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 천상 통일 (2)
“모든 게 다 신성 덩어리인데 그냥 놔두긴 아깝잖아?”
로칸의 입장에서 지상과 천상의 모든 것이, 모든 존재가 다 신성 덩어리로 보였다.
한데 그것들을 가만 두고 신계에 올라간다?
아깝기도 했고 자신의 경우 유저이기 때문에, 혹은 지상과 천상에 기반이 확고하기 때문에 신계에 오르더라도 딱히 다시 내려오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다.
당장 어떤 퀘스트라도 받아서 한동안 내려올 수 없게 된다든가, 일정 수준이나 조건을 만족 시키지 못하면 내려올 수 없다는 식으로는 발이 묶일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만약 그 틈에 지상과 천상에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다면?
대표적으로 반란이 일어나거나, 영역 침범, 전쟁 따위가 벌어진다면?
로칸은 손가락을 빨며 자신의 기반을 내어 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는 일단 지상과 천상의 기반부터 공고히 할 필요가 있었다.
“천하 통일, 아니 천상 통일인가.”
결국 로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하나였다.
천하 통일.
정확히는 천상 통일이 옳은 표현이리라.
이미 지상은 사실상 통합한 그이지만, 심지어 타국의 활동 영역들까지 복속시키고 로칸교를 국교로 삼도록 강제한 그이지만 아직 완성된 통일은 아니었다.
또한 지상보다 더 중요한 곳들이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천상 통일.
그리고 세계의 통일.
이 두 가지를 이루어야 진정한 천하 통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미 마계를 일통하고 천계까지 쳐부순 그였지만 보유한 땅덩어리의 크기로 보자면 미약하기 그지없는 수준이었다.
그 천계의 땅과 주민들을 모두 발아래에 두고, 감히 저항하거나 반기를 들 수 없도록 만들어 두는 것을 선행하지 않으면 마음 놓고 신계에 오르지 못할 것 같았다.
‘세계는 어쩔 수 없다고 치고.’
그가 품고 있는 세계들이야 천천히 정복이 이루어지고 있고 자신의 마음대로 속력을 내서 통일을 이룰 수 없으니 논외로 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개입할 수 있는 방식이 늘어났다면 머지않아 결국 통일을 이루게 될 터.
신계는 어떤 모습일까, 또 어떤 존재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궁금하긴 했지만 적어도 어느 한쪽의 기반은 확실하게 다져 두고서야 신계에 오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해야 할까.
‘먼저 치거나, 고립시키거나.’
현재 천상에서 가장 큰 세력은 역시 천계였다.
1급 천족이 연달아 사망하며 구심점을 잃었다고는 하지만 요인 암살에 지나지 않았기에 세력만으로 따지자면 그들의 힘이 가장 크고 강했다.
게다가 무려 전체 유저의 3분의 1가량이 천족으로 진영 변경을 했기에 그 잠재력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건 로칸이 마계를 통일했다 하더라도 함부로 넘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럴 땐 뭉치기 전에 박살을 내 놓는 게 답이지.”
하지만 단순히 마계의 왕, 최강의 반신이 아니라 진짜 ‘신’이라면 어떨까?
그래도 과연 천계가 벽처럼 느껴질까?
로칸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당장 부담스러운 천계를 버려두고 주변의 존재들부터 집어삼키는 것도 분명히 방법이었지만 흔들리다 못해 흩어져 버린 천계가 다시 뭉치도록 시간을 주는 것은 그리 좋은 결정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가장 크고 강한 세력인 천계를 쳐부수고 복속시킨다. 그다음 단숨에 나머지 소수 세력들을 복종시킨다.
일의 순서가 명확해졌다.
“굳이 진영 대결로 몰고 갈 필요는 없지.”
순간 로칸은 마계의 반신들을 집합시킬까 했지만 곧 생각을 접었다. 마족들을 끌어들일 경우, 진짜 마계 대 천계의 종족 대전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로칸 자신이 마왕, 아니 이제는 마신이 되었으니 마찬가지일 수도 있지만 엄밀히 따지자면 로칸이 마족인 건 아니었다.
