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6 삼위일체 (3)
공허의 군단.
공허의 군주들의 지휘를 받아 움직이는 그들의 물량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신계의 신들 전부를 합친 수보다도 3~4배는 족히 많았고, 그들의 멸망한 세계에서 튀어나온 반신 또는 신급의 존재들까지 억울하게 오염되어 분노를 드높였다.
자신의 이름을 되찾기 위해, 세계를 얻어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신계의 땅을 범하고 하늘을 찢어 놓으며 전진해 나갔다.
간간이 원거리에서 신성 포격을 가하고 도망치는 신들도 있었지만 그 숫자는 크게 줄지 않았다.
게릴라전을 펼치는 신들이 약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신계와 그 안의 존재들을 범할 때마다 새로운 공허의 존재들이 탄생하는 까닭이었다.
“막아라!”
“죽여!”
“저놈만 먹어 치우면 이름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런 가운데, 공허의 군단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주는 것은 최상위 신들과 휘하 상위 신들로 꾸려진 별동대뿐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거창하게 날뛰는 것은 단연 광풍이었다.
마신과 단둘이 파티를 이룬 그는 마신처럼 막대한 피해 범위를 가진 광역기를 따로 갖고 있지 않음에도 가장 많은 공허의 신들을 도륙하고 있는 것이다.
반신이나 하위 신급의 존재는 그의 근처에 다가가는 것만으로 몸이 터져 나갔고, 그나마 버틸 수 있는 중급 신급의 존재들은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
상위 신들이 저항해 보지만 그들 역시 잠깐 시간을 끄는 것이 고작.
그러나 아예 히트 앤드 런을 전략으로 삼은 광풍은 그들이 공허의 군주들을 불러올 시간 자체를 내어 주지 않았다.
자신을 막아선 이들을 무참히 학살한 뒤 홀연히 사라지기를 반복하며 나타날 때마다 수십 수백 존재들을 가뿐히 소멸시키고 있었다.
자신이 어째서 학살의 신이라 불리는 지를 체감하게 만들어 주었다.
‘쉽지 않군.’
그러나 무자비한 학살을 벌인 당사자의 표정은 썩 좋지 못했다. 적의 전력을 확실히 약화시키고 있지만 그 수가 너무나 많은 것이다.
놈들은 광풍을 당해 낼 수 없다는 것을 파악하자마자 전략을 바꾸어 그를 아예 상대하지 않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고, 공허의 군주들이 전후좌우로 자리를 잡으며 광풍을 붙잡아 두기 위한 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제아무리 광풍이라도 공허의 군주를 단시간에 끝장내는 것은 무리였기에 하나가 발목을 잡으면 다른 공허의 군주들이 합세하는 식으로 대응한 것이다.
물론 그사이 마신을 비롯한 다른 신들의 공격이 곳곳에서 일어났지만 그들은 무시했다.
위협이 되는 것은 오직 광풍뿐이라는 듯, 그 하나만을 노리고 모든 공허의 군주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그 탓에 광풍의 운신의 폭도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장기인 학살을 자행하는 대신, 공격의 범위를 넓혀 단숨에 타격을 주고 빠져나오는 방식으로밖에 전투를 치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전선은 밀려났고, 공허의 군단은 삼위일체의 결계 앞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가라! 제 것을 지키는 것에만 눈이 멀어 있는 놈들에게 우리의 분노를 보여 주어라! 너희의 희생은 신계의 멸망으로 보상받을 것이다!”
“미친놈들.”
닿는 순간 육신이 파열되며 녹아내리는 삼위일체의 결계, 그 신성의 울타리를 향해 공허의 군단이 밀려들었다.
닿는 순간 소멸해 버리는 절대의 결계를 향해 이성을 잃은 놈들이 초개처럼 목숨을 던지며 몸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한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지상의 천상의 존재들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은 대의와 명분, 신념을 위해 목숨을 곧잘 던지곤 하니까.
하지만 다시 이름을 얻고 세계를 얻어 신위를 회복하기 위해 투쟁하는 공허의 존재들이 제 목숨을 바친다? 아이러니가 따로 없었다.
아무리 신계의 파멸을 염원한다 해도 그들은 상명하복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들끼리도 투쟁하며 서로가 남기는 세계의 찌꺼기를 먹어 존재를 유지하려는 놈들이기 때문에 제아무리 복수심에 불탄다 해도 저처럼 단체로 목숨을 던지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 조작인가.”
