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0 신들의 도시 (12)
“이건 또 뭐지?”
난데없이 거대 세계라니? 이건 광풍이나 천신에게도 듣지 못했던 일이 아닌가?
세계의 잠재력이라는 것이 각기 다르다는 것은 들어 알고 있지만 이 변화는 다소 의외였다.
시스템이 이렇게 반응을 할 정도라면 그저 땅덩어리가 넓어졌다는 의미만은 아닐 테니까.
로칸은 얼른 자신의 세계를 들여다보았다.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변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제법 오랜 시간을 들여다보았지만 외관상으로 딱히 달라 보이는 부분은 없다. 때문에 로칸은 아예 세계의 구성을 하나하나 뜯어보기 시작했다.
땅덩어리가 더 넓어지고, 세 개 세계의 국가들이 대립하고, 새로운 종족들이 탄생한 것, 그리고 다시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는 것 이외에 별다른 변화는 찾지 못했다.
어쩐지 꺼림칙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공허의 흔적 또한 찾지 못했고.
때문에 로칸이 할 수 있는 것은 일단 갑자기 세계가 확장되며 혼란스러울 이들을 케어하는 것이었다.
‘퀘스트를 내려야겠지.’
할 수 있는 것부터 한다. 확장된 세계를 다시 안정화시키기 위해서는 일단 퀘스트를 내려 그들을 움직일 필요가 있었다.
[퀘스트 폭력의 왕을 생성하셨습니다.]
폭력의 왕.
단 한 명만이 왕좌에 앉을 수 있는 대전쟁의 퀘스트를 발동한 것이다.
일차적인 목표는 세 개 대륙을 완전히 일통한 진정한 왕이 되는 것이지만 최종적인 목표는 더 로드의 캐치프레이즈와 같다.
영원불멸의 절대자가 되는 것.
현재 세 개 세계의 최강자들과 그 수하들은 모두 반신급의 존재일 따름이지만 이 퀘스트를 거치며 비로소 완전한 존재, 즉 신격을 획득할 수 있으리라.
로칸은 원한다면 자신의 신성을 나누어 줄 의향도 있었다.
조건이 같을지는 모르지만 이제 1백억 정도의 신성은 헌혈하듯 언제든 뽑아내 줄 수 있는 수준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 계획만 제대로 먹힌다면.’
게다가 계획대로만 이루어진다면 앞으로 더 많은 양의 신성을 벌어들일 수 있을 터였다.
따라서 로칸은 서로를 폭력으로 굴복시키는 대전쟁을 일으켰다. 누가 승자가 되든 반대 세력을 완벽히 궤멸시키지는 않을 테니 양패구상만 아니라면 세계가 멸망하는 일은 없을 테고, 결국은 더 강하고 탄탄한 신성을 획득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시간 가속이 있으니 어쩌면 순식간에 결판이 날지도 모르겠군.’
그리고 그 결판까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을 직감했다.
이미 나름대로 상당한 성숙을 이룬 세계들이니까.
어쩌면 로칸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끝장이 날 수도 있었다.
‘역시 내 새끼들답군.’
실제로 그의 세계에서는 벌써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가 퀘스트를 내리기도 했고, 시간 가속을 최대로 해 둔 덕분에 벌써 국지전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의외로 악귀천하에 소속되어 있던 이들이었다.
악귀와 악마들의 세계에서 버텨 낸 역전의 용사들이기 때문인지 그들은 저돌적으로 백귀야행의 세계를 침공했고, 정신력만큼은 그 어떤 세계보다 강력한 백귀야행의 주민들은 결사항쟁을 시작했다.
아니, 역습까지 시도하기 시작했다.
개개인의 무력 면에서는 백귀야행 쪽이 약간 밀렸지만 정신력과 단결력은 그들 이상인 까닭에 거의 백중지세다.
‘이놈들은 뭐 하는 거지?’
그사이 정작 로칸이 만든 충추 세계인 명부마도는 은근히 조용했다.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로칸조차 무엇을 꾸미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은밀히 무언가를 하고 있는 것이다.
‘뭔가 있긴 있는데, 세계를 창조한 나조차 알 수 없는 일이라니…….’
이럴 수도 있는 건가? 하긴, 뭐든 뜻대로 된다면 공허의 존재가 나타날 이유가 없겠지.