그 작은 차이가 주는 거부감의 크기는 생각보다 크다.
마족들이 ‘강자’에게 굴복했듯이 천족들 또한 ‘마왕’이 아닌 ‘새로운 신’에게 굴복하는 것이 될 테니까.
때문에 로칸은 즉시 날개를 펴고 천계의 중심으로 향했다.
이미 몇 번이고 와 본 경험이 있으니 길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멜에게는 좀 미안하군.”
지금 1급 천족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아니 1급부터 3급까지의 천족 지위가 모두 비어 있다고 보는 편이 옳을 터였다.
하멜이 천신의 사도로서 그 체제를 개편하는 중이었고, 혼란에 빠진 천계를 안정시키는 데 힘을 쏟고 있었다.
천신마저 로칸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 만큼 하멜에게 요청한다면 천족들의 동의를 얻어 동맹을 맺는 정도는 지금도 충분히 가능할 터였다.
마족의 왕이기 이전에 새로운 신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천신의 계시 따위를 들먹이면 못 이기는 척 숙이고 들어올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로칸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들은 로칸 자신과 대등한 관계로 있을 만한 수준이 아니기 때문이다.
동맹 혹은 파트너십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두 존재 또는 집단이 대등한 위치에 있을 때의 이야기.
세력으로 보나 힘으로 보나 압도적인 로칸이 그들을 굳이 존중해 주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로칸이 고고히 날아 천족의 수도성 앞에 섰다.
“천족들은 들어라! 이제부터 천계는 내가 지배한다.”
호쾌한 일갈이었다. 자신감의 표출이기도 했지만 그 자체도 강력한 의지가 담겨 주변 천족 모두에게 전달되었다.
“뭣?”
“마왕이 어찌……!”
“선전포고?”
“신마대전이 시작되는 것인가!”
그 선언을 들은 천족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라푸제를 끌어내리며 보았던 로칸의 무위를 기억하기에 벌써 마음에서부터 굴복한 이들도 있었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두려워하는 자들도 있었으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체념하거나 강하게 반발하는 자들도 존재했다.
그러나 로칸은 그들의 반응을 기대하지 않았다.
어찌 나오든 자신이 뜻한 바를 행할 뿐이었다.
“로칸님!”
갑자기 나타나 천계를 내놓으라는 로칸의 요구에 성에 틀어박혀 행정 업무를 처리하던 하멜이 깜짝 놀라 달려 나왔다.
그에게도 전혀 상의하거나 언질이 있던 것이 아니니까.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천계와 천족은 이제 로칸님과 마계에 적대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거둬 주십시오. 당장 새로운 고위 천족들을 모아 동맹에 대한 합의를…….”
“됐다.”
바로 이렇게 나올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하멜에게 이야기한다면 이런 식으로 유하게 나올 것이 뻔하니까.
그렇기에 협상이 아닌 선언을 한 것이었다.
고위 천족의 합의? 그 말인 즉 하멜이 천족들을 완전히 휘어잡은 것도 아니라는 뜻이 아닌가.
1~3급까지의 기존 고위 천족들이 몰살을 당했다 해도 태생적인 신분 차이로 4급 천족의 지위에 머물러 있던 반신들도 여럿이 살아 있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로칸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러다 그 ‘합의’에 의해 자신과 척을 지기로 결정한다면?
과연 하멜은 나중에라도 그것을 막을 힘이 있을까?
“그냥 내 식대로 처리하지.”
로칸이 흉흉한 안광을 빛내며 힘을 개방했다.
갈무리해 두었던 신격을 드러내며 그들을 압박했다.
“헉!”
“이, 이건……!”
“반신의 수준이 아니야. 설마…… 신위를?”
그 간단한 퍼포먼스에 천족들의 표정이 달라졌다.
신위자. 반신 수십이 달려들어도 승부를 자신할 수 없는 상대, 아니 패배 확률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 분명한 상대를 보며 절망에 빠졌다.
“이제 이야기가 쉽겠군. 마지막으로 말하겠다. 지금부터 천계는 내가 지배한다. 불만 있으면 나서도록.”
