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7 최후의 결전 (4)
입자화의 힘이 약해지며 어느 정도의 차원력과 신성을 머금은 공격이 통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놈을 처치할 수 있을까? 소멸에 이르는 타격을 줄 수 있을까?
로칸은 냉정하게 판단했다.
가능성은 있다. 당장 타격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놈을 위태로운 상황까지 몰고 갔던 초극이라면, 어떻게든 놈을 끝장 낼 수 있는 확률이 분명히 존재했다.
‘모자라.’
하지만 확률일 뿐이었다. 그것도 극히 낮은 확률.
로칸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단지 그것을 믿고 일을 벌이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컸다.
보다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다.
‘돌겠군.’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마신과 정령 신이 놈의 힘을 일부 정화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될까? 시간만 끌면 저절로 약화되고 안정화가 될까?
쉽지 않을 터였다.
지금 카이륜은 천신의 세계까지 갖게 되지 않았나?
공허의 힘을 잃었지만 그것이 꼭 약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시간이 지날수록 놈은 더 강해질 수 있었고, 그때가 되면 초극을 사용하더라도 아주 작은 희망조차 보이지 않게 될 수 있었다.
‘힘, 힘이 더 필요해.’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것도 단시간에.
천신처럼 그의 세계에 접속을 해 볼까? 강림이든 현신이든 해서 카이륜의 세계 속에 들어가 날뛰어 볼까?
아니다. 그것은 자신도 감당하기 힘들었다.
세계 속에서 카이륜은 더 강해질 수 있었고, 최악의 경우 바알제불까지 그의 세계로 돌아가 2 대 1의 싸움을 벌여야 할 수 있었다.
광풍이 따라 들어오겠지만 지금 그는 바알제불이 한눈을 팔지 못하게 도발하고 버텨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가장 좋은 것은 바알제불이 세계를 다시 파괴하기 전, 더욱 강력한 일격을 날려 카이륜을 끝장내는 것이었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해.’
로칸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죽으라는 법은 없을 테니 뭔가 방법이 있을 터였다.
퀘스트로 그 방법을 누가 알려 주면 좋겠지만 그것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원기옥이라도 있었으면……?’
순간 우습게도 만화에 나오던 기술이 떠올랐다.
‘지구인들아, 내게 힘을 줘!’라고 외치며 모두의 힘을 십시일반으로 모아 초월적인 힘을 내는 기술이.
‘가만?’
그때, 로칸이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런 것이라면 자신도 가지고 있지 않던가?
절대자의 힘.
자신이 군림하는 세계의 모든 존재로부터 힘을 받는 기술.
그리하여 힘을 증폭시키는 기술 덕분에, 신들과 그들의 세계에서 지금도 힘을 받고 있었다. 599레벨을 달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 그에 동조하지 않은 존재들이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해 보는 수밖에.”
로칸은 즉시 신성을 발현했다.
차원 문을 열고, ‘그들’에게 메시지를 전했다.
[나는 폭력과 파괴의 신 로칸이다. 신들의 수호자이며 지상과 천상의 주신이다.]
신계와 어떤 세계에 자신의 목소리를 전달했다.
“끼익?”
그들 중에는 그의 말을 알아듣는 놈들도 있었고, 그렇지 못한 이들도 있었다.
오직 본능만이 남아 움직이는 존재들.
끝없이 파멸로 달려가고 있기에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이들이 뇌리를 파고드는 음성에 고개를 돌렸다.
[많은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내게 복속되어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이름을 주고 살 수 있는 세계의 문을 열어 주겠다.]
“믿지 마!”
“저 가증스러운 신들을 믿을 셈이냐!”
그 말에 반발이 먼저 밀려왔다.
오랫동안 그들과 대치하고 공허라는 세계 속에 가두어 온 신들의 말을 호락호락 믿어 줄 리 만무했다.
“이름을…… 주겠다고?”
“살 수…… 있어?”
“어차피 이대로라면 모두…….”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동료애도, 서로에 대한 믿음이나 우정 따위도 없었으니까.
오히려 철저한 이기주의만이 있었다.
