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6 타락의 반격 (1)
[타이틀 ‘공허를 품은 자’ 효과로 공허의 신성을 온전히 흡수합니다.]
[당신의 신성 안에 이질적인 신성의 기운이 자리를 잡습니다.]
이번에도 타이틀 효과 덕분에 무사히 타락을, 공허를 흡수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냥 안심할 수 없다는 것은 로칸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이 힘이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유력한 것은 역시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아직은 명부마도나 다른 세계에서 어떠한 징후도 감지되고 있지 않지만 언젠가, 무슨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은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다.
‘가능하면 신계로 가기 전에 마무리를 짓는 편이 좋긴 할 텐데…….’
마음 같아서는 이왕 맞을 매, 일찍 맞고 끝내고픈 생각이었지만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보니 지켜보는 것밖에는 당장 방법이 없다.
“어쨌든 이 정도면 경고가 되었겠지.”
숨을 고르고 신성을 가다듬은 로칸은 곧장 환마계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도망친 환수들을 쫓는다거나 말살하고자 하는 뜻은 없다. 환수들의 경우 이미 새로운 클래스를 만들어 낼 정도로 유저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도 하고, 이대로 유지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의미가 있었기에 굳이 없애기보다 소유권만 빼앗아 오는 쪽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환마계의 통일을 이루었을 때, 천상의 모든 종족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겠지.
복종이냐, 죽음이냐.
그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는 일이 더 쉬워질 터였다.
“정령계라…….”
그것은 굳이 로칸이 나서서 선전을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기에, 멸망한 환마계와 유명계에 인접한 정령계를 먼저 찾았다.
이미 로칸과는 관계가 좋은 이들이기도 했기에 굳이 이들에게는 복종을 요구할 생각까진 없었다.
애초에 호전적인 종족들도 아니고, 로칸이 자연의 순리에 역행하지만 않는다면 오히려 지지를 보내 줄 이들이었으니 동맹이면 족하다.
로칸이 카이를 소환해 함께 정령계로 들어가자 곧 안에서 화답을 해 왔다.
“기다리고 있었어!”
정령들이 그들의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까르륵거리더니 다섯 대정령들이 모인 장소로 인도한 것이다.
“왔군요.”
본래 정령계 곳곳에 자리를 잡고 수호하던 정령들이지만 주변의 위협이 사라져서인지 아니면 로칸이 온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인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소식은 들으셨겠죠?”
“물론이에요. 먼저 신위를 얻으신 것을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천상을 통일하려고 하신다고요.”
“맞습니다. 신계에 오르기 전에 어느 정도 기반은 다져 놔야지요.”
“로칸 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실 겁니다. 그럼 저희 정령계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들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정령계에는 따로 거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세계수와 저희 정령들의 힘에 의해 변이된 세계일 뿐, 따로 울타리를 치지는 않으니까요.”
“알고 있습니다. 그저 동맹으로서 지지를 해 주시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고마운 일이군요. 그 정도라면 정령신께서도 기뻐하실 것입니다.”
‘정령신?’
역시 정령들에게도 신이 있던 것일까?
반신 등급 중에서도 최상위 존재 중 하나인 대정령들은 공경을 담아 정령신을 언급했다.
그러자 의도치 않은 일이 발생했다.
[정령신의 축복을 받으셨습니다.]
[모든 정령과 원소가 당신을 축복합니다.]
정령신의 축복!
속성 저항력과 공격력이 크게 증가하는 것은 물론 재생 능력이 강화되는 것이 느껴졌다.
정령계를 가만히 놔둔 대가라고나 할까.
어쩌면 신계에 올라서도 정령신과는 꽤 괜찮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다 생각하며 간단히 대화를 나누고 다시 천상을 누비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천상의 약 10분의 7이 넘어왔습니다.”
천족과 마족의 새로운 대표들을 만나 상황을 보고받았다.
10분의 7.
환마계의 정벌 소식이 들리자마자 대거 투항을 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자면 아직 3할이나 되는 지역이 로칸에게 저항하며 버티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자유 도시와 몇몇 종족들의 주요 거점들.
오히려 로칸은 아직도 3할이나 남았다는 사실에 살짝 놀라며 그들에게 되물었다.
“그래서 얼마나 걸리지?”
“그중 1할 정도는 일주일 이내로 점령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다만?”