“그런…….”
이건 폭거였다. 날강도 같은 행위였다.
그러나 누구도 로칸의 앞에 나서지 못했다.
힘의 논리가 절대의 법칙처럼 군림하는 세상이니까. 이곳은 그런 곳이니까.
그동안은 압도적인 무력을 갖춘 이가 없었을 뿐, 천족도 마족도 그 외의 다른 종족들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것을 알기에 대부분의 천족들이 마음으로 굴복했다. 저항의 의지를 잃어버렸다.
하다못해 신위에 가까운 천신의 대리자 또는 후예라도 남아 있으면 모르지만 일전의 사건을 통해 현재 신위를 노려 볼 수 있을 만한 수준의 반신들은 모조리 죽어 나간 상태였으니까.
이런 상황에서 마계와의 일전도 부담스러운데 신위를 획득한 저 괴물, 로칸에게 저항한다? 그건 멸족을 자초하겠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당장의 굴욕을 참지 못해 소멸하는 건 바보짓이지. 차라리 살아남아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어쨌든 마족은 아니잖아?’
그렇기에 천족들은 빠르게 자기합리화를 시작했다.
행복 회로를 돌리고 자기변명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마침, 로칸이 그들에게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어 주었다.
“너희가 누구를 믿든 상관하지 않겠다. 하나 분명한 것은 내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며 나를 왕으로서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거부하는 것은 마음대로지만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를 것이다.”
천족은 강자존을 법칙으로 삼는 마족과 달리 천신에 대한 신앙을 존재의 기반으로 삼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신앙마저 통제하고 로칸교를 믿으라 한다면 목숨을 걸고 덤빌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위협이 되지는 않겠지만 게릴라전이라도 시작하면 상당히 귀찮아질 게 분명했기에 로칸도 이쯤으로 정리한 것이다.
어차피 복속되기만 한다면 그들을 제약할 방법은 많았으니까.
‘신앙이 아니라 왕 정도라면…….’
‘내 신앙은 굳건하지. 암, 그렇고말고.’
그 계산은 정확히 먹혀들어 갔다.
사고의 틈, 변명거리를 내어 주자 막다른 길에 몰렸던 천족들이 덥썩 미끼를 물었고, 그 편리한 생각은 전염병처럼 빠르게 번져 갔다.
[천신이 슬픈 표정을 짓습니다.]
[천신이 당신에게 작은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
천신 역시도 로칸에게 불만을 토하거나 과격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멀리 있는 신앙보다 눈앞의 폭력이 더 무섭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나마 천신이 지상과 천상에 약간이나마 개입할 수 있는 기반인 천족들을 몰살시키지 않는 것에 감사를 해야 하는 입장.
로칸도 굳이 신계에 올라가 그와 사생결단을 내고 싶은 생각까진 없었기에 슬슬 마무리를 지었다.
“모든 천족의 영지는 내가 소유한다. 불만 없겠지? 도전은 언제든지 받아 주지.”
천족들이 진정으로 굴복했는지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천족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굴복할 것인지 서명이라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래서 로칸은 가장 쉬운 방법을 택했다.
영지 몰수.
정확히는 기존처럼 이용할 수 있게 해 주지만 그 소유를 자신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수도를 비롯해 천계와 천상에 있는 모든 거점이 로칸의 소유가 되는 것이다.
이는 아직 마계에도 적용하지 않은 일이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똑같이 할 것이니까.
대신 자치권은 인정해 줄 터였다.
그럼에도 반신들은 영지 운영을 통한 신성 획득이 어려워지니 불만이 쌓이겠지만 그래서 뭐 어쩔 텐가?
“꼬우면 너희도 신위를 얻든가.”
압도적인 힘과 폭력 앞에 장사 없는 법이었다.
“천족과 마족 모두에게 명한다. 일단 천상의 모든 중립 영지들을 내게 바치도록!”
그렇게 천족의 모든 거점을 손에 넣은 로칸은 천계와 마계를 통합한 최초의 왕으로서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본격적인 천상 통일이 시작되었다.