그렇기에 예상할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공허의 군주들 중 누군가 중급 신 이하 수준의 존재들을 세뇌하고 조종하여 목숨을 바치게 하고 있다는 것.
누구일지 충분히 예상이 되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것이 아니다.
놈들이 꾸역꾸역 몸을 던지자 소멸까지 견디는 시간이 점점 줄고 있는 것이다.
그래 봤자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이 같은 러시가 계속될 경우, 몇 마리쯤이라도 지나갈 수 있는 틈이 생길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삼위일체의 결계가 가지는 연결성이 끊어질 테고, 다시 특이점을 조작해 연결 작업을 진행시키지 않는다면 결계는 깨어진 채로 방치되게 된다.
“그래. 차라리 이게 낫군. 어디 한번 걸판지게 놀아 보자!”
그 순간 광풍이 자신의 힘을 드러냈다.
히트 앤드 런? 효율적인 전투? 사실 그런 것은 그에게 있어 맞지 않는 옷과 같았다.
모든 것을 잊고, 자신마저 잊어버린 채 전투와 광기에 몸을 내맡기는 무아지경의 학살. 그것이 그의 정체성이고 전투 스타일이었으니까.
광풍은 더 망설이지 않고 달려 나갔다.
삼위일체의 결계를 뚫어 내려는 공허의 존재들을 들이받고 배틀 액스를 휘두르며 학살을 시작했다.
“이제 더 도망칠 곳이 없는 모양이구나!”
“이곳에 네 무덤이 될 것이다.”
“네가 자랑하는 세계의 강자들을 모두 죽지 못해 사는 노예로 만들어 주마!”
그의 등장과 함께 공허의 군단에서도 군주들이 튀어나왔다.
이미 열에서 여덟으로 줄어든 숫자였고, 그중 일부는 상처를 회복하는 중이었지만 자신감이 넘쳤다.
광풍을 혼자 상대하지 않을 테니까.
8 대 1의 승부.
곧 다른 최상급 신들이 달려올 테지만 상대는 공허의 군주들이었다.
하나하나 떼어 놓고 보더라도 쉽지 않고 둘 이상이 뭉치면 제아무리 광풍이라 해도 상대하기 버거울 것으로 여겨지는 존재들.
그런 자들을 앞에 두고도 광풍은 미소를 지었다.
여덟 군주가 동시에 발하는 공허의 신성에 벌써부터 근육이 부들부들 떨려 왔지만 이 정도라면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오래전, 카이스만에게 덤볐을 때 느꼈던 압박감에 비하면 이 정도는 동네 불량배 수준에 불과하니까.
“흐흐흐흐, 네놈의 몸뚱이를 갈기갈기 찢어 줄 날이 드디어 왔구나!”
“뭐래는 거야, 병신이? 덤벼!”
공허의 신성을 발하는 여덟 군주를 향해 광풍이 먼저 짓쳐 들었다.
수많은 강자를 꺾어 온 자신의 신성을, 역사를 일으키며 놈들에게 배틀 액스를 휘둘렀다.
***
“광풍!”
로칸이 도착했을 때, 광풍은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채 간신히 서 있었다. 동시에 삼위일체의 결계 근처로 누구도 접근하지 못하도록 지키고 있었다.
단신으로 공허의 군주 여덟을 상대하는 것은 물론, 다른 공허의 존재들조차 삼위일체의 결계 근처로 접근하지 못하게 홀로 막아 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장판교의 장비와도 같은 모습.
그 악귀 같은 모습에 뒤늦게 도착한 아군까지 흠칫 놀랐다.
“치유의 빛!”
하지만 그것도 잠시, 온갖 치유의 힘이 그의 휘감았다.
공허에 당한 상처를 신성을 이용한 치유 효과에도 쉬이 낫지 않았지만 그가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리게 해 주는 효과는 있을 터였다.
“이런 지긋지긋한…….”
그 위용에 여덟 군주조차도 학을 떼었다.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 광풍을 끝장내려 들었지만 실패한 것이다. 심지어 그가 삼위일체의 결계 밖으로 몸을 피한 적이 없음에도.
비록 여덟 군주들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가하지 못하긴 했지만 그들 역시 광풍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그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알 수 있었지만 광풍은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약간의 힘을 되찾자마자 배틀 액스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키며 어깨를 당당히 폈다.
“흐흐흐, 늦었구나. 준비는 됐나?”
