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6 신들의 도시 (8)
[폭력과 파괴의 신 로칸은 하급 트롤 신 크로무슈에게 전치 3개월의 상해를 입혔음이 확인되어 아래와 같은 벌을 내린다.]
[폭력과 파괴의 신 로칸은 지금 즉시 공허의 경계로 이동해 168시간 동안 공허의 존재들을 처단하여 신계의 안전에 이바지하라.]
“젠장, 진짜 고자질했네.”
아직 할 일이 좀 더 남아 있었는데 하필 이 타이밍에 신들의 도시를 떠나야 하다니.
자존심이 강한 놈인 것 같길래 안심했는데 꽤 소심한 놈이었던 모양이다. 바로 고자질한 것도 아니고 일주일이 넘은 이제야 고자질을 하다니.
로칸은 혀를 찼고, 그런 그를 찾아 동지가 나타났다.
“여어.”
방금 전까지도 어디선가 전투를 치르고 왔는지 지저분해진 상태로 씨익 미소를 짓는 광풍.
그러고 보니 자신의 판결 전, 광풍이 먼저 판결을 받았었다.
“너 트롤 신 한 놈 쥐어 팼다며? 크큭, 역시 너라면 그럴 줄 알았다니까.”
하지만 광풍은 제 판결 따위는 아무래도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도시에 틀어박혀 뭔가를 한다더니 신성이 제법 올랐는데? 흐흐, 나중에 한판 붙는 거다?”
“어차피 같은 곳으로 가는 거면 거기서 붙어 볼까요?”
로칸과의 대결에 흥미를 느끼는 녀석이 로칸도 싫지 않았다. 그와의 대결은 자신에게도 배움이 되니까.
아예 바로 날을 잡자고 이야기하자 어쩐 일인지 광풍이 고개를 저었다.
“나도 그러고 싶은데 그건 좀 어려워. 이제 슬슬 힘 조절이 안 될 것 같거든.”
자칫 죽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의미이다.
물론 로칸이야 죽어도 다시 되살아나니 상관없긴 하지만 반대로 자신이 광풍을 죽이기라도 하면 문제가 생긴다. 그는 부활할 수 없으니까.
그리고 광풍은 꼭 부활이 가능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 때문에 망설였다.
“혹시나 널 죽이면 저 영감탱이가 날 가만두지 않을 테고. 방문자들은 부활이 가능하다고 이야기를 했는데도 영 말이 통하지 않는단 말이야.”
“시끄럽다, 이놈아! 말썽을 피운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말썽 피울 궁리만 하는 게냐! 이번엔 아주 트롤 신들의 집성촌을 아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더구나, 쯧쯧. 언제쯤이나 철이 들는지…….”
“흐흐흐, 영감. 내가 철드는 날은 아마 내가 죽는 날뿐일 거요.”
그때 신들의 수호자라는 카이스만이 나타나 광풍에게 핀잔을 주었다.
‘트롤 신들의 집성촌을?’
그리고 그 말에 로칸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트롤 신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을 털었다고? 대체 왜?
‘혹시…….’
혹 자신과 연관이 있는 일일까?
의문을 가질 새도 없이 카이스만이 말을 덧붙였다.
“로칸이라고 했나? 어째 자네도 저 녀석과 비슷한 성향인 것 같은데, 절대 저 녀석과 똑같아지지만 말게. 골치가 아프게 만드는 것은 저 녀석 하나로 족하니까. 이번에야 크로캄이 먼저 시비를 걸었다는 것이 확인되긴 했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 벌이 가중될 수밖에 없어. 이번 일도 그렇고 저 녀석이 자네를 특히 아끼는 것 같으니 자네가 문제를 일으키면 저놈도 덩달아 문제를 일으킬 것 같으니 자중 좀 해 주게.”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카이스만이 사라졌다.
다시 둘만 남은 로칸과 광풍. 로칸은 입을 열어 한 가지 사실을 확인했다.
“이번에 벌을 받으신 게 저랑 관련 있는 겁니까?”
“아, 그거? 흐흐, 너무 신경 쓰지 마. 나도 그놈들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거든. 애들 싸움에 대가리 큰 놈들이 끼려고 하길래 적당히 타일러 준 것뿐이야. 그보다 이번 일 끝내고 다시 돌아오면 한판 붙는 거다?”
그는 별것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지만 대충 상황을 파악 할 수 있었다.
하급 트롤 신인 크로무슈의 일에 중급 트롤 신인 크로캄이 끼어들었듯, 크로캄을 두들겨 팬 것에 분노한 트롤 신 중 누군가가 로칸에게 대신 복수를 하려 하자 광풍이 달려가 몽땅 두들겨 팬 것 같았다.