“방문자들의 저항이 생각보다 거셉니다. 그리고…….”
“방문자들이? 그리고 또 뭐지?”
돌아온 대답은 조금 의외였다. 저항 세력의 중심에 방문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방문자, 즉 유저들이라면 이미 로칸에게 굴복한 상태가 아니던가?
각 국가의 지상 영토에 로칸교가 없는 곳이 없으니 당연히 참전을 포기하고 관망할 것이라고 판단했는데 의외로 저항 세력이 제법 되는 듯싶었다.
“그들과 일부 반신들이 타락의 힘에 몸을 맡겼습니다. 그 때문에 제압에 어려움이 조금 있습니다.”
“타락?”
이건 좀 문제였다. 타락에 물든 이들이라면 그들을 사냥해 신성을 획득한 이들에게도 영향을 미치지 않던가?
그런 만큼 천족이든 마족이든 함부로 힘을 쓸 수 없는 입장이었다. 반대로 그들은 타락에 몸을 내맡긴 대가로 큰 힘을 얻었을 테고.
“좋아. 그건 내가 해결하지.”
그나마 로칸이 축복을 발휘하면 어느 정도 이상의 타락에는 영향을 받지 않겠지만 이건 확실히 자신이 나서는 편이 좋을 것 같았다.
“사흘 주지. 나머지는 그 안에 정리하도록.”
“……예.”
대신 천족과 마족들은 좀 더 혹독하게 몰아붙였다.
그조차 하지 못한다면 자신들의 쓸모를 증명하지 못하게 되는 셈이니 그들로서도 죽기 살기로 부딪칠 수밖에 없을 터였다.
그들이 지금 천족군과 마족군을 움직일 수 있는 권한을 얻은 것도 특출하게 능력이 뛰어나서라고만은 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천상 통일의 꿈이 한 발자국 앞으로 다가왔다.
‘타락이라…….’
그들을 모두 떠나보내고 로칸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타락을 퍼트리던 놈들을 모두 정리했건만 또다시 타락이라고? 또 다른 형태로 타락의 힘이 퍼지고 있기라도 한 것일까?
아니면 라그나로크가, 오딘이 도망치기라도 한 걸까?
슬쩍 알아보니 그건 아니었다.
타락의 사도랍시고 까불던 오딘은 수십 번의 죽음을 겪은 뒤 다시 나타나지 않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어쩌면 로그아웃을 한 척하다가 몰래 빠져나갔는지도 모르지만 부활 장소를 통제하고 있는 이들의 말에 따르면 그런 흔적은 딱히 발견되지 않았다고 했다.
“칼튼과 같은 부류인가? 흠, 일단 부딪쳐 보는 수밖에.”
고민하던 로칸은 다시 몸을 움직였다. 역시 책상만 두드리고 있는 것은 영 성미에 맞지 않았으니까.
그들이 보고한 대로, 타락자들이 모여 있다는 거점을 향해 친히 발걸음을 옮겼다.
“저기인가?”
“예!”
이미 천상의 도시 대부분은 로칸의 손에 들어와 있었다.
천족군과 마족군에게 맡겨 두느라 아직 소유권을 회수하지 못한 곳들도 있긴 했지만 그 수는 적었고, 소유권이 없다고 로칸을 주인 대우 하지 않는 곳 또한 없었다.
로칸은 그들을 움직여서 도시를 포위했고, 성안에서 저항중인 이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인간 배신자 매티스쿼카][Lv 431+20]
그들의 보고는 사실이었다.
일전에 보았던 것처럼 그들의 레벨에는 플러스 표시와 함께 뻥튀기된 레벨이 붙어 있었고 그를 통해 반신의 지경에 오른 이들이 제법 많았다.
수십, 수백의 반신이라면 로칸을 어찌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는 모양.
그러나 로칸은 피식 미소를 지었다.
이미 신위를 얻기 전에도 반신들을 무수히 때려잡고 다닌 그였으니까.
대신 적당한 도끼 하나를 쥐고 그들에게 선공을 날렸다.
“스로잉!”
게임 초반에 익힐 수 있는 일반 스킬 중 하나인 스로잉이었다.
그러나 신성이 담긴 이상, 그 위력은 마스터 스킬 그 이상이 되었다.
콰앙!