로칸은 조급해하지 않고 그들을 주시했다.
백귀야행과 악귀천하가 맞붙으며 서로를 갉아먹고, 상대의 신성을 잡아먹으며 스스로를 강화하는 것을 보면서도 명부마도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설마 어부지리를? 흠, 그럴 것 같진 않은데…….’
가장 유력한 것은 역시 어부지리를 취하는 것이다.
두 세계가 양패구상을 하거나 어느 정도 전력 소모가 되었을 때 나타나 둘을 한꺼번에 집어삼키는 것.
그러나 로칸은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을 닮은 이들이라면, 또 폭력의 왕이라는 이름을 물려받을 이들이라면 고작 그런 것으로 만족할 리 없다. 그래서는 안 된다.
힘이 다해 쓰러진 이들을 제압한다면 그 누가 그들에게 마음에서부터 굴복을 하겠나?
그들 역시 로칸의 성향을 물려받았으니 당장은 몰라도 언제든 쿠데타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미심쩍은 눈초리를 지우지 못하고 있을 때, 명부마도 세계의 수도에서 강력한 마나 반응이 일어났다.
마도제국을 흡수한 증거를 보이듯 대륙이 진동할 정도의 무시무시한 대마법을 발현한 것이다.
대규모 전이 마법.
전투를 기다리며 평원을 빼곡 메운 병사와 기사들에게 그 마법이 사용되었다.
우우우우우우웅! 파앗!
수백만의 병력이 일시에 이동했다.
백귀야행과 악귀천하. 그 두 세계의 주민들이 격전을 벌이고 있는 중간 지대로.
“모두 꿇어앉혀라!”
가장 선두에 선 명부마도의 왕이 마나를 가득 담아 소리를 질렀다.
백귀야행? 악귀천하?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는 뜻이다.
아니, 그 둘을 동시에 상대하겠다는 뜻을 명확히 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
짐승 같은 함성 소리와 함께 각 세계의 전사들이 기세를 높였다.
단 한 번의 일전.
이 대결을 통해 모든 것이 결판이 날 터였다.
다분히 로칸을 닮은 세계의 주민들다운 결정이었다.
마침 각 세계의 힘이 이곳에 집중된 상태였고, 설령 이곳의 병력이 모두 전멸한다 해도 한동안 저항할 여력은 있겠지만 사실상 여기서 결판이 난다고 보는 것이 옳을 터였다.
‘재미있군.’
로칸은 가만히 걸으며 그 전투를 지켜보았다.
각 세계의 전사들은 저마다의 색이 있었다.
먼저 악귀천하는 수라도를 걸어온 이들인 만큼 개인 역량이 출중했다. 대인전의 스페셜리스트라고나 할까.
그 누구와 싸워도 밀리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발군의 전투력을 자랑했다.
백귀야행도 만만치 않다.
유령들에게 오랜 세월 고통 받아 온 이들인 만큼 강인한 정신력으로 한계 이상을 뛰어넘는 힘과 단결력을 보여 주었다.
주로 버티는 느낌이 강했지만 한순간 반격을 가해 적들의 숨통을 끊어 놓았다.
마지막 명부마도는…….
‘전천후라고나 할까?’
그 모든 것들을 갖추었다.
악귀천하나 백귀야행의 전사들보다 못한 부분도 있지만 모든 것을 갖춘 것은 물론, 폭력과 지배의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가장 멸시받던 종족에서 지상과 천상의 지배 종족으로 군림하게 된 폭력과 정복의 역사가 그들의 몸에서 체현되었다.
로칸의 주력 권능이라 할 수 있는 폭력의 신, 절대자의 힘을 가장 잘 활용할 수 있는 이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다만 문제는 그들이 2 대 1의 전투를 기꺼이 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2 대 1의 전투를 벌이기에 충분한 수의 병력을 데리고 오기도 했지만 그들에게는 후속 병력이랄 수 있는 것이 없었으니까.
전투의 결과는 끝까지 모를 일이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아……!”
그리고 마침내, 결판이 났다.
세계의 완전한 통일은 아니지만 대전쟁의 승자가 결정된 것이다.
“역시 내 새끼들이군.”
씨익.
로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최후의 승자는 다름 아닌 로칸의 오리지널 세계, 명부마도였으니까.
그들이 2 대 1이라는 역경을 딛고, 아니 역경이랄 것도 없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것이다.