정확한 것은 상황을 파악해 보아야 하겠지만 아마도 확실하겠지.
광풍이 인정한 ‘같은 부류’인 로칸은 그들과 붙어 보지 못한 게 살짝 아쉽다는 생각마저 하긴 했지만 광풍에게 감사를 표했다.
어쨌든 자신을 위해 나서 준 것 아닌가? ‘벌이 아니라 업계 포상’이라고 주장하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자신보다 큰 벌을 받기도 했고.
“그럼 어떻게 붙어 볼 수 있는 겁니까? 여기나 거기나 별 다른 건 없을 텐데요.”
“아, 그거? 방법이 없진 않지. 신들의 전장이라는 걸 이용하면 돼. 거기라면 죽어도 부활이 가능하고, 적당히 서로 신성을 모은 채 정해진 장소에서 만나면 마음껏 신성을 써 가며 놀아 볼 수 있거든.”
“아?”
그 말에 로칸도 이해가 되었다. AOS 게임과 비슷한 신들의 전장이라는 것이 있다고 했었지.
5 대 5만 되는 줄 알았는데 일대일도 가능한 모양이었다.
거기에서 서로 적당히 신성을 획득한 뒤 한 장소 또는 라인에서 만나면 그의 말처럼 신명나게 어울려 볼 수 있겠지.
게임의 형식인 만큼 죽어도 다시 부활할 수 있어 몇 번이고 겨뤄 보는 것도 가능할 터였다.
초기 게임 생성에 필요한 신성만 지불하면 그다음부터는 별도의 신성 소모가 없다고 하니 신성을 아낄 수 있는 방법이기도 했고.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좋아, 좋아. 그럼 공허의 벌레들을 때려잡으러 가 볼까?”
그 호쾌한 대답에 광풍도 만족했다.
“공허의 틈은 어떻게 가는 겁니까?”
“아, 그거? 간단해. 경계 지역으로 이동을 하면 되는데 신성을 써서 이동할 수도 있지만……. 그냥 버티고 있으면 알아서 이동시켜 주거든.”
“알아서요?”
“어. 카이스만 영감이 강제 집행으로 전송시켜 버리지. 얼른 시간을 채우고 돌아와서 할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내 신성 들여 가며 일찍 갈 필요는 없잖아?”
하긴, 판결문에서는 즉시 이동하라고 했지만 즉시 이동하지 않을 경우의 상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에 따른 페널티가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에 시간이 추가되거나 하는 건 아닐까 생각을 했는데 아예 강제 전송을 시켜 버리는 모양.
그렇다면 광풍의 말처럼 굳이 일부러 스스로 찾아갈 필요는 없어 보였다.
‘노가리나 좀 까다 가지 뭐.’
그 명확한 해답에 로칸이 씨익 미소를 지으며 공허의 경계로 이동하기 전, 광풍에게 궁금하던 것들을 몇 가지 물어보았다.
“한데 저분은 얼마나 강한 겁니까? 광풍 님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 같던데요.”
“누구? 아, 카이스만 영감? 흠, 나도 제대로 붙어 보지는 않아서 모르겠는데 이 신계에서 가장 오래된 영감이니 엄청나게 강하긴 하겠지?”
그 대답은 다소 의외였다. 광풍이라면 무턱대고 한판 붙어 보자 나왔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제대로 붙어 본 적이 없다고?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광풍이 혀를 차며 말을 덧붙였다.
“제길. 나도 붙어 보고 싶었는데 상대를 안 해 주더라고. 가까이 가면 냅다 신계의 어딘가로 날려 버리는데 나라고 별수 있나. 다만 내가 공간 이동에 저항하지 못한 걸로 봐서 힘에 적잖은 차이가 있다고 봐야겠지.”
카이스만이 공간 계열에 특화된 능력을 지녔을 수도 있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었다.
신들의 수호자라는 거창한 이명을 가졌기에 강할 것 같다 생각하긴 했지만 그 정도일 줄이야.
그때 문득 다른 것도 궁금해졌다.
“광풍 님께서는 이 신계 내에서 어느 정도로 강한 겁니까?”
바로 광풍의 수준이다. 자신이 중급 트롤 신 크로캄을 가뿐히 쥐어 팼듯이 신성의 양, 레벨만으로는 판단하기 어려운 세계다 보니 궁금해진 것이다.
단신으로 트롤 신들의 집성촌을 털고 다닐 정도이니 상당히 강한 편이라는 것은 알겠는데 굳이 순위를 매기자면 몇 위 정도나 되는 것일까?