도끼 투척에 당한 성문이 단숨에 파괴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아예 성벽째 흔들리며 도시가 소란스러워졌다.
“로칸이다!”
“놈이 나타났다!”
한 놈쯤 잡아다 어떻게 타락의 힘을 얻은 것인지 묻고 싶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다 죽이고 마지막 남은 한 놈에게 물어도 충분할 테니 말이다.
“축복 : 공허를 품은 자.”
로칸은 즉시 신성을 일으켰다. 가진 능력의 일부를 아군 모두에게 퍼트리고 가장 선두에 섰다.
“폭력의 신. 절대자의 힘.”
이제는 지속 시간을 계산하지 않아도 좋은 두 스킬을 시작부터 발현했다.
사실 신성으로 지속 시간을 늘리지 않아도 그 전에 상황이 종료될 확률이 높았지만 말이다.
“온다!”
“작전대로 해!”
그러자 성의 안쪽에서도 즉시 반응이 왔다.
그들 나름대로의 계획이 있는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저항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부는 로칸의 군대를 막고, 또 일부는 우르르 몰려나와 로칸을 직접 맞이했다.
“고작 그 정도로?”
그 수가 약 1백.
뻥튀기된 레벨을 기준으로 모두 반신급의 존재들이었지만 로칸은 코웃음을 쳤다.
이미 격이 달라진 이상, 몇 명이 달려들든 자신의 상대는 아니었으니까.
“쳐라!”
“……?”
그러나 놈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지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한데, 뭔가 이상했다.
만약 자신이 그들의 입장이라면 되든 안 되든 처음부터 필살기급의 스킬들을 마구 퍼부어 댔을 텐데.
그리고 좀비처럼 되살아나며 끊임없이 차륜전을 펼치려 들었을 텐데 놈들은 스킬 하나 사용하지 않고 순수 무력으로 덤벼드는 것이다.
‘빠르기는 한데…….’
물론 그 속도와 힘이 상당했다. 마치 반신 시절의 자신을 보는 듯 규격을 넘어선 수준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렇다 해도 무기를 부딪칠 때까지 스킬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 것은 이상했다.
“이러면 봐줄 줄 아는 건가?”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지만 로칸은 그들을 봐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이 그렇게 나올 경우 똑같이 스킬을 봉인하고 싸울 거라고 생각한 걸까?
물론 그런 생각이 잠시 들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그, 같은 행위를 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수준이 어느 정도 맞을 때의 이야기였다.
가지고 놀 만한 가치가 있을 때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콰앙!
로칸은 시작부터 전력으로 부딪쳤다.
신성 다발로 찍어 누를 수도 있지만 그들에게는 그것도 아까웠기에 본래 가지고 있던 스킬에 신성을 더해 강화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타락의 힘이 몸 안을 파고듭니다.]
[타이틀 ‘공허를 품은 자’ 효과로 타락의 힘을 온전히 흡수 합니다.]
일격에 무기가 박살 나고, 살이 찢겼으며 뼈가 부러졌다.
제대로 걸리면 몸이 두 쪽이 나 버릴 강격이 한순간 수십 번이나 펼쳐졌다.
적들은 속수무책이었고, 로칸은 초식동물들 사이로 뛰어든 포식자처럼 마구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진짜 이상한데.’
전투가 일방적으로 흘러가는 것은 실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끝까지 스킬을 사용하지 않았다.
‘혹시 사용하지 못하는 건가?’
이쯤 되면 의심이 들 정도였다.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컥!”
가만히 눈을 빛내던 로칸이 그들 중 하나의 목을 움켜쥐었다.
녀석이 버둥대며 도망치려 들었지만 로칸이 움직인 타락을 봉인한 사슬이 움직이며 녀석을 완전히 제압해 버렸다.
“제길! 모두 시작해!”
“……!”
그때, 나머지 타락자들이 뭔가를 시작했다.
그동안은 아무런 스킬 시동조차 없던 이들이 일제히 힘을 내뿜으며 로칸을 겨냥한 것이다.
“흥!”
하지만 겨우 그 정도에 쫄 로칸이 아니다. 배틀 액스에 신성을 가득 실으며 일수에 모두를 갈라 버릴 준비를 했다.
“공허에 ‘나’를 바칩니다!”
“바칩니다!”
“……!”
그 순간, 녀석들의 모습이 변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