“따라오실 수 있겠습니까?”
씨익.
로칸도 그의 옆에 서며 미소를 지었다.
말릴 생각 따윈 이미 없었다. 말린다고 들어 먹을 인간도 아니었고 설사 힘이 빠졌다 해도 신계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광풍이기 때문이다.
“애송이가 많이 컸군. 이왕 노는 거 제대로 놀아 볼까? 잠깐 저놈들을 부탁하지.”
로칸의 도발에 광풍이 마주 웃었다.
재차 여덟 군주를 향해 달려드는 대신, 방향을 바꾸어 공허의 존재들을 향해 쏘아졌다.
“피해라!”
그의 돌발 행동에 여덟 군주들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고작해야 전력에 큰 도움이 안 되는 놈들일 텐데 어째서일까.
삼위일체의 결계에 몸을 던질 놈들의 숫자가 부족해질까 봐? 아니다. 놈들을 베어 내는 순간, 광풍의 몸에 새로운 힘이 깃들었기 때문이었다.
“못 들었냐? 네놈들은 이쪽이다!”
콰앙!
학살의 신이 가지는 고유 신성.
그것이 가지는 능력은 자신이 학살한 존재의 힘을 몸 위에 덧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로칸이 폭력의 시간을 통해 자신의 세계에서 발생하는 파멸의 힘을 분출해 내듯, 그는 자신이 학살한 존재에게서 나오는 파멸의 힘을 흡수하는 대신 소모형으로 덧입는 것이 가능했다.
따라서 학살한 존재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힘이 강해졌고, 그것을 막지 못한다면 이론적으로 무한히 강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을 막기 위해 여덟 군주들이 서둘러 손을 써 보지만 로칸이 튀어나가 대신 막아 냈다.
“로칸과 광풍을 지원하세요!”
나머지 최상위 신들이 그들을 지원하며 공허의 군주들을 압박해 나갔다.
“이러면 숫자가 좀 맞지?”
콰앙 쾅 쾅 쾅!
아무리 로칸이라도, 폭력의 시간을 발동시킨다 해도 그들 여덟을 동시에 상대하는 것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천신, 마신, 정령 신을 비롯한 다른 최상위 신들이 제대로 힘을 쓰기 시작하자 모두가 로칸에게 공격을 집중시킬 수 없었다.
이제 로칸 역시 다른 최상위 신만큼이나 위험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피해를 감수하며 제거하기에는 도사리고 있는 위험이 너무 큰 것이다.
덕분에 여덟 군주는 뿔뿔이 흩어져 그들을 상대했다.
공허의 존재들을 움직여 광풍과 최상위 신들을 무시하고 삼위일체의 결계를 파괴하도록 지시를 내리고 저들은 각자 상성에 맞는 최상위 신들을 맞아 전투를 개시했다.
광풍이 점점 힘을 불리고 있는 것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그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을 만큼 상황이 급박해졌다.
“카이!”
쿠화아아아아아아.
로칸 역시 그중 한 놈을 마주했다. 교감을 이용해 사용한 엘리멘탈 브레스를 쏘아 인사를 나누었다.
“감히 이런 아류 따위를……!”
“……!”
상급 신들에게도 상당한 타격을 주던 엘리멘탈 브레스가 반으로 갈라졌다. 그 탓에 주변에 있던 공허의 존재들이 된서리를 맞았지만 놈은 신경 쓰지 않았다.
로칸에게, 카이에게 분노하며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드러냈다.
“쿠와아아아아앙!”
“드래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던 녀석이 드래곤의 형상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최강의 종족이라 불리는 드래곤.
그중에서도 신의 반열에 올랐으나 공허의 군주가 되어 버린 녀석이 노성을 토하자 저릿한 감각과 함께 새로운 적들이 떠올랐다.
형형색색의 드래곤들.
공허에 얼룩져 있긴 하지만 놈들은 분명 각 속성의 드래곤들이었다.
그것도 500레벨이 넘어 신급의 힘을 지닌.
“드래곤이라니…….”
순간 로칸이 표정이 변했다.
설마하니 공허의 군주 중 드래곤이 있을 줄이야? 게다가 그 휘하 드래곤들까지 동시에 자신을 노릴 줄이야?
“꿀 좀 빨겠군.”
로칸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기쁨과 기대, 그리고 사악함이었다.
[타이틀 ‘드래곤 슬레이어’의 효과가 발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