“흐음, 대결을 피하는 놈들도 있고, 아직 만나 보지 못한 놈들도 있어서 딱히 순위를 매기기는 어렵지만 열 손가락 안에는 들 것 같은데?”
“열 명이나요?”
막상 그의 입에서 대략의 랭킹을 듣고 나니 놀라웠다.
사실 광풍이라면 당연히 ‘내가 다 이기지.’ 하고 대답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카이스만이야 그렇다 치고, 그 외에도 광풍과 비벼 볼 만한 강자가 최소 여덟은 더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과연 자신은 몇 위쯤이나 될까?
당장 보유한 신성의 양이 부족해서라도 높은 순위를 받기는 어렵겠지만 묘한 호승심이 생겼다.
신계에 랭킹 시스템 같은 것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고 광풍이 이야기한 열 명의 신들과 한판 붙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헛소리 계속할 거면 냉큼 꺼지거라!]
그때, 로칸과 광풍의 귀에 카이스만의 신언이 들려왔다.
그와 동시에 몸이 붕 뜨는 느낌이 드는가 싶더니 어디론가 전송되었다.
“여기가……?”
“공허의 경계이지. 정확히는 공허와 신계를 나누는 접경 지역이라고나 할까?”
그들이 이동한 곳은 하나의 도시였다.
아직까지 신계에서 도시라고는 신들의 도시 하나만을 구경해 보았을 뿐인 로칸이기에 눈이 동그래져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광풍은 익숙한 듯 터벅터벅 걸어 나갔다.
“이쪽이야.”
로칸을 불러 간단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간단해. 이곳을 지키며 경계를 넘어오는 공허의 존재들을 잡아 죽이든가.”
“든가?”
“아니면 공허로 넘어가서 깽판을 치는 거지.”
씨익.
악동 같은 미소를 짓는 그를 보자니 그가 어느 쪽을 택할지는 명확해 보였다.
‘아마도 후자겠지.’
물론 자신도 그쪽이 편하다. 궁금하기도 했고.
이미 공허의 영역에 한 번 발을 디뎌 본 그가 아니던가?
그때는 비약을 써서 자신을 감추긴 했지만 신격을 획득한 지금은 어떨까? 맛있는 냄새를 풀풀 풍기는 먹잇감이 되어 공허의 존재들을 꼬여 낼까?
그때 보았던 반신급의 존재들이 아니라 신급의 존재들도 나타날까?
은근히 기대가 되었다.
스스로의 무력에 자신이 있기도 했지만 광풍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겠지.
물론 그도 날뛰다 보면 공허 안에서 흩어질 수도 있지만 일단은.
“한데 여기 있는 신들은 다 벌을 받은 겁니까?”
“아, 이놈들? 뭐, 그런 경우도 있고 아닌 경우도 있고.”
“……?”
“우리처럼 전투가 좋아서 있는 놈들도 있고, 저놈들을 잡아서 연구를 해 보겠다는 놈들도 있고, 신성 앵벌이 하려고 온 놈들도 있고. 놈들에게서 공허의 힘을 추출하면 정화해서 쓸 수 있거든. 효율은 낮지만 쌈박질도 하고, 신성도 얻을 수 있으니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
“오? 신성을 말입니까?”
이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공허의 존재들에게서 신성을 얻을 수 있다니? 오히려 놈들을 사냥하면 공허의 힘을 품게 되는 것이 아니었나?
하긴, 그렇다면 신과 공허의 싸움에서 무조건 공허가 유리해지겠지.
그럼 자신이 품었던 공허의 힘도 정화하여 사용할 수 있을까? 모아 보면 제법 될 것 같은데.
로칸이 살짝 기대를 품고 이야기하자 광풍이 뭘 생각하는지 알겠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근데 그건 막 추출한 힘만 가능해. 이미 흡수되어 버린 것은 정화하기 어렵지. 저 공허의 기운이라는 게, 어지간해서는 신들에게 흡수가 안 되거든. 자신의 세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르니 사전에 차단을 해 버리니까.”
“아…….”
너무 일찍 공허를 흡수한 까닭일까, 로칸은 공허의 기운을 차단하는 법을 알지 못했다.
알았다 한들 반신의 수준에서 가능한 일인지도 알 수 없었지만.
“그럼 이미 얻은 건 어떻게 합니까? 아시다시피 제가 공허의 기운을 좀 가지고 있는데요. 어디에 틀어박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흐흐흐, 그러니까 넌 운이 좋은 거야. 공허의 기운이라면 나도 제법 흡수해 본 적이 있거든. 다 방법이 있지.”
낙담하는 로칸에게 광풍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자신만의 노하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