각자가 소멸을 면하기 위해 발악하고 투쟁해 왔을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로칸의 제안은 아주 매력적인 것일 수밖에 없었다.
일부가 혹하며 귀를 기울였고, 일부는 귀를 닫았다.
[세계 : 명부마도.]
그때 로칸이 자신의 세계를 개방했다.
말뿐이 아니라는 듯 공허의 존재, 공허의 신들에게 자신의 세계를 내비쳤다.
그리고 그 속에서 증거가, 가베라와 카루타를 비롯한 하위 신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전은 언제든지 허락한다. 승리하면 자유와 자치권을 얻을 것이다. 도전하지 않아도, 복속되면 존재를 인정받을 것이다. 선택해라! 기회는 지금뿐이다.]
로칸이 하는 일은 매우 위험한 것이었다. 자신의 세계를 모든 존재들에게 드러냈으니까.
침공을 받을 수도 있었고, 공허의 존재들을 이만큼 동시에 받아들인다면 정화할 새도 없이 그 또한 공허에 물들어 버릴 수 있었다.
도박과 같은 일이었지만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카이륜을 어찌할 수 없을 테니까.
“으으으으…….”
“난…… 가겠어. 어차피 기다리는 것이 망각과 소멸뿐이라면……!”
그의 단호한 음성에 가장 밑바닥에 있던 공허의 존재들부터 반응을 보였다.
어차피 그들이 신들을 쓰러뜨리기는 어려운 일이었고, 쓰러뜨린다 해도 그들이 남긴 신성과 세계를 쪼개 먹다 보면 제 앞으로 떨어지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것으로는 다시 세계를 구축하기는커녕 소멸을 조금 유예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니 마지막 기회라 생각하며 로칸에게 투신했다.
그가 열어 놓은 세계 속으로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멍청한 놈들! 너희는 속는 거다! 이제 조금만 있으면 신계가 우리 손에 떨어지거늘……!”
공허충부터 하급 신, 중급 신 수준의 공허의 신들까지 투신이 이어졌지만 상급 신 이상의 수준을 가진 놈들은 좀체 넘어오지 않았다.
저급한 공허의 존재 수백, 수천보다 그들 하나의 힘이 더 강력하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정도로는 카이륜에게 비벼 보기 힘들다.
초극을 사용해 놈을 끝장낼 수 있는 확률이 조금은 올라갔겠지만 아직도 낮은 수준에 불과했다.
그래서 로칸은 한 가지 수작을 더 부렸다.
[너희가 믿고 있는 이름 없는 자들의 왕, 카이륜은 이미 세계를 가졌다. 목표를 이룬 그가 계속해서 너희를 보호할까?]
정치질.
그것은 게임의 필수 요소이기도 했다.
게임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그것이 결정타였다.
말뿐이 아니라 차원 문 너머로 세계를 획득하고 다시 신위를 획득 중인 카이륜의 모습을 비쳐 주자 공허의 신들이, 공허의 군주들이 크게 술렁거렸다.
진짜였으니까.
카이륜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는 환상 따위로 조작할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그들의 마음도 요동쳤다.
정말 그렇다면, 카이륜이 세계를 얻고 신위를 되찾는다면 그때도 공허의 존재들을 위해 싸워 줄까?
혹여 다시 신들에게로 돌아서며 역으로 공허의 신들을 없애려 들지 않을까?
그의 힘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존재들일수록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만약 지금의 신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더라도 적어도 ‘신계’는 유지하려고 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좋은 전개는 그가 함께 했던 공허의 군주들을 위해 최상위 신들을 몽땅 잡아 죽이고 그들의 신성을 자신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지만, 과연 그렇게 하려고 할까?
끔찍한 생각이 모두의 뇌리를 스쳤다.
[10초 주겠다. 투신하면 기회를 얻겠지만 아니라면…….]
약간의 여운을 남기며 로칸이 최종 발언을 마쳤다.
그와 함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천천히, 로칸의 세계 : 명부마도로 향하는 게이트가 닫히기 시작한 것이다.