크고 작은 부상이 있긴 했지만 전력의 70%가량이 살아남았으니 이 정도면 압승이라 할 만하다.
그 압도적인 무력에 백귀야행과 악귀천하의 패잔병들도 질린 표정을 지었다.
자신들 역시 투쟁의 역사를 딛고 일어나 남부럽지 않은 힘을 가졌다고 생각했는데 저들은 어떤 역사를 가진 것인지 자신들을 찍어 누르다시피 한 것이다.
아직 완전히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이미 마음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마음속에 공포심이 깃든 순간, 이 전쟁의 끝이 이미 보인다고 이야기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로칸이었기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이제 시간문제겠군.”
혹시나 서로 상잔하며 멸망의 수순을 밟으면 어쩌나 언제든 개입할 준비를 하고 있던 로칸이 드디어 마음을 놓았다.
이대로 두기만 해도 전쟁이 알아서 잘 끝날 것 같았다.
공허의 개입만 아니라면.
때문에 신성을 발휘해 자신 대신 공허를 감시할 눈을 하나 만들어 두었다.
공허가 등장하거나 낌새라도 드러내면 언제든 알아차리고 개입할 수 있도록.
“흠, 여기는…….”
다시 고개를 들어 본래의 육신으로 돌아오자 낯선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를 관찰하는 동안 계속해서 걷다 보니 공허의 경계와 신들의 도시 사이 어딘가까지 이동한 것이다.
생기를 가득 머금은 나무들이 느껴졌고 이제는 익숙한 원소의 기운들이 눈에 보였다.
“그렇군.”
그제야 어디인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대충 이쯤에 정령과 엘프들의 도시가 있다고 했던 것 같다.
신위를 얻은 신들의 도시이기는 하지만 그 종족 특성상 도시보다 숲에 가까운 장소.
그리고 이곳에는 로칸과 제법 우호적인 신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정령 신이라……. 한번 만나 보고 갈까?”
마음에 여유를 찾은 로칸은 잠시 발길을 돌렸다.
사실 신들의 도시야 언제든 카이를 소환하면 단시간에 이동할 수 있고, 여차하면 신성을 투입해 공간 이동을 해 볼 수도 있었기에 급할 것이 없었다.
그가 세워 둔 계획도 딱히 시간에 구애받지 않을뿐더러, 오히려 시간이 조금 필요한 일이었으니까.
“누구냐!”
그렇게 숲의 안쪽으로 접근하자 누군가 그를 막아섰다.
[상급 엘프 신 에르힌][Lv 578]
무려 578레벨이나 되는 엘프의 종족 신 중 하나였다.
‘이런.’
정령들을 먼저 만났다면 편했을 텐데, 하필 엘프 신을 마주치다니 운이 없었다.
당장 그가 엿을 먹인 것은 트롤 신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놈도 고자질을 했으려나?’
만약 놈이 고자질을 했다면 트롤 신들처럼 엘프 신들도 자신을 적대할 수 있었기에 로칸은 살짝 긴장하며 자신을 드러냈다.
폭력과 파괴의 신성을 감지한 상대가 살짝 표정을 굳혔지만 그를 똑바로 마주하며 당당히 입을 열었다.
“폭력과 파괴의 신 로칸입니다. 정령 신님을 만나러 왔는데, 여기가 아닌가요?”
“……정령 신님을?”
그러자 놈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정령과 엘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니까.
아니, 오히려 엘프 신보다 정령 신이 살짝 우위에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엘프들은 정령들에게 기생하는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힘의 상당 부분이 정령에게서 나오는 것이니 당연한 일이다.
“약속을…….”
[이쪽으로 오세요.]
에르힌이 살짝 못 미더운 얼굴을 지으려 할 때, 정령 신의 음성이 또렷이 들려왔다.
로칸에게만 들려온 소리는 아닌지 녀석의 표정이 움찔 떨렸고 곧 환한 빛이 일어났다. 로칸이 찾기 쉽도록 길이 열렸다.
“따라와라.”
이렇게 되자 마냥 경계할 수도 없다.
로칸은 혼자 가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지만 에르힌은 굳이 앞장을 서서 걸어갔고, 빛의 길을 따라가자 곧 정령 신을 만날 수 있었다.
‘엥?’
다만, 그 모습이 예상과는 무척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