 자신의 제안을 냉큼 받아들일 것이다.
이문성이 은석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자꾸 조건을 붙일 거면 사라져. 내일 싸우려면 자 둬야 하니까. 나는 잠을 안 자도 피곤하지 않은 귀신이 아니거든.”
이문성이 오른손으로 얼굴을 마구 비볐다.
“알려 주지. 그런데…….”
“그런데?”
“부탁이 있다.”
“또 조건이 붙네.”
이문성이 손사래를 쳤다.
“조건이 아니다. 이건 부탁이다. 날 위한 것이 아니라, 아내를 위한 부탁이다.”
조금 전과 다른 이문성의 태도와 눈빛.
은석이 자세를 바로잡아 똑바로 앉으며, 그에게도 앉으라는 듯 자신의 앞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이문성이 은석의 앞에 앉았다.
“아내를 위한 부탁이라니, 일단 알았어. 그런데 보스부터 죽이고 난 다음에 듣도록 하지.”
순간 이문성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답답한 쪽은 자신이었다.
“주술사는 어디 숨었지?”
“고블린 주술사는 마을을 지나 작은 토굴 안에 있다.”
이문성이 손가락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그건 이미 알고 있어. 문제는 거기에 가는 게 힘들다는 거지.”
“마을 중간쯤 오른쪽으로 빠지는 작은 숲길이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을 수 없다. 그 길이 토굴로 가는 지름길이다.”
“마을에서 고블린과 싸우는 도중에 빠져나가야겠군.”
은석의 말에 이문성이 대답했다.
“힘들 것이다. 네가 죽인 고블린은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고 해도 다른 인간들은 그렇지 않으니.”
은석이 이문성의 등에 메고 있는 무기를 가리켰다.
“그거 당신 무기야? 해머?”
“그렇다. 강한 마력을 담고 있어 몬스터를 터트리기에 좋은 무기지. 지금은 없지만…….”
죽은 자는 물건을 잡을 수 없다. 그의 해머 역시 이문성이 만들어 낸 허상일 뿐이었다.
휘두를 수는 있지만,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연기와 같은 물건.
은석이 이문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해 멀뚱히 보고만 있던 이문성.
“잘린 손목.”
은석의 말에 왼손이 사라진 팔을 내밀었다. 은석이 깔끔하게 잘린 이문성의 손목을 양손으로 잡았다.
화-악!
은석의 손에서 새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빛은 그대로 이문성의 손목 안으로 스며들었다.
[생력을 전달합니다.]
“이, 이게…….”
잘려 나갔던 그의 손이, 은석의 손에서 다시 생겨났다.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장면.
이문성이 눈을 크게 뜨고 은석을 바라봤다.
“나 힐러야. 몰랐어?”
* * *
해가 떴지만 쉽게 공격을 시작하지 못했다.
보다 못한 헌터 몇 명이 백훈섭에게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대장! 뭐라도 해야 할 거 아닙니까? 이대로 있다가 던전 브레이크라도 나면 책임질 거요?”
김호철이 아무 말 없는 백훈섭의 곁으로 다가갔다.
“대장, 일단 기습을 하시죠. 팔다리 다 베면 제깟 놈들이 어떻게 일어나서 물어뜯겠습니까. 공격이 최선 아니겠습니까?”
헌터들이 그의 말에 동조하듯 함성을 질렀다.
그때, 김호철이 백훈섭에게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제가 좀비들을 조종하는 보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고블린을 막아 주시면 제가 가서 보스를 죽이고 아이템을 가져오겠습니다.”
김호철의 말에 백훈섭이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훈섭이 일어나 헌터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고블린과 보스를 죽여 버립시다!”
고블린 마을로 향하는 헌터들의 뒤를 은석과 황희준이 따라갔다.
김호철이 힐끗 고개를 돌려 은석을 쳐다봤다.
그는 어젯밤 은석이 이문성과 나눈 이야기의 일부를 엿들었었다.
누구와 이야기하는지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분명 주술사라는 말이 들렸다.
‘저 새끼가 보스의 위치를 알고 있어.’
오늘 김호철의 목표는 고블린이 아니라 은석이었다.
마을 입구에 도착하자, 모두 자리를 잡고 공격 명령만 기다렸다.
“희준아.”
“네, 형님.”
“너는 내가 지정한 장소를 벗어나면 안 된다. 달려드는 고블린만 죽이고, 알겠지?”
황희준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고블린에게서 도망치지 않겠습니다. 첫 던전이지만 저도 각성한 헌터입니다. 몬스터에게 등을 보이고 도망친다는 것은 헌터의 수치이자…….”
혼자 또 멋대로 소설을 쓰는 황희준.
그의 모습에 은석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돌려 이문성을 쳐다봤다.
“해머 줘 봐.”
이문성이 빠르게 해머를 내밀었다.
이미 은석의 능력을 경험한 터라 그의 말에 물음표를 달 이유가 없었다.
이문성이 내민 해머를 잡아 생력을 주입한 뒤 다시 돌려줬다.
해머 손잡이를 잡은 이문성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살아 있을 때 해머를 잡았던 느낌과 같았다.
“오늘은 충분히 싸울 수 있을 거야. 내 옆에서 싸우다가 내가 숲길로 빠지고 나면 저 녀석을 지켜 줘.”
무슨 다짐을 하는지 하늘을 향해 주먹을 치켜올리고 있는 황희준을 가리켰다.
그리고 헌터 무리를 향해 턱짓했다.
“조금 전부터 날 계속 힐끗거리는 걸 보니 김호철이 날 따라올 것 같아.”
김호철이라는 말에 이문성의 얼굴이 분노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어이, 어이. 악귀로 변하지 마. 그럼 나도 어쩔 수 없어.”
은석의 경고에 이문성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네가 저 새끼한테 원한이 있는 건 아니까 죽이지는 않을게. 그러니 황희준 잘 지켜라. 아주 중요한 놈이야.”
은석의 말에 해머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 * *
“도대체 저렇게 많은 고블린을 혼자서 어떻게 죽이는 거야?”
베고 잘라도 다시 일어나는 고블린 몇 마리에 끙끙대는 그들과 달리, 은석의 주변에는 고블린의 사체가 쌓여 갔다.
은석의 검에 영혼이 소멸하는 고블린과 이문성이 해머로 터트리는 고블린.
그들 눈에 이문성이 보이지 않으니 더욱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은석을 노려보는 김호철.
‘낡아 보이는 건 눈속임이고, 사실은 엄청난 무기였구나! 역시 탐난단 말이지. 아무리 봐도.’
김호철의 눈에 은석은 어떻게 봐도 보잘것없어 보이는 놈이었다.
무기 하나로 설쳐대는 꼴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은석은 고블린들과 싸우면서 주술사의 토굴로 이어지는 숲길 근처에 도착했다.
숲길이 있다는 걸 알고 봐도 나무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고블린과 싸우기에 급급했으니 이걸 발견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문성이 고블린의 머리를 해머로 날리며 말했다.
“저기다. 저 길로 가면 토굴이 보인다.”
은석이 이문성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싸우고 있는 헌터들을 한번 살펴본 후 빠르게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은석의 예상대로 김호철이 그의 뒤를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