마음먹는다면 1초도 걸리지 않아 들어갈 수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초조해졌다.
주변에서 빠르게 사라져 가는 존재들을 보며 몸이 달았다.
이미 절반이 넘는 공허의 존재들이 빨려 들어간 만큼 물량으로 승부를 보기에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강력한 공허의 신들이 많이 남은 것도 아니었다.
이미 카이륜이 없으면 공허 측의 패배는 확실 되는 상황.
“에잇!”
결국, 공허의 군주들 중 하나가 세계 : 명부마도에 투신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힘의 상당 부분이 소실되겠지만 소멸되는 것보다는 낫다.
게다가 그 세계에서 지배종을 키워 내거나, 강림 따위로 세상을 주물럭거릴 수만 있게 된다면 세상을 찬탈하고 다시 신위를 얻는 것도 가능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차라리 먼저 투신해서 조금이라도 일찍 자리를 잡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됐다.’
뭐든 시작이 중요한 법이다.
한 놈이 투신하자 나머지도 눈치를 보며 몸을 던졌고, 결국 남아 있던 모든 공허의 군주들마저 세계 : 명부마도에 투신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렇다고 공허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공허는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었으니까.
설사 공허의 신, 공허의 존재들이 모두 사라지고 신들이 공허를 완벽히 정화한다 해도 공허는 다시 언젠가, 어딘가에서 탄생할 터였다.
“절대자의 힘.”
10초의 카운트다운이 끝나고, 모든 공허의 존재를 자신의 안에 품은 로칸이 다시 한번 힘을 일으켰다.
지상과 천상.
신들과 그들 세계의 주민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공허의 존재들이 가진 힘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일시적이지만 신을 초월한 힘을 손에 넣었다.
“안 돼!”
그 힘의 증폭을, 카이륜의 변화를 뒤늦게 파악한 바알제불이 광풍을 떨쳐 내었다. 그의 소멸은 자신의 소멸과도 이어지니까.
카이륜을 보호하고, 그의 세계로 돌아가 다시 세계를 파멸시킴으로써 공허의 힘을 유지하게 만들기 위해 득달같이 로칸에게 달려들었다.
“어딜!”
광풍이 피칠갑을 한 채로 그런 놈의 앞을 가로막았다.
카이륜이 행동을 정지함에 따라 공간 능력의 사용 제한이 풀렸기에 즉시 이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입자화!”
하지만 무수한 입자로 변하는 바알제불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모래폭풍처럼 변해 그를 넘어 이동하려 들었고, 광풍은 한 가지 힘을 자신에게 발현하였다.
자신의 피에서 절반을 차지하는 거인의 그것을 움직여 거신으로 변화했다.
“후우우웁!”
터업!
그리고 놈을 집어삼켰다.
단순한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먹어 치운 것이다.
입을 크게 벌려 놈을 구성하는 입자들을 모조리 욱여넣었다.
막을 수는 없지만 짧은 순간 가두어 두는 것은 가능했다.
전신 모공 등을 통해 빠져나오려고 들었지만 광풍은 그 상태로 공간을 이동해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남은 것은 로칸과 카이륜.
신위를 회복하고 어느 정도 세계가 안정되어 가는 카이륜이 마침 눈을 떴지만 방어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로칸의 배틀 액스가 그의 눈앞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초극.”
모든 세계, 모든 존재.
아니, 더 로드의 모든 것이 담긴 일격이 놈을 꿰뚫었다.
그의 세계에 투신한 공허의 신들이 발하는 공허의 기운과 신성, 마나가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풀어 올랐지만 로칸은 광전사였다.
과도한 힘이 생명력을 갉아먹어도 버텨 낼 수 있었다.
“이, 입자…….”
카이륜이 급히 입자화를 시도했지만 그 또한 의미가 없었다.
입자든 그 무엇이든 소멸시키는 힘이었으니까.
고오오오오오오오.
로칸의 배틀 액스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신계의 수호자이자 공허의 왕이었던 카이륜에게 종말을 선고했다.
초극이 일으킨 소멸의 블랙홀이 모든 것을 무(無)